제 182 화 내문에서 다시 만나자
“무흔 사형, 내문에서 다시 만나자.”
엽운의 가벼운 한 마디 말은 모용무흔의 마음을 거세게 후려쳤다.
천검종에 들어온 이래 이런 조롱을 받아본 일이 있었을까.
만약 모용무흔이 훗날 정말로 엽운을 내문에서 만나게 된다면, 오늘의 조롱은 그에게 영원한 심마로 남을 것이다.
수선의 길에서는 절대로 심마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두어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수위의 성장이 멈추게 되며, 더 심할 경우 수위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
모용 가문에는 특수한 공법이 있으며 수련 자원 역시 부족할 리 없었고, 각종 묘약과 보물이 차고 넘쳤다.
모용 가문의 모든 제자들 가운데 수위가 약한 이는 한 사람도 없었으며, 진기 역시 몹시 강력했다.
모용무흔은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모용무정과 모용무흔 두 형제는 재능이 천부적으로 뛰어났다.
더구나 모용무정은 일찍이 촉기경에 도달하였고, 천검종 전체에서도 나이가 지긋하신 선배 몇을 제외하면 대적할 자가 없었다.
모용무흔은 싸늘한 표정으로 엽운을 바라봤다.
두 눈에서 차가운 빛이 번뜩였고,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목 장로님. 다른 볼 일이 없다면 저는 두번째 시험을 치르러 가도 괜찮겠지요.”
목 장로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모용무흔에게 맞서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며 한 수 만에 먼지가 되어 버릴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엽운이 모용무흔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 아니라 진기의 대결에서도 패배하지 않고, 심지어 우위를 점하기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은 모두 엽운이 반 수 위였음을 알아봤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모용무흔의 진정한 수위는 목 장로 등의 인물은 아무렇지도 않게 쓰러뜨릴 수 있는 수준인데, 엽운 역시 이에 필적하는, 아니 심지어 더욱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목 장로는 입가를 두어 번 씰룩이며 저도 모르게 모용무흔을 올려다봤다.
모용무흔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싸늘하게 군중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며 더 할 나위 없이 냉엄했다.
“내 공격을 한 번 막아내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고, 네 입으로 내문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으니, 내문에서 다시 보자.”
모용무흔은 평정심을 되찾았고, 살기와 분노가 천천히 사그라 들며 목소리도 담담해졌다.
엽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같은 정신력은 너무도 무서운 것이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저 정도로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흔 사형은 역시 대단하군요. 사람을 그렇게 들었다 놨다 하다니. 그럼 내문에서 봅시다. 그때는 함께 협력할 수 있게 되길 바라지요.”
엽운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다. 네가 충분한 실력만 보여준다면 어찌 협력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모용무흔은 웃음을 지었다.
무거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그럼 감사하지요. 무흔 사형.”
엽운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일제히 웃음을 지었다.
칼날 위를 걷는 것 같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두 사람은 오래도록 알고 지내던 옛 친구처럼 다시 만났음에 기뻐했다.
란 장로 일행은 서로를 쳐다봤다.
이 두 소년은 제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함을 지녔고, 심지어 간교하기까지 했다.
이 같은 정신은 란 장로 같은 이들도 가지지 못한 것인데, 스무 살이 체 되지 않은 엽운과 모용무흔이 이 정도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니, 정말 무서운 일이다.
“이 두 제자는 훗날 성취가 끝도 없겠군.”
순우연은 조금 감격한 듯 나지막이 말했다.
란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우리 천검종이 우뚝 솟으려나 봅니다. 모용가의 형제와 엽운이 나타난 것이 그 조짐이겠지요. 이십 년 안에 천검종 전체는 이 세 사람의 천하가 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서로를 도우며 경쟁 상대에서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천검종의 복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훗날 진나라 수선계를 통일 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맞다. 분명 그렇지.”
목 장로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엽운이 보여준 모습은 너무도 예상 밖이었다.
“두 사람, 제대로 봤습니다. 저 세 사람은 모두 하늘의 총아라 할 수 있으며 훗날 끝없는 성취를 거둘 것 입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성장한다니,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는 살 수 없는 법인데 어찌 세 마리가 같이 살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그들 중 한 쪽은 억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엽운이 불리한 것 같습니다만.”
순우연은 천촉봉 외문의 대장로 답게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란 장로와 목 장로는 어리둥절했고, 곧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선의 길에서는 수위가 높아짐에 따라 동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친형제나 부자지간에서도 서로 속고 속이게 된다.
하물며 모용무흔 형제와 엽운은 이제 서로에게 큰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 목 장로님께서는 계속해서 내문 제자 시험을 진행해주시지요. 전 먼저 가겠습니다.”
모용무흔은 웃음을 띈 얼굴로 엽운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훌쩍 뛰어오르자 영수 한 마리가 허공에서 나타나 그를 태우고 빠르게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조롱을 당하고도 참으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그의 마음가짐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엽운은 모용무흔이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어느새 조금은 바뀐 것 같았다.
“자, 시험을 계속 진행하자꾸나. 두번째 시험은 방금 전의 시험처럼 간단하지 않을 거다. 이번 시험에서 너희는 8급 요수를 상대해야 한다. 놈을 쓰러뜨리거나 8급 요수의 공격을 한 주향의 시간 동안 버티면 통과다.”
목 장로의 목소리가 곧바로 울려퍼졌다.
모용무흔이 자리에 없으니 그는 진정한 시험관이 되었다.
“좀 전의 순서대로 한 명씩 나오너라.”
란 장로가 말했다.
곧 그가 벽을 한 번 두드리자 양쪽으로 갈라졌고, 직경이 약 삼사십 장 쯤 되는 원형의 무대가 나타났다.
원형 무대의 주위에는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수십 개의 우리가 있고, 우리 안에는 각종 요수들이 울부짖거나 눈을 감고 드러누워 있었다.
순간 차가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제자들은 아직 모용무흔과 엽운이 벌인 전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다음 시험을 마주했는데, 놀랍게도 최소 8급은 되는 요수를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8급 요수란 어떤 것인가?
그것들은 연기경 초기의 제자를 가볍게 찢어버릴 수 있으며, 일전에 취봉의 수호자였던 9급 요수 신우취왕의 실력은 엽운 조차 당해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천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엽운 일행은 도망도 치지 못했을 것이며, 신우취왕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이 8급 요수들은 비록 신우취왕과는 한참 차이가 나지만, 연기경 4중 이하의 제자들은 이길 수 없는 존재였다.
순간, 수위가 연기경 4중에 도달하지 못한 제자들 대부분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첫번째 시험을 가볍게 통과했기에 두번째 시험 역시 그닥 어렵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지금에서야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문 제자란 종문에서 선발한 정예 제자의 기초라 할 수 있는데, 그런 내문 제자 시험의 난이도가 어찌 쉽겠는가?
“순서에 따라, 단진풍이 먼저 나오거라. 만약 먼저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좋다.”
란 장로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럼 제가 먼저 하지요.”
단진풍은 조금도 두렵지 않은 듯 했다.
그의 수위는 이미 연기경 2중을 돌파했고, 진정한 실력만 놓고 본다면 연기경 4중의 제자와 비견 될 만한 수준이었다.
8급 요수쯤은 조금도 두렵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단박에 죽일 수도 있다.
8급 요수 빙설갈사는 온 몸이 새하얀 사자인데, 꼬리는 평범한 사자와 다르게 새빨간 전갈의 침이 달려있었다.
빙설갈사는 몹시 강한 힘을 지녔고, 속도 역시 무척 빨라, 연기경 3중의 제자가 그의 평범한 공격조차 쉽게 막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그의 전갈 꼬리인데, 불시에 날아오는 꼬리에 맞게 되면 빠르게 독이 퍼지며 혈액을 얼려버려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8급 요수 중에서도 특출 난 편이었고, 9급을 바라보는 8급 요수 중 하나였다.
단진풍의 지금 수위로 빙설갈사를 죽이려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하며, 자칫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참고로 이 빙설갈사는 단진풍이 선택한 것이 아니며 감독관에 의해 임의로 뽑은 것이다.
빙설갈사를 뽑았으니, 단진풍은 운이 나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진풍의 눈에 놀라운 기색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전의로 불타올랐다.
“단 사형, 조심하세요.”
여명홍은 빙설갈사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대진제국에서 왔기에 요수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뛰어났고, 빙설갈사의 실력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안심해 명홍. 내가 저 녀석의 꼬리를 잘라서 빙설갈사가 아닌 꼬리 없는 사자 새끼로 만들어 버리면 얼마나 흉측할까?”
단진풍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소리내어 웃었다.
곧 목 장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펄쩍 뛰어올라 빙설갈사가 있는 무대 위로 올랐다.
금방 우리에서 꺼내진 빙설갈사는 사람 하나가 돌진해오는 것을 보고 화를 참지 못했다.
오랜 시간 갇혀 있었는데, 지금 웬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이 감히 도전해 오는 것이었다.
빙설갈사는 온 몸의 새하얀 털을 쇠바늘처럼 세우고 뒷발에 힘을 실어 단진풍을 향해 달려들었다.
단진풍은 큰 소리로 웃으며 백일창을 꺼내들었다.
진기가 주입되자 백일창은 굉음을 내고 빙설갈사의 새빨간 입 속을 향해 날아갔다.
“웅지직!”
파일창은 번개처럼 빙설 갈사가 반응하기도 전에 허공을 가르며 입 속으로 돌진했다.
새빨간 피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고, 하늘에서 꽃이 피듯 피가 흩날렸다.
단진풍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 일격의 위력이 이 정도까지 강해졌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단 일격에 8급 요수 중에서도 제법 강한 빙설갈사의 목구멍을 뚫어버린 것이다.
“하하! 8급 요수는 개뿔. 고작 이 정도냐!”
단진풍이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웃으며 파일창을 세게 뽑자 엄청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단 사형, 조심해요!”
별안간 여명홍이 소리쳤다.
단진풍은 흩날리는 핏방울 사이로 빽빽한 선홍빛 바늘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한 방울 한 방울의 피 속에서 족히 수백 개가 넘는 바늘이 튀어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