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0 화 주인의 도박
별안간 엽운의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선명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무슨 말인지 들을 수는 있었다.
엽운은 잠시 멍해졌다.
곧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말하는 거냐? 신우취왕.”
엽운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잔말 말고 도와줘. 보아하니 번개를 조종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은데, 어쩌면 그걸로 내가 천겁을 이겨내게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만약 그렇게 해준다면 내가 널 주인으로 섬기며 나를 부릴 수 있게 해주겠다.”
신우취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선명히 세 사람의 귓가에 들려왔다.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자신의 눈과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신우취왕은 한 마리의 요수다.
설사 이미 영지를 깨우쳤다 하더라도 사람의 말을 뱉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수가 영수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영지를 가지고 있기에 사람의 뜻을 이해하고 서로를 도우며 함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등급이 높은 영수라 하더라도 사람의 간단한 말 몇 마디를 알아듣는 게 고작이며, 지금의 신우취왕처럼 사람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이미 영수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일이었다.
더구나 신우취왕은 아직 천겁을 이겨내고 완전히 영수가 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말도 안 돼. 요수 주제에 사람의 말을 한다니.”
여명홍은 크게 놀라 소리쳤다.
“시끄럽다. 거기 번개를 조종하는 애송이. 네가 원한다면 손을 잡고 함께 천겁을 막아내자. 물론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다고 해도 널 미워하지는 않으마. 그게 인지상정 이니까.”
신우취왕은 엽운을 바라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엽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말했다.
“천겁은 너무도 강해서 내 지금의 수위로는 막아낼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생각해보라는 것이지. 네 몸에서 번개의 힘이 느껴지는데, 어쩌면 그걸로 내가 천겁을 막을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을거야. 하지만 번개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릴 가능성이 더 크지.”
신우취왕은 여전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엽운은 망설였다.
아직도 내려오며 점점 강대해지는 천겁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엽운, 안 된다. 이 천겁은 너무도 강해. 네 수위가 지금보다 열 배 강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거야.”
단진풍은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맞습니다. 엽 사형, 저 번개의 힘을 보세요. 도저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입을 것 같은데, 어떻게 저걸 막아내겠습니까.”
여명홍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엽운은 신우취왕의 머리로 물통만한 굵기의 천겁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본디 그의 수위라면 이 천겁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며, 닿기만 해도 죽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번개 속에 들어가 신우취왕을 도우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마음속에서는 모순된 생각이 오고갔다.
만약 신우취왕을 도와준다면, 그의 주인이 되어 부리는 것 이상의 이득이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적으로 생각해보니, 저 번개 속으로 들어간다면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애송이, 어때? 안 되면 말고.”
신우취왕이 울부짖었다.
그의 몸에서 희미한 금색 빛이 빛났다.
엽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만약 내가 널 도와 천겁을 막는데 성공한다면, 나를 주인으로 섬긴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거지?”
“하늘에 맹세하마. 만약 천겁을 이겨내 살아남는다면 네가 내 주인이 되는 거다. 내가 너를 주인으로 섬기고 훗날 내 생사는 너의 손에 달려있다는 피의 맹세를 하면 돼.”
신우취왕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서 기쁨이 묻어나왔다.
단진풍과 여명홍은 일제히 고개를 저으며 그를 말렸다.
“안돼. 절대 안돼.”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엽운의 팔을 잡아 끌었다.
엽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고개를 들어 신우취왕의 머리 위 맷돌만한 크기의 번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결심이 선 듯 두 사람을 뿌리치고 번개처럼 달려 나갔다.
“착한 녀석이군. 내가 제대로 본 것 같구나. 진짜로 천겁에 범위에 들어오다니 말이야. 나 신우는 천칠백삼십팔 년을 살았는데, 너처럼 용기 있는 녀석은 처음 본다.”
신우취왕은 천겁 속으로 들어온 엽운을 보고 조금 놀란 듯 했고, 곧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천칠백삼심팔 년을 살았다고? 털 없는 닭은 늙어 죽지 않나봐. 그렇게나 오래 살다니.”
엽운은 어리둥절해하며 털이 벗겨진 신우취왕을 바라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털 없는 닭이라고? 감히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거냐? 천겁을 이겨내고 나면 이 몸의 무서움을 알려주마.”
신우취왕도 어리둥절해했다.
그는 하마터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천겁을 이겨내면 내 종이 된다면서, 맹세를 잊지 말라고.”
엽운은 그를 보지 않고 머리 위 맷돌만 한 굵기의 천겁을 바라보았다.
“천겁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뭐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천칠백팔십삼 년 동안 나도 충분히 참았다. 내 형제들은 이미 진작에 영지를 깨우쳐 선수의 영역에 도달했을 거라고.”
신우취왕은 천겁을 바라보며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했다.
“선수라고?”
엽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신우취왕을 봤다.
털이 벗겨진 몸에서 선수가 될 잠재력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송이. 넌 번개를 부릴 수 있잖아. 그걸 천겁의 힘에 이용해봐. 못할 것 같으면 썩 꺼져라. 아까운 목숨 버리지 말고.”
신우취왕은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엽운을 보고 소리쳤다.
엽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엄청난 기세의 번개를 바라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사실 그는 몹시 놀랐다.
천겁의 완전히 번개의 힘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그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만약 평범한 연기경 제자였다면, 천겁의 위압만으로도 정신이 붕괴되고 영혼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엽운은 위압의 고통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듯, 오히려 위압을 무시했다.
번개의 영기를 수련한 사람만이 이 정도 거대한 번개의 위압을 태연하게 견뎌낼 수 있었다.
“애송이, 뭘 하고 있어? 뭐든 해봐.”
바로 그때 신우취왕이 고함을 질렀다.
곧 하늘 위 맷돌만 한 굵기의 번개가 둘로 갈라졌고, 하나는 신우취왕을 향해, 다른 하나는 엽운을 향해 떨어졌다.
두 갈래로 나뉜 천겁은 두 사람을 향해 날아왔다.
신우취왕은 몸집이 거대했기에 천겁은 그에게 먼저 닿았다.
맷돌만 한 번개가 그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신우취왕은 나지막이 울부짖었다.
거대한 몸 전체가 무너져 내리며 피와 살이 사방으로 튀었다.
믿을 수 없는 고통이 온 몸에 밀려왔고 경맥이 끊어지며 뼈가 부서졌다.
하지만, 의식이 빠르게 사라지는 순간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강렬한 전류가 그의 온 몸을 끊임없이 파괴하며 맴돌고 있었다.
신우취왕은 별안간 머리를 번쩍 들었다.
온 몸에는 피가 낭자했는데, 다 벗겨진 머리에는 혈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깃털 하나 없던 그의 정수리에서 놀랍게도 서서히 금빛 깃털이 자라나고 있었다.
엄청난 파괴력의 천겁은 육신을 파괴할 수는 있었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신우취왕은 천겁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머리 위에 금빛 깃털을 만들어냈다.
순간 무너져 내린 그의 몸이 투명하고 은은한 빛으로 뒤덮였는데, 멀리서 보니 금빛 깃털이 끊임없이 광채를 뿜으며 그를 뒤덮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나머지 하나의 천겁이 엽운의 머리를 향해 매섭게 떨어졌다.
하지만 엽운의 표정에 놀라움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기대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천겁이 몸에 닿는 찰나, 엽운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손바닥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천둥소리를 내고, 보라색 번개가 그의 손바닥에서 춤을 추며 구체를 만들어냈다.
“지지직!”
천겁의 힘이 순식간에 엽운은 뒤덮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번개가 순식간에 쏘아지며 단진풍과 여명홍의 눈을 가려 엽운을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어떡하죠? 엽 사형은 어떻게 된 거에요?”
여명홍은 대경실색 하였다.
엽운이 천겁에 집어삼켜져 절망적인 모습을 자아냈다.
“급할 거 없다. 좀 더 기다려보자. 엽운은 천둥 따위에 죽을 놈이 아니야. 참고로 저 녀석은 번개의 영기를 조종할 수 있어. 우리랑은 다르다고.”
단진풍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단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맷돌만 한 천겁은 끊임없이 신우취왕을 짓눌렀다.
만약 금색 빛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신우취왕은 천겁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어 천칠백삼십팔 년의 삶을 마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머리 위의 깃털은 더 커지지 않았지만 더욱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밤에 본다면 십 리 밖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금색을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천겁의 힘이 사그라들었다.
결국 천겁은 신우취왕의 금색 보호막을 깨트리지 못했고, 보라색 번개는 빠른 속도로 잦아들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렸다.
신우취왕의 몸을 뒤덮고있던 금색 빛 역시 점점 사라졌고, 온통 찢어진 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듯 처참하게 피를 뿜어댔지만, 그 안에는 금빛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하하, 천겁이 이렇게 끝난건가? 난 마지막 천지대겁을 이겨낼 줄 알고 있었지. 지금부터 나는 영수 다. 수위는 빠르게 성장시켜 선수가 될 날이 머지 않았군.”
신우취왕은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며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엉? 어째서 아직도 영지가 개방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신우취왕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몇 장 너머의 공간에 아직도 번개가 보였다.
번개의 광선은 공간의 가장자리에 닿는 순간 사라졌고, 일정한 범위를 넘어오지 않았다.
“설마 저 애송이도 천겁을 이겨내야 내가 영수의 등급에 오르는 것인가?”
신우취왕은 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며 온갖 사람과 요수들을 보았기에, 한 눈에 가능성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애송이, 힘내라. 넌 내 미래의 주인이니까.”
신우취왕은 기대로 가득 찬 눈으로 보라색 번개를 바라봤다.
멀리서는 단진풍과 여명홍이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겁의 위력은 너무도 강력하였고, 번개는 엽운을 안에 반 주향이 넘는 시간 동안 가두었음에도 아직까지 사라질 기미가 안보였다!
“엽운, 좀만 더 힘내라!”
단진풍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명홍은 옆에 조용히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번개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희미한 번개 속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조용히 서 있었다.
비록 생기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위압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