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 화 광탑
5층의 입구에 별안간 구양문천과 나머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 있던 제자들은 옷이 온통 남루해졌고 얼룩덜룩한 핏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여기가 5층이군, 앞의 네 개의 층에서는, 1층에서 뭘 좀 발견한 것 이외에는 텅텅 비어 있었지.”
은파파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얼굴에 가득한 주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누가 먼저 들어온 건 아닐까요?”
손일도는 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하얀 안개가 자욱한 5층을 둘러보았다.
“몇 년간 수련한 건, 개나 줘버린 게냐? 설마 보이지 않는 것이냐, 화운대전의 각 층은 모두 완벽히 깨끗했고 조금의 흔적도 없었다. 만약 누가 들어왔다면 어찌 그렇겠느냐?”
두건명은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조롱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너.....”
손일도는 분노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 그만들 싸우시게!”
구양문천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하얀 안개는 분명 모두들 느끼셨 듯 백사입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백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얼음과 불이 서로 만났을때 일어나는 독특한 반응 입니다. 두건명 당신은 화염계 영기를 수련한 적이 있고, 은파파께서는 얼음계 원소를 가지고 계시니, 번거로우시겠지만 두 분께서 이 백사를 전부 불태워 주십시오,”
구양문천은 수위도 식견도 뛰어나, 단박에 이 하얀 안개가 백사임을 알아차렸다.
만약 엽운이 이 곳에 있었다면 본명 감개무량 했을 것이다.
이 백사가 두려워하는 것이 얼음과 불이었음을 진작에 알았다면, 많은 힘을 들여 이상한 영기과 싸우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은파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지만, 두건명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얼음과 불의 영기가 그들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와 마치 두 마리의 용처럼 빠르게 뒤엉켰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백사는 무로 돌아갔고, 새하얀 옥기둥이 나타났다.
구양문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발길을 옮겨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새하얀 옥기둥 위에 흠집 하나도 없었고, 금이나 균열은 더더욱 없었다.
“공간은닉법이군. 아주 간단하지.”
구양문천은 두 손을 맞잡더니 옥기둥을 향해 빛을 쏘았다.
순간 옥기둥에 두 갈래 빛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화염이 되고 하나는 얼음이 되었다.
“이 허망의 불꽃은 양보할 수 없다.”
두건명은 이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구양문천이시여, 이 빙백의 령은 노인네에게 양보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은파파도 마찬가지로 흥분한 표정이었다.
수십년간 얼음계 영기를 수행해 왔으니, 당연히 이 얼음의 령을 갖게 되면 큰 효과를 볼 것이다.
구양문천은 냉랭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허망의 불꽃이나 빙백의 령이 얼마나 진귀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이 둘을 가져가신다면, 우선 은파파께서는 나중에 보물을 발견하게 되어도 자진해서 분배에 참여하실 수 없게 될 것이며, 두삼족장은 보물을 선택할 기회 중 두 번을 쓰게 됩니다.”
은파파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곧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랄하네! 구양문천 네놈은 화염계 영기를 수련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 허망의 불꽃을 가져간단 말이냐? 이 허망의 불꽃은 당연히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니, 뒤의 보물을 선택하는 일과는 무관하다.”
두건명은 펄쩍 뛰며 고함을 질러댔다.
구양문천은 눈썹을 씰룩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이 허망의 불꽃이 필요 없다는 뜻인가?”
“내가 가지지 않는다면, 네가 가질 생각이냐? 화염계 영기를 수련해 본 적은 있느냐?”
두건명이 소리쳤다.
“역시 너희 두가는 학식이 떨어지는구나. 놀랍게도 화염계 원소를 수련한 사람만이 허망의 불꽃을 가질 수 있다 생각하니 말이다. 설마 이것을 보관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인가?”
구양문천은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보았다.
어리둥절해진 두건명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구양문천, 나를 속일 셈이냐. 이 허망의 불꽃은 화염계 영기를 수련한 수사가 아니라면 다른 그 어떤 방법으로도 가질 수 없다.”
구양문천이 냉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리자, 손에서 새하얀 옥병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맑은 물줄기가 병에서 뿜어져 나와 활활 타오르는 화염 위에 떨어졌다.
순간 벌떡이던 화염은 작은 불씨로 변해 물속에 잠겨 있었다.
마침내 물은 공 모양을 이루어 허망의 불꽃을 가두었다.
“이 루하의 물은 허망의 불꽃을 봉인할 수 있다. 너희 두가의 식견으로는 당연히 몰랐겠지. 네가 갖기 싫다면 내가 가져가도록 하마.”
구양문천은 조소하며 손을 들어 물 구슬을 옥병 속에 넣었다.
“돌려줘. 허망의 불꽃은 나의 것이다.”
두건명은 깜짝 놀랐다.
구양문천이 허망의 불꽃을 가져가겠다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곧장 달려왔다.
구양문천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이더니 몸에서 칼날이 쏘아져 나가 빛을 번쩍이며 사방을 밝혔다.
달려오던 두건명은 다급히 멈추더니 천천히 떨어져 내려왔다.
얼굴에는 한이 가득 서려 몹시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감히 싸움을 걸 지는 못했다.
구양문천의 수위는 이미 그가 당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단칼에 베여 죽고 나면 울고 싶어도 울 수도 없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은파파가 입가에 미소를 띄며 가볍게 두드리자, 한 덩이의 얼음이 공중에서 내려오더니 손톱만한 크기의 수정이 되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보물을 얻은 은파파의 얼굴 주름 사이사이에 미소가 잔뜩 번졌다.
구양문천 역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앞의 네 층에서는 무엇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번 층의 허망의 불꽃과 빙백의 령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 두개의 보물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허망의 불꽃은 영기나 단약을 만들때 쓰이는 최고의 화염이다.
그렇기에 허망의 불꽃을 사용하는 단사들은 모두 각 종문의 존경을 받는다.
허망의 불꽃으로 만들어낸 단약은 성단률이 보통의 단사가 만든 것 보다 월등히 좋을 뿐 아니라 품질마저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빙백의 령 또한, 얼음계 영기를 수련하는 수사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보물이다.
얼음계 영기 속 불순물을 깨끗하게 제거하고, 더 나아가 얼음계 영기를 연화시켜 더욱 강력하게 만든다.
은파파가 받은 손톱만한 빙백의 령은 그녀의 수위를 두 배 가량 향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구양문천이 그녀에게 보물을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써버릴 것이냐 물었을때 그녀가 아주 잠깐만 주저하다 승낙한 것이다.
두 개의 영기는 거두어졌고, 잠시 후 허공에서 문 하나가 사람들의 앞에 나타났다.
구양문천과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에 흥분이 가득했고,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직 두건명만이 음산하고 지독한 눈빛으로 구양문천을 바라보며, 그의 힘줄을 뽑고 살갖을 벗긴 뒤 토막 내어 죽일 수 없음을 한스러워 하고 있었다.
엽운은 이 허무한 공간에서 한참을 걸었다.
한 시진을 걸었는지, 열 시진을 걸었는지, 아니면 이미 보름을 걸어온 것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허무한 공간의 깊은 곳에 들어온 그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무뎌져 버렸다.
심지어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고, 그저 아주 잠깐인 것 같다가도 한참인 것 같았다.
마침내, 앞쪽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속 짓눌려 있던 번민 역시 극에 달했고, 조금만 늦었다면 이 허무 속에서 폭발해버릴 뻔 했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빛이 번쩍이더니, 엽운이 허공의 문에서 뛰어 나오 긴 숨을 들이마셨다.
영기가 몸에 들어와 온 몸이 상쾌했다.
“여기가 7층인가?”
엽운은 머릿속의 번민을 떨쳐내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7층에는 상상했던 공간 진법 따위는 없었고, 눈에 밟히는 것이라곤 평범한 석실 하나가 전부였다.
길이와 너비가 각각 두 장 정도 되는 듯한 협소한 석실이었는데, 5층의 석실과 비교하자니 많이 작았다.
7층의 중앙에는 일렁이는 빛 덩어리가 있었는데, 마치 하나의 광탑 같았다.
“화형, 이 광탑은 무슨 물건이지?”
엽운이 천천히 물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엽운은 몸을 돌려 뒤를 보았는데, 놀랍게도 화일성이 같은 통로를 통해 7층으로 들어오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여기가 7층인가?”
엽운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만약 화일성이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면, 이 곳은 7층이 아닌 다른 공간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진짜 7층은 이미 화일성이 점령하여 그 안의 보물을 죄다 가져갔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중앙의 광탑을 제외하곤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광탑은 약 반 장 높이 쯤 되는데, 그것을 만지지도 않고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생각대로 이 곳이 7층이 맞다면, 분명 진귀한 보물들이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곳은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으니, 화일성이 수작을 부려 화운대전의 어느 위험한 곳으로 보내진 것 일수도 있었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나고, 엽운은 석실 전체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그러나 위험한 일이 생길 징후나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시선은 반 장 높이의 광탑에 멈췄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진기를 정련해내지 못했기에, 진기를 밖으로 방출할 수 없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멀리서 진기를 이용해 먼저 살펴본 뒤에 들어갔을 것이다.
엽운은 광탑까지 약 한 척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손을 들어 휘두르자 중품영석 하나가 그의 손바닥에서 튀어나와 광탑을 때렸다.
“땡!”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고, 중품영석은 마치 금속에 부딪힌 듯 경쾌한 소리를 내며 땅 위로 떨어졌다.
광탑이 실제였다니?
그런데 어째서 겉으로 보기엔 텅 빈 것처럼 보였을까?
엽운은 섣불리 손을 대지 않았고, 흑요검을 꺼내 광탑을 가볍게 건드려 보았다.
흑요검은 이미 부러졌으니, 폐품으로써 활용하면 된다.
이미 자영검을 얻은 엽운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엽운이 너무 조심스러운 성격임을 증명한다.
흑요검으로 광탑을 찔렀지만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고, 검 끝은 금속에 막혀 은은한 한기를 뿜었다.
엽운은 아주 조심스레 여러 번 살펴보았다.
흑요검으로 광탑의 거의 모든 부분을 다 찔러 본 후에야 만족스럽게 흑요검을 거두었고, 발걸음을 옮겼다.
광탑은 약 반 장 정도 높이였고, 이 빛의 덩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빛 속에는 옥처럼 새하얀 보탑이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탑의 중간에는 수많은 사람이 조각되어 있었다.
모두 각기 다른 동작을 하고 매우 생동감있는 모습이었다.
“설마 이곳이 7층이고, 이 광탑이 바로 화운비장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인 것인가?”
엽운은 살짝 웃으며 손을 들었다.
오른속이 광탑을 건드리는 순간, 미소가 가득하던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