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1 화 뇌운화룡계
투박하고 조잡해 보이는 반지에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는데, 온갖 풍파를 겪은 느낌이었다.
반지는 볼품없었지만, 엽운의 손가락에 끼워지는 그 순간 엄청난 위압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위압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몸속으로 몰려와 머리 속까지 들어왔고, 그대로 영혼 깊은 곳에 닿았다.
거대한 정신의 힘이 엽운의 영혼을 찢어버릴 듯 밀려들었다.
격렬한 통증이 온 몸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위압이 영혼을 짓눌렀고, 그로 하여금 천년의 세월을 겪어 더욱 노련해진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속에는 강인함, 바램, 씁쓸함, 유감 등 온갖 감정이 담겨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금단 수사 한 명의 일생을 체험한 것 같았다.
뛰어난 재능으로 금단경에 도달하여 강자가 되었고, 견줄 이가 없을 만큼 강해져 천지를 종횡무진 누볐다.
한발 짝 더 나아가 원영경에 도달하길 바랬지만, 결국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씁쓸함과 아쉬움만이 남았다.
강력한 위압은 엽운의 영혼을 찢어버리는 것으로 모자라 뭉개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엽운의 영혼은 이미 여러 차례 단련 되었다.
금단의 잔혼에 맞서는 일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수반했지만, 끝까지 흔들리지 않으며 의연함을 유지했다.
하지만 금단 수사라면 역시나 금단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기에, 이 낡은 반지 속에 남겨진 금단 수사의 한 가닥 영혼도 엽운 정도의 수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엽운은 자신이 망망대해에 떠있는 한 척의 작은 배 같다고 느꼈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그는 언제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의지력이 더 할 나위 없이 강했기에 연기경에 도달한 수사들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에게 이 정도 고통은 이전에도 여러 번 겪어본 것 이었다.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이 점점 퍼져왔다.
엽운의 강한 의지조차 금방이라도 무너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금단수사의 남겨진 영혼은 여전히 바다와도 같이 끝이 없었고, 언제쯤 멈출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엽운은 이 영혼이 얼마나 강한지 쯤은 알 수 있었지만 이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질지는 알지 못했다.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며 계속해서 그의 영혼을 짓밟아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가슴에 오래도록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선마지심이 천천히 떠오르며 강력한 흡입력을 사방으로 전개하였고, 엽운의 마음속으로 밀려들어온 금단수사의 영혼은 물길을 찾은 홍수처럼 그 속으로 쏟아졌다.
순식간에 거대한 강 같던 영혼이 선마지심의 흑백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엽운은 온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고,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긴 숨을 내쉬며 선마지심이 흡수한 힘의 변화를 자세히 느꼈다.
그러자 순수한 힘이 선마지심으로 부터 뿜어져 나왔다.
이 힘은 이전에 느꼈던 순수한 영기와는 달리 곧 바로 흡수하고 연화시킬 수 없었다.
속에서 천천히 움직였고, 조금씩 움직일때 마다 점점 약해졌다.
약 반주향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순수한 힘은 깨끗이 사라져 조금도 남지 않았다.
엽운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원래는 어두웠던 공간이 밝게 느껴졌다.
눈을 들어 먼 곳을 보니 가장 구석에 있던 벽 위에 육안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미세한 흠집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그의 감각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변화를 맞이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주변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고, 영기가 솟구치는 것 마저 느껴졌다.
체내의 어떤 힘이 몸을 받쳐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온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극히 미세한 느낌이었지만, 분명히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엽운은 조용히 서 있었다.
별안간 눈에서 빛이 번쩍였고,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 신혼인가? 신혼은 촉기경에 달한 강자들만이 수련할 수 있는 것 일텐데?”
엽운은 갑작스레 소령과 촉기경에 대해 이야기하던 때를 떠올렸는데, 신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촉기경 중기에 도달했다는 증거라고 했었다.
이 느낌이 신혼의 힘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촉기경까지 한참 멀었지만, 이 느낌이 신혼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엽운은 알 수 없었다.
지금으로써는 애써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모든 주의력을 앞의 오래된 반지에 쏟았다.
검게 변한 반지는 긴 세월을 견딘 듯 했다.
반지에는 어떤 광택도 없고, 심지어 녹슨 것처럼 보일 정도로 볼품없었다.
만약 이 반지가 길가에 버려져 있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엽운은 이 반지 속에 분명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금단수사가 자신의 영혼을 남기면서 까지 보호하려 했겠는가?
엽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반지를 다시 빼, 왼손 검지에 끼웠다.
그리고는 천천히 영력을 주입했다.
순간 따끔한 고통을 느꼈는데, 손에서 피가 경맥을 타고 뿜어져 나와 오래된 반지에 닿았다.
다음 순간,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느낌이 몸속을 가득 메웠고,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뇌운화룡!
이 반지는 공격과 방어, 그리고 저물의 기능이 한 데 모인 것인데, 이 안에는 적어도 수 십장이 넘는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수납은 그저 기본적인 기능일 뿐이었고, 정말로 엽운을 놀라게 만든 것은 이 반지가 천둥의 소리를 흡수 한 뒤 진기를 이루어 뇌룡의 공격과 방어를 쓸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물론 뇌운화룡은 수위가 연기경에 달했다는 전재 하에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뇌운화룡계 라는 기술을 손에 넣긴 했지만 어느 정도의 위력을 지녔는지 시험해 볼 수는 없고, 그저 이것을 평범한 저물 반지로 쓰는 수밖에는 없었다.
저물반지는 진귀한 물건이라 할 수 없었다.
천검종의 외문 제자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단지 엽운처럼 갓 들어온 신입 제자들은 아직 임무를 많이 수행하지 못해 저물 반지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따라서 지금 이 뇌운화룡계를 들고 천검종을 활보해도 아무런 주의를 끌지 않을 것이다.
엽운과 뇌음화운의 연결된 신묘한 감각을 몸으로 익히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서 흥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뇌운화룡의 공격과 방어 효과는 아직 없었지만, 이 수십 장 너비의 공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는데, 그가 원래 사용하던 저물대의 공간은 지름이 3척을 넘지 못했다.
그리고 외문 제자들이 사용하는 저물 반지의 경우도 그것의 두 배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내문 제자들이 쓰는 저물 반지나 저물 팔찌도 이 정도로 거대한 공간을 가지지는 못했다.
저물대의 공간만으로도 뇌운화룡계는 진귀한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엽운은 흥분한 눈빛으로 마지막 벽의 탁자를 향했다.
옥 탁자 위에는 나무 상자 하나가 있었는데, 척 보기에는 별 볼일 없어 보였다.
뇌운화룡계의 등장으로 엽운은 이처럼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물건들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
이 석실 안에서 발견한 3개의 보물들은 모두 진귀한 물건들이었으니, 이 네 번 째 보물 역시 보기 드문 정품일 것이다.
앞으로 걸어가 옥탁자에 시선을 멈추었다.
너무도 평범한 나무 상자였다.
심지어 어떤 조각이나 무늬도 없이 그저 단순한 모습으로 옥탁자 위에 있었다.
그리고 탁자의 표면에는 빛나는 글씨도 없었고, 아무런 소개글도 쓰여 있지 않았다.
엽운은 손을 움직여 가볍게 나무 상자 위에 올렸다.
손이 닿은 곳에서는 차가움도 뜨거움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평범한 하나의 나무 상자일 뿐이었다.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나무 상자 안에는 어떤 보물도 없었고, 한 줄기 빛 따위도 없었다.
그저 열쇠가 하나 놓여 져 있었는데, 녹이 잔뜩 슬어있는 열쇠였다.
엽운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로써는 이 녹슨 열쇠가 도대체 어째서 이 안에 들어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심지어 뇌운화룡계 같이 엄청난 보물들과 같은 방에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녹슨 열쇠가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분명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알았다.
엽운은 상자와 함께 열쇠를 뇌운화룡계 속에 집어넣었고, 좀 전에 얻은 혈영고와 청목응기단, 그리고 혈옥선정 등의 보물까지 같이 넣어두었다.
텅빈 저물대만이 그의 허리띠에 남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옥탁 위에는 아무런 보물도 남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봐도 숨어있는 장소 같은 건 없는 듯 했다.
발걸음을 옮겨 중앙 계단으로 올라가려다 별안간 멈춰 주위에 놓여진 이름을 알 수 없는 옥탁으로 시선이 향했다.
곧 웃기 시작해 앞으로 다가가 네 개의 옥탁을 들어 올려 뇌운화룡계의 수십 장 너비의 공간 속으로 던져 넣었다.
“이 탁자들도 분명 값이 꽤 나가겠지. 뇌운화룡계가 아니었다면 이 중 하나도 저물대에 못 넣었을 거야.”
손사레를 치며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가운데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중앙의 계단은 원형으로 빙빙 돌아서 올라가게끔 되어있었다.
엽운은 빙긋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순간, 그는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힘이 자신을 가볍게 밀어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을 느꼈다.
“또 공간금제로군!”
눈살을 찌푸렸다.
이 부드러운 힘은 이전에도 느껴본 것인데, 강자에겐 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약자에겐 약한 위력을 발휘한다.
화운대전은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간진법에 통달한 금단대수사가 보물을 숨기기 위하여 만든 신전인데, 어찌 가볍게 한 층 한 층 올라갈 수 있도록 해두었겠는가?
계단의 입구에 서서 미간을 찡그렸다.
이 공간진법은 이전에도 마주한 적 있고, 소령의 도움을 받아 파훼하거나, 나문성처럼 강한 힘으로 부숴야 했다.
지금 그는 혼자이며 공간 진법에 대한 이해도 깊지 않고, 또 힘 역시 진법을 파괴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계단의 입구 쪽 공간을 살며시 눌렀다.
진법의 힘은 부드러운 목화처럼 손에 닿았다.
하지만 계속 힘을 주어 들어가려고 하면 강력한 반발력이 막아 세웠다.
갑자기 사방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놀랍게도 네 개의 석벽이 그가 있는 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잠시 후면 벽들이 한데 모여 그를 압사 시킬 것 같았다.
“이럴수가..?”
엽운은 크게 놀랐다.
만약 이 네 개의 벽이 덮쳐온다면 자신은 산산조각이 나는 게 아닌가?
바로 그때, 계단 입구의 공간에서 공기가 물결처럼 일렁였고, 이어서 성도가 하나 나타났는데, 약 수십 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항성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