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7 화 반기를 들다
무영봉의 봉주, 소호의 딸이라니!
은천행뿐만 아니라 엽운 마저 놀라 심장이 벌떡 뛰었다.
눈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령의 신분이 분명 범상치는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어느 장로의 딸 쯤 되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봉우리 하나를 관장하는 봉주의 딸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천검종의 관하에는 네 개의 대봉이 있다.
각 봉우리의 봉주들은 모두 차기 천검종 종주의 강력한 경쟁자라고 할 수 있다.
천검종은 검을 이름으로 삼고, 무예로 파벌을 세우는 곳이다.
종주가 되려면 도달한 경지의 높고 낮음은 분명 중요한 심사 기준이 된다.
게다가 각 봉우리의 봉주들은 훗날 금단이 될 희망이 있는 자들로, 금단이 되기만 한다면 분명 차기 종주가 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소...소......”
소리를 내는 은천행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금방이라도 울 것같은 모양새였다.
소령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문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 사형, 아직도 우리에게 손을 댈 생각입니까?”
나문성의 얼굴에도 똑같이 놀라움이 서려있었다.
그는 분명 소령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녀가 무영봉주의 딸이었는지 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호의 딸내미를 죽인다고? 나문성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당장 고개를 숙이고 순순이 양보한다 해도 그 전에 내뱉은 모진 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들은 이미 입 밖으로 나왔다.
심지어 하마터면 소령을 죽일 뻔했다.
두 사람간의 원한이 풀릴 수 있을까?
훗날 서로를 마주하게 되면 웃으며 털어낼 수 있을까?
나문성은 소령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만약 자신이 소령이었다면 이런 원한은 반드시 갚아줄 것임을 알았다.
상대를 죽이지는 않더라도 수행을 더 이어나갈 수 없게 만들 것이고, 심지어는 퇴보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고로 나문성은 생각했다.
자신이 순순히 복종하더라도 소령이 이곳을 나가 그를 응징하려 한다면 수도 없이 많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가 구양문천의 십대제자중 하나라곤 해도 무영봉주 소호의 딸과 어찌 비교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구양문천은 소호와 친분이 두텁고 사이가 아주 좋으니, 훗날 자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엄격한 처벌을 내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은 셈 치고 아예 살수를 놓아버릴까?
여기까지 생각하다보니, 나문성의 찌푸린 눈살이 펴지며 가득하던 망설임이 사라지고 살기가 번뜩였다.
“나 사형, 아직도 나를 죽일 생각입니까?”
소령은 나문성이 마음에 품은 살기를 눈치 채지 못하고 몰아붙이며 비아냥거렸다.
나문성은 숨을 깊이 마시고 한 걸음을 내딛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령아, 때로는 네 아버지의 이름도 소용이 없을 때가 있다.”
어안이 벙벙해진 소령이 질문을 하려는 찰나 별안간 그녀의 팔을 붙잡고 세차게 뒤로 물러났다.
이어서 소령은 그녀가 있던 곳에 한 줄기 빛이 떨어져 모래에 수척 깊이정도 되는 큰 구덩이를 만든 것을 보았다.
“반응이 제법 빠르구나, 네놈은 누구냐?”
나문성은 손에서 빛을 번뜩이며 엽운을 바라보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까지 소령은 나문성이 신분을 고려하지 않고 기습해 없애버리려 할 줄은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에게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령이 모르고 있었다 해서 엽운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엽운은 처음부터 나문성을 경계했다.
소령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긴 했지만 잠깐의 놀라움이었을 뿐 그 이후로 줄곧 모든 주의력을 나문성에게 쏟았다.
소령의 신분을 알게 된 나문성은, 만약 거기서 물러났어도 그걸로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뱉은 위협과 협박의 말들이 소령을 통해 여기저기 퍼져 훗날 천검종에서 설자리가 없게 될까 두려웠기에 살의를 품고 소령을 멸하려 했던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나문성이 한 걸음 내딛자 엽운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꼭 소령을 죽이려는 듯 했기에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소령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문성은 신분이나 지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곧 바로 기습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나 사형, 절검봉의 십대 제자중 하나이신 분께서 이렇게 기습을 해오시다니,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엽운은 차가운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소령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문성이 이런 일을 벌일 줄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자신이 무영봉주 소호의 딸임을 알게 되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기습해왔다.
“나문성, 이 일은 구양 아저씨께 말씀 드릴거야. 어떤 결말이 될지 두고 봐.”
“나 사형...”
은천행이 나문성의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불러왔다.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도통 알지 못했다.
나문성은 곁눈질로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설마 너희들은 아직도 돌이킬 방법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느냐? 저 계집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내 말 잘 들어라. 지금 여기서 저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훗날 죽게 되는 것은 우리이니 이미 화해할 방법 따윈 없다. 죽기 전에는 절대 멈출 수 없다.”
“두 사형께서는 이 일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전부 나문성이 자초한 일입니다. 청옥신부가 망가졌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보물을 빼앗으려 한 것이니 그 심보가 아주 불순하지요. 두 분은 그저 목격자이실 뿐입니다. 우리가 이곳을 나간 뒤 사실대로 보고하면 징계는 커녕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엽운은 무표정으로 은천행과 나머지 한 명의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은천행과 다른 내문제자의 얼굴에 순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히 소령을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문성의 실력과 성격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만약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은천행, 죽고 싶은거라면 내 친히 그 뜻을 이루어주마.”
머뭇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이미 마음을 먹은 나문성은 차가운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은천행과 두 사람은 덜덜 떨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놈을 도와 나를 죽이면 아무 탈 없이 끝날 줄 아는 게냐?”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엽운은 똑같이 차갑게 웃기 시작했다:
“소령같은 신분으로는 말입니다, 소문 한 번 퍼뜨리면 그 자는 죽어서도 묻힐 곳이 없게 됩니다. 두 분 역시 그에게는 큰 골칫거리이니 저런 심성을 가진 자라면 기회가 있을 때 바로 두 사람을 없애려 할 겁니다.”
“저 자는 두 사형들 역시 그냥 보내주지 않을거에요.”
소령 역시 매우 총명하게도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네 사람이 힘을 합친다면 설마 저 자의 상대가 못되겠습니까. 저 자를 죽일 수 있다면, 이곳을 나간 뒤 큰 이득을 보시게 될 것을 장담합니다. 심지어는 제가 직접 장로 한분을 모셔다 두 분을 직속 제자로 받아 달라 하겠습니다.”
은천행과 다른 한 명의 제자는 눈을 마주쳤다.
서로의 눈에서 설레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나문성은 냉소를 지었다.
별안간 번개의 검광이 그의 손에서 튀어나와 빠직 하는 소리를 내더니, 엽운이 아닌 은천행과 다른 제자를 향해 쏘아졌다.
“나 사형, 당신!”
은천행과 나머지 제자는 깜짝 놀라 소리치며 재빨리 물러나 검을 피할 수 있었다.
“보셨죠, 아직도 선택지가 남아있는 것 같아요?”
이 모습을 본 엽운은 별안간 끙 소리를 내더니 손에서 검은 빛을 번쩍이며 흑요검을 꺼내들었다.
“나 사형, 당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은천행은 음산하고 차가운 살의를 내뿜으며 냉소를 지은 채 아우말도 하지않는 나문성을 보곤 더 이상 돌아갈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듯, 이를 꽉 물고 손에서 빛을 번쩍이자 손에 청녹색의 영검 한 자루가 나타났다.
바로 그때 소령의 귓가에 별안간 엽운의 전음이 들려왔다.
“때를 보다가 도망가죠!”
“도망을 가자고?”
어안이 벙벙해진 소령은 약간의 의심이 들었다.
“나문성은 연기경 7단계에 달한 고수고, 우리 네 사람이 손을 잡았는데도 전혀 당황한 표정이 아니야.... 우린 저 자의 상대가 될 수 없어.”
엽운은 침착한 태도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은천행과 나머지가 나문성을 잡아두는 동안, 우리는 기회를 봐서 멀리 달아나자구.”
소령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난 안가. 그렇게 되면 은천행 사형과 두 분은 분명 죽게 될거야.”
“좀 전의 대화를 잊지 마. 은천행과 저 사람도 분명 좋은 자들은 아니야. 만약 당신의 신분이 특별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우릴 해치웠을거야!.”
소령의 말을 들은 엽운은 문득 냉소를 지어보였다.
소령의 눈에 망설임이 스쳤다.
높은 지위에서 유복하게 자랐지만 선량한 마음씨를 가졌다.
은천행과 다른 제자를 끌어들인 이상 함께 나문성에 맞서 그를 막고 다 같이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아직도 망설이는 거야? 설마 우리의 목숨이 저 둘보다 소중하지 않다는거야?”
엽운은 또 다시 낮은 목소리로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여기 남을 생각이라면, 나더러 저 자들과 함께 죽으라는 거야.”
“엽운!”
이 말은 소령의 마음속엔 왜인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엽운의 말은 분명 그녀가 떠나지 않는다면 자신도 혼자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 남아 그녀와 함께 죽겠다는 뜻임이 분명했다.
“좋아. 네 말대로 할게.”
엽운의 냉정한 옆모습을 한 번 보고. 다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은천행과 두 사람을 한 번 보았다.
이 자들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이를 악 물고 마음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