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선공-92화 (92/227)

제 92 장 선마의 마음

“엽운, 무슨 일이야?”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천천히 눈을 떴다.

엽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몸에 변화가 생겼음을 느꼈다.

다시 흑백의 옷을 입은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용모, 그리고 그 깨끗하기 그지없는 두 눈을 봤다.

흑백이 선명히 나누어져 조금의 잡티 하나 없었다.

엽운은 매번 이 흐리멍텅한 환각에 들어올 때 마다 흑백의 빛의 통제가 더 강해짐을 알았다.

이번에는 전에 본 적 없는 흑백의 두 눈을 보았는데, 이것이 흑백의 빛의 지배가 좀 더 강해졌다는 뜻 아닐까?

영력을 움직이며 정신을 가슴의 혈에 집중시켰다.

온 정신을 한데 집중시켜 천천히 이끌었다.

아니나 다를까, 흑백의 빛이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나타났다.

이 빛의 덩어리는 처음엔 주먹만 한 크기였는데 수위가 올라감에 따라 조금씩 작아지고 응집되어 실체에 가까워졌다.

순간 흑백의 빛은 계란만한 크기로 작아져 있어 실체가 존재하는 물건처럼 보였다.

흑백의 빛이 천천히 움직였다.

엽운은 은은한 빛 너머로 표면에 나타난 두 글자를 본 듯 했다.

두 글자는 거의 비슷해 보였다.

엽운의 마음이 뒤흔들렸다.

놀라운 발견을 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혹 이 두 글자가 흑백의 빛의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두 글자를 노려봤다.

글자는 선(仙),과 마(魔) 였다.

두 글자를 선명하게 보게 된 순간, 거대한 힘이 흑백의 빛으로부터 터져나와 엽운의 머릿속에 들어와 영혼 깊은 곳까지 쳐들어왔다.

엽운은 영혼이 지극히 맑아졌다고만 생각했다.

마치 이 세상을 벗어나 높이 올라 만장 높이에서 중생들을 내려다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말할 필요도 없이 보잘 것 없었다.

화운비장의 보물, 공간진법, 다른이와의 결투, 소령과의 미묘한 감정등, 이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엽운의 마음에는 도(道)라는 한 글자만이 떠올랐다.

도. 수행의 정점, 천고의 변화, 모든 것은 결국 한 곳을 향한다.

진정한 왕이 되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과 연도 버려야 한다.

온 마음을 수행에 쏟아야만 진정한 천도를 깨우치게 되어 만세의 지존을 이루며 천고의 불멸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그가 찾아 헤메던 목표이자 추구해야할 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별안간 또 다른 감정이 샘솟았다.

이 번잡한 세상 사나이로 태어나 하늘을 받치고 서,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고, 정과 의리를 모두 챙겨야 하는 것이다.

세상 밖에 나와 수행하는 것이 도이고, 세상 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것도 도이다.

이처럼 간단한 것이 진정 도이며, 복잡한 것은 도라고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도이며, 다른 길이라 할지언정 같은 곳을 향한다.

두 가지 극명히 갈린 이념이 머릿속에 자리하여 영혼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엇갈려 도무지 교감할 수 없었다.

영혼의 전율을 느꼈다.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만약 이 두가지 강대한 이념을 조합해내지 못하면, 몸과 영혼이 전부 터져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흑백 빛의 힘은 엽운이 당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발버둥쳐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두개의 완벽히 다른 수행이념이 영혼 깊은 곳에서 맴돌며 대치했다.

조금도 합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너의 길이지 나의 길이 아니다. 나 엽운은, 나만의 도를 찾을 것이다.”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영혼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터질 듯한 고통을 꾹 참으며 버텼다.

그리곤 정신이 천망이 되어 흑백의 빛을 뒤덮었다.

“탁!”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영혼 깊은 곳에서 두개의 이념이 한대 부딪혀 순식간에 연기가 되었다.

흑백의 빛은 순순히 심신에 묶여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선마지심!

문득 머릿속에 난데없이 이 네 글자가 떠올랐다.

선마의 마음이라.

흰 것은 선이고 검은 것은 마이다!

별안간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탁 트였다.

좀 전의 흑백의 빛이 가져다준 의혹은 이 순간 모두 풀려 조금도 남지 않았다.

이 흑백의 빛이 바로 선마지심이었다.

얼마나 패기 넘치는 이름인가!

수행의 길에서 온갖 역경을 다 겪고 천신만고 끝에 겨우 깃털에 불과하던 이가 신선이 되어 천계에 올랐다.

이것은 그저 고서에 적힌 멀고도 먼 기록일 뿐이었다.

엽운의 신분으로는 금단경보다도 높은 원영경이 존재한다는 것 마저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원영경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몰라도 결코 그것이 수행의 끝이 아님을 알았다.

단언컨데 절대 그것이 깃털이 신선이 되는 마지막 계단이 아닐 것이다.

원영경을 넘어 얼마나 더 올라가야 천계의 문턱에 닿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계, 엽운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 세상에는 인간계와 요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두 세계가 수만 년동안 전쟁을 치른 것은 더 좋은 수련 자원을 얻기 위해서라는데, 두 세계의 최종 목적은 수행의 극에 달해 선계에 오르는 것이다.

헌데 조금 전 천계, 인간계와 요계를 떠올렸고 다시 선마지심을 보니, 무의식 중 마계란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별안간 화면이 하나 떠올랐다.

흑백의 옷을 입은 청년, 수려한 풍채와 늠름한 정기를 지녔으나, 그의 미간에는 검은 연꽃 한 송이가 보일 듯 말듯 기이한 기운을 뿜어냈다.

“선마지심! 설마 이 흑백의 옷을 입은 남녀가 선계나 마계에서 온 자들인가? 그리고 금색 갑주를 입은 신병은 선계에서 온 군사들인가?”

갑작스레 이런 추측이 떠올랐다.

등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선계의 신병, 마계의 신장?

“엽운, 무슨일이야?”

맑은 목소리가 또 다시 다급하게 귓가에 울렸다

황급히 눈을 뜬 엽운의 이마엔 땀방울이 가득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아냐!”

고개를 젓고는 걱정이 가득한 예쁜 얼굴을 보며 물었다.

“내가 뭘 어쨌길래?”

소령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갑자기 공중에서 떨어지더니, 온몸에서 경기를 일으키며 땀으로 흠뻑 젖었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엽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얕게 읊조렸다.

깨진 공간은 이미 완전히 복구되어 깨졌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하늘에 있던 해는 자취를 감추어 빛을 뿜어대는 태양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늘의 색도 어둡게 변했다.

“아까 그 태양은?”

엽운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소령은 어리둥절했다.

방금 엽운이 떨어질때 초조한 마음에 태양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태양이 사라진 건 별 일 아니다.

중요한건 열염폭운환 역시 사라졌다는 것이다.

굉장한 품질의 중품영기였는데, 손에 넣자마자 사라져 버리다니, 큰일이다.

“가자, 어서 가서 찾아보자!”

엽운이 하늘을 바라보더니 앞을 향해 나갔다.

열염폭운환은 이미 엽운에게 연화되어 영력의 기록이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천 장 이상 떨어지지 않은 한 감지할 수 있었다.

천장 이상 멀어졌을리는 없어 그저 주의깊게 살펴보면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을 향해 움직이며 끊임없이 열염폭운환의 위치가 느끼려 애썼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까닭 없이 사라져 버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엽운은 이 공간이 얼마나 끝도 없이 광활한지 믿을 수 없었다.

저 멀리서 일렁이던 황사는 알고 보니 공간진법의 눈속임이었다.

이곳이 대묘의 2층이 맞다면 그래봤자 십수 리 정도의 공간일 것이니, 잘 찾아보기만 한다면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공간진법은 아직 완전히 깨지지 않았어. 다시 살진을 불러오지 않게 조심해야 해.”

소령이 바짝 따라붙으며 당부했다.

“괜찮아.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들어. 이 공간진법은 나한테는 아무 소용없으니 내 길을 막을 수 없을거야.”

일렁이는 황사를 보던 엽운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진법의 수정벽이 깨지던 순간부터 이미 자신을 상처 입힐 방법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엽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 해보려 하지도 않았다.

당장 가장 중요한 것은 열염폭운환과 나머지 하나의 태양을 찾는 일이었다.

나머지 하나의 태양 역시 보물일 것이라 믿었다.

만약 얻을 수 있다면 화운비장에 들어온 이래 최대의 수확이 될 터였다.

물론 지금 당장 떠난다 해도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소령은 어리둥절했다.

이내 그녀의 눈망울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확실히 방금 전의 그 막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수정 벽의 파편이 엽운의 몸을 뚫고 지나갔고,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소령은 공간진법에 대해 제법 이해하고 있는 편이기에 한 조각 한 조각의 파편이 엄청난 힘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연체경의 수준이 당해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연기경 제자들 역시 막아내기 몹시 어려울 만한 것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된거지?

마음속엔 의문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의문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엽운을 바짝 쫓아갔다.

반드시 열염폭운환과 나머지 하나의 태양을 빨리 찾아야 했다.

진법을 깬 뒤 이곳을 나갈 수 있는 해답은 분명 이곳에 있다고 믿었다.

엽운은 소령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으론 열염폭운환의 위치를 감지하려 부단히 애썼다.

소령은 앞쪽의 황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바짝 날아오고 있으며 공간진법의 특성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음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보아하니 공간진법은 정말로 깨진 듯 했다.

적어도 두 사람에겐 이미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소령은 자신도 모르게 엽운을 바라봤다.

소령은 함께 있는 동안 어느새 자신이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엽운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 했고, 점점 신비로워지고 있었다.

“저 앞에 있다!”

바로 그때 엽운이 별안간 소리쳤다.

그리곤 소령의 손을 잡아 앞의 수척 높이의 모래 언덕 모퉁이에서 한 번 꺾더니 발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저 앞 백장이 좀 안되는 거리에 모래 위쪽엔 활활 타오르는 화염 한 덩어리가 열기와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

화염의 옆엔 짙은 푸른색의 반짝이는 얼음 한 덩어리가 조용히 허공에 뜬 채 뼈에 사무치는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얼음과 불이 뒤엉켜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