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선공-91화 (91/227)

제 91 화 눈앞의 흑련

“틀림없어. 이건 분명 굉장한 품질의 중품 영기야!”

“엽운! 잘 보관해 둬야해!”

소령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후끈한 작열통이 순식간에 엽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붉은색의 고리는 몹시 무거웠다.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단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표면에는 한 층의 붉은 빛이 끊임없이 요동치며 마치 기름처럼 흐르고 있었다.

“내가?”

순간 어리둥절했다.

중품영기는 어떤 개념인가?

일반적으로 하품영기 백개를 가져와도 중품영기 한개와 비교할 수 없는데, 하물며 좋은 품질의 중품영기라면 얼마나 진귀하겠는가?

보라색 모포를 입은 외문 제자들이 중품영기를 갖고 싶어 하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천신만고를 겪어도, 심지어는 내문제자라 할 지언정 모두가 중품영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 이 중품영기의 귀중함을 알 수 있었다.

소령에게도 역시나 이런 중품영기는 얻기 힘든 물건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놀랄 리 없다.

“왜?”

소령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에 어리둥절해 하느냐는 눈치였다.

“좋아!”

엽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소령을 한 번 바라보곤 말을 아끼며 붉은 고리를 저물대에 집에 넣은 후, 다른 하나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보던 엽운은 이내 고개를 떨구고 한 쪽에 두검음을 봤다.

두검음 역시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느끼고는 엽운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냐, 나와 힘을 합쳐 저 태양을 베어버리고 싶은 게냐? 꿈 깨라.”

소령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두검음, 저 태양 역시 중품영기일거야. 만약 너와 엽운이 힘을 합친다면, 우린.....”

“난 오직 검에만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저런 것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러나 끝나기도 전에 두검음은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데, 네놈들을 위한 예물이라도 맞추어 달란 말이냐?”

말을 마친 그의 시선은 엽운에게 꽂혔다.

“훗날 언젠가 너는 내 검 아래에 묻히게 될 것이다.”

옥처럼 새하얀 장검이 멀리서 그를 가리켰다.

낭랑한 목소리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래?”

엽운은 표정하나 안변하고 가볍게 말했다.

두검음은 얼굴이 굳어지더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은 내가 너의 상대가 못되지만, 앞으로 수련에 정진하여 네놈과 다시 한 번 붙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 손에 쥔 하얀 검을 번쩍였다.

황사의 먼 저편을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에 엽운과 소령의 앞에서 사라졌다.

소령이 그림자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곤 발을 구르며 말했다.

“저 녀석 진짜 너무 얄밉다니까!”

“얄밉다구? 난 오히려 그렇지 않은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던 그걸 죄다 입 밖으로 꺼내잖아, 소리치고 죽이려 들기는 해도 우리 천검종 사람들 보다는 훨씬 나은데.”

“자기 종파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딨냐?”

소령은 화가 난듯 엽운을 노려보다가 이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좌우지간 그 녀석과 힘을 합쳐 태양을 격추 시켰으니, 이 진안은 깼다고 볼 수 있겠네.”

엽운은 크게 놀랐다.

“벌써 깨졌다구?”

엽운의 팔을 잡아끌며 또 빙긋 웃었다.

“이 바보야, 눈치가 너무 느린 거 아냐?”

그제서야 등 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고, 상쾌하고 편안한 기운이 몸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 바람은 공간진법의 바깥쪽에서 불어오는 건가?”

그는 이내 크게 기뻐했다.

“공간진법이 이미 깨졌다는 건가?”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엽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우리 이제 나갈 수 있는 거지? 나가는 방법을 알아?”

“서두르지마, 공간진법은 일단 틈이 생기면 점점 커지니까. 때가 되면 알아서 열릴거야. 일단 우리는 이 황사속에 보물이 더 있는 지나 찾아 보자구, 어쨌든 여기는 2층이니까 말이야.”

백치같은 모습의 엽운을 보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보물?”

엽운의 눈에 빛이 번쩍였다.

그렇다.

고생스럽게 화운비장에 들어와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이 모든 게 진귀한 보물들과 수련에 쓰일 자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오른손을 한 번 뒤집자, 태양에서 나온 고리가 순식간에 다시 나타났다.

뜨거운 온기 속에서 이따금씩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좀 전에 이 고리를 얻었을 땐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저물대에 넣었고, 이제서야 꺼내어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붉은 고리는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은은하게 옅은 빛이 느껴지는 것이 마치 한 층의 화염이 기름처럼 쉴새없이 흐르며 요동치고 있었다.

엽운은 실험삼아 그 속에 영력을 주입시켰다.

이 영기가 주인이 없는 보물이라면 영력을 받아들여 연화시키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주인이 있는 보물이라 해도 상관없다.

상대의 실력을 넘어서거나 그와 비슷하다면, 영기의 낙인을 지워버리고 자신이 사용하면 된다.

엽운의 영력이 천천히 주입됐다.

어떤 저항도 없었다.

눈 깜짝할 새에 고리가 선명해졌다.

영력이 주입 되 낙인이 남았으니 정련하여 자신이 쓰면 된다.

열염폭운환!

패기가 넘치는 이름이 별안간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불꽃같은 고리에는 광포한 화염계의 힘이 거세게 흘렀다.

엽운은 이 힘이 폭발한다면 숲 하나를 금새 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위력이면 분명 하품 영기를 뛰어넘는다.

도대체 이것이 중품영기 중 어느 정도의 품질인지 궁금했다.

“어때, 끝내주는 중품영기라고 말했지?”

소령은 엽운이 열염폭운환을 거두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엽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보물은 열염폭운환이야. 영력을 주입하여 이 안에 잠재된 진법을 촉진시키면 여기에 깃든 화염계의 힘을 순식간에 폭발시켜 온통 불바다로 만들 수 있어.”

소령의 예쁜 얼굴에 부러운 기색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염폭운환은 잘 넣어둬. 우리가 나갈때까지 가능하면 꺼내들지 마. 수위가 연기경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는 보물의 진정한 힘을 다룰 수 없고, 오히려 야욕을 불러 귀찮은 일이 생길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야.”

엽운은 눈앞에 앳된 소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 아가씨가 정말, 윗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서 그런가, 이런 도리를 다 알고 말이야. 내가 지금껏 너무 얕봤네.”

소령은 힐끗 쳐다보더니 “흥흥” 콧방귀를 두어번 뀌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아니면 내가 어떻게 니 사저라 불리겠니? 내가 아는 건 나중에 너도 차차 깨닫게 될 거라구.”

엽운이 큰 소리로 웃었다.

손에 쥔 열염폭운환을 보고 있자니 별안간 마음이 움직였다.

몸을 날려 번개처럼 뻗어나가 하늘 위의 태양을 향해 돌진했다.

“엽운 너 뭐하는 거야?”

소령의 목소리에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고, 조금 긴장한 듯 했다.

지금껏 보아온 바로는 지금 공간진법에는 이미 균열이 생겼으니, 섣불리 나서기보단 가만히 기다리면 될 터였다.

만약 살진을 촉발시킨다면 어찌할 방법이 없게 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엽운은 손에 쥔 열염폭운환을 별안간 내던졌다.

그 다음 순간 불꽃 하나가 쏘아져 나갔다.

마치 불의 용이 하늘을 향해 치솟듯 태양을 향해 돌진했다.

불꽃의 용이 지나간 자리엔 화염의 길이 생겼다.

불빛이 반짝거리며 뜨거운 열을 내뿜었다.

마치 공간을 전부 불태워 없앨 듯 했다.

소령의 눈에 믿을 수 없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감히 믿지 못했다.

열염폭운환에 이렇게 방대한 화염의 힘이 숨겨져 있었다니. 이 화염의 힘이 내포하고 있는 위력은 연기경의 중기에 머무른 제자들조차 쉽게 당해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중품영기가 어떻게 이렇게 강력할 수 있는 거지? 보통의 중품영기는 그 안에 내포된 능력을 순식간에 내보낼 수 없고 극소수의 중품영기만이 가능한데, 이 열염폭운환은 과연 절품이구나.”

소령은 비록 열 네다섯밖에 안된 나이였지만 식견이라면 천촉봉의 제자들보다도 넓었다.

불꽃의 용은 엽운이 꺼낸 보물에서 뿜어져 나와 하늘 위의 태양을 향해 곧게 뻗어 나갔다.

허공은 고열을 쬐어 순식간에 일렁이기 시작했다.

곧 불꽃의 용이 지나간 허공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차츰 퍼져나가 마치 거미줄 같이 빽빽해졌다.

언제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엽운, 어서 돌아와.”

소령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공간진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허공에서 생긴 변화로 부터 엄청난 살기를 느꼈다.

당연하게도 이 거대한 살의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 공간진법의 살진을 촉발한 것이었다.

공간진법은 금단대수사가 짠 것으로, 그 중 살진은 위력이 아무리 약해도 엽운과 소령처럼 연기경에도 도달하지 못한 수위로는 당해낼 수 없었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공격이 시작되면 두 사람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엽운은 허공에 떠 있었다.

연기경에 도달하지도 못한 수위로 어찌 공중에 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소령의 말을 무시했다.

“탁!”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미줄처럼 허공의 수정 벽이 이내 부서져 열렸다.

무수히 많은 투명한 파편들이 거대한 충격을 받은 듯 순식간에 폭발했다.

파편 하나하나에 공간진법의 힘이 담겨있었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공간진법의 살진이 열린 것이다.

이 무수히 많은 공간진법의 파편이 바로 최강의 공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 파편 한 조각마저도 당해낼 순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에 만연하던 공포가 의문이 되고 이내 놀라움이 되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채 날아다니는 파편들 중 한 조각도 떨어지지 않았다.

더욱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엽운이 많은 파편들 가운데에 조용히 서 있다는 것이다.

파편들은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심지어 꽤 많은 파편이 그를 향해 날아왔는데, 예상처럼 피가 뿜어져 나온다거나 하지 않고 그저 파편들이 몸을 향해 날아와 뚫고 지나갈 뿐 전혀 박히거나 하지 않았다.

엽운은 그저 조용히 허공에 서 있었다.

태양 빛이 파편에 반사되어 얼굴에 내려앉았다.

성결한 모습이었다.

파편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불꽃의 용은 사라지지 않고 태양을 향해 나아갔다.

천리는 떨어져 있는 듯 한 태양이 순간 아득히 먼 공간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하늘에 가만히 멈추어 불꽃의 용이 날아와 용솟음치게 두었다.

“쾅!”

하늘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불꽃의 용이 태양에 적중했다.

불꽃이 터져 하늘을 가득 메웠고 빛이 백곱절은 커지더니 소령의 눈 앞 까지 붉게 물들여 무엇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허공에 서있던 엽운은 불편한 기색도 없이 그저 조용히 타오르는 세계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 눈에 놀라움이 서렸다.

이 끝도 없는 화염의 세계 속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붉은 세상에서 그는 금색의 갑주를 입은 신병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썰물이 밀려오듯 방대한 양의 물이 저 멀리서부터 밀려왔다.

처음에는 흡사 금색의 얇은 선 같던 것이 굵어지더니 금색의 파도로 변해 굽이쳐 들어왔다.

금색 빛이 지나간 자리는 불타는 세계 속 높은 산과 하천, 삼림과 평원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 가루가 되어, 금색 갑주의 신병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토록 흉맹한 금갑의 신병이 쫓아오는 와중에 익숙한 모습을 한 두 사람이 보였다.

흑백의 옷을 입은 젊은 남녀가 손을 잡고 있는데, 마치 천천히 산책을 하는 듯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좀 전까지 엽운은 두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이 젊은 남녀의 용모를 보고 기질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얼굴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남자는 늠름한 풍채에 위엄이 넘치는 기풍이었다.

여자는 달마저 숨고 꽃도 부끄러워 할 정도로 아름다워 속세를 벗어난 사람같이 보였다.

무엇보다 남자의 눈엔 검은 연꽃 한 송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게 선명히 보였다.

이때, 이 남녀는 엽운의 시선을 눈치 챈 듯 이 쪽을 보며 걸어왔다.

엽운은 흑백의 빛이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지만 아직 가슴에 파고 들지는 않았음을 느꼈다.

예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자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모든 환각이 깨끗이 사라져 조금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흑백의 빛이 가슴 속에 파고 들려는 찰나에 눈을 봤다.

흑백이 명백히 나누어진 눈이었다.

엽운은 이 두 눈에서 느껴지는 영력의 움직임을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눈을 본 것 같았다.

조금의 티도 없고 어떤 감정도 없는 것이 깊은 못 같기도 하고 별 같기도 했다.

깨끗함! 순결함!

머릿속에는 이 두 단어만이 남았다.

세상 천지에 어찌 이런 눈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저런 눈을 가질 수 있는가?

엽운은 별안간 더할데 없이 쇠약해짐을 느꼈다.

순간 모든 힘이 다 빠져나간 듯 두 다리에 힘이 빠져 공중에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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