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 화 제 2 층
몸이 움직였다.
“엽운!”
소령이 놀라 소리쳤다.
무의식중에 두검음을 죽이려는 하는 줄 알았다.
두검음이 “끙” 하며 작은 소리를 내더니 눈을 감은 채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약한 바람만이 그의 몸을 스쳤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엽운은 그저 앞에 꽂혀있던 옥처럼 하얀 장검을 뽑아 손에 쥐고 있었다.
눈에는 순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검은 옥처럼 새하얀데, 도대체 어느 정도 등급의 재료로 만들었는지 알 수도 없고, 막 손에 쥐어보니 검신에 고르지 못한 물결무늬가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전혀 다듬은 흔적이라곤 없었으니 아무래도 자연스레 생긴 것 인듯 했다.
이 신비한 대묘에서 발견된 영검의 품질은 흑요검과는 비교도 안됐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실망한 것은 손에 쥐었을 때 손바닥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검의 영력이 체내의 영력과 충돌하는데, 만약 이 검을 쓰게 된다면 귀찮은 일이 하나 더 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엽운, 왜 그래? 그 검은 맞지 않는 거야?”
소령은 무언가를 알아챈 듯 궁금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하. 보아하니 검이 이미 나를 주인으로 여기는 모양이구나. 다른 이는 검의 허락을 결코 받지 못하겠지!”
대답하기도 전에 두검음이 별안간 미친 듯이 웃었다.
“이 몸이 운명으로 정해진 검의 주인인 듯 하구나. 일단은 네가 이겼지만, 검은 아직도 나의 검에 대한 마음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엽운은 실망하여 욕할 마음마저 사라졌다.
검을 집어 던지곤 몸을 돌려 제단위에 나타난 청색 돌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당연하게도 이 대묘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더 검을 쓸 자격이 있네마네 논쟁하는 일 자체가 머리에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다.
“정말 이상하네, 전송통로 같이 보이는데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소령 역시 두검음은 신경도 쓰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며 옛스러운 청색 돌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때 고풍스럽게 솟은 청색 돌문의 중앙에서 검은 빛이 아른거렸다.
어딘가 깊은 공간의 문처럼 다른 장소로 통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전송법진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검은 빛에서 놀랍게도 끊임없이 썩은 나무의 냄새가 풍겨온다는 점이었다.
“이게 뭐든, 서둘러 시도 해보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이때 두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옥처럼 하얀 장검을 주워 들고 엽운과 소령에게서 멀지 않은 곳으로 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단이 이 문을 열어두기 위해 마치 촛불처럼 영력을 끝도 없이 소모하는 것 같지 않은가?”
순간 소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분명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이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두검음의 지적 덕분에 제단에서 영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긴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숨어들어왔을 때만 해도 개구장이 소녀였을 뿐, 화운비장의 1층이 이 정도까지 위험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과연 아버지가 이곳에 그녀를 보내지 않으려 할만 했다.
만약 이런 줄 알았으면 죽어도 숨어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엽운은 문이 제단의 영력을 아주 빠른 속도로 소모시키고 있는걸 분명히 느꼈다.
제단의 영력이 완전히 소실되면, 제단 역시 전의 푸른 산처럼 먼지가 되어 사라질지도 모른다.
“가서 시험해봐.”
숨을 깊이 들이마시곤 두검음을 보며 말했다.
멍하니 서있던 두검음은 곧 냉소를 지어보였다.
“나에게 너희를 대신에 이것이 무슨 성질을 띄는지 시험해보라고 시킬 셈이냐? 꿈도 야무지구나. 그냥 나를 죽이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어서 날 죽여라.”
두검음이 엽운을 향해 외쳤다.
보고 있던 소령은 도무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엽운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저 그의 손에 백색의 장검을 한 번 쳐다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이 검이 너를 주인으로 섬긴다고 하지 않았나. 이 검은 너를 섬기는데 너는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검을 버릴 셈이냐?”
순간 두검음의 표정이 굳었다.
“나를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두느니 차라리 다 같이 도박을 해보는 건 어떤가?”
엽운은 그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 원형이 전송 작용을 한다고 치고, 출구로 이어지던,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지던, 우리가 여기서 죽게 되지만 않는다면 다시는 너를 적으로 삼지 않음을 약속하마. 그럼 넌 그 검을 가지고 열심히 수련할 기회를 얻는 거지.”
“그 제안은 나쁘지 않군. 받아들이도록 하지.”
두검음의 눈이 반짝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뛰어올라 청색 원형 속 썩은 나무 냄새를 풍기는 검은 빛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삼켜져 사라졌다.
이렇게 간단하다니, 엽운은 어리둥절했다.
“엽운, 서둘러! 제단의 영력이 곧 소실 될거야. 보아하니 일종의 특수한 공간진법인 거같아. 아마도 일방통로일거야.”
소령의 얼굴색이 다시 한 번 변했다.
다짜고짜 엽운의 손을 잡고 통로를 향해 잡아 끌었다.
이 문을 통과하면서 흩어지게 될까 두 사람은 순간 깍지를 끼웠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검은 빛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푸른 원형이 무너져 내렸다.
그들 아래 있던 제단도 심하게 요동치더니 재가 되어 사라졌다.
같은 시각 화운비장의 바깥쪽에서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수십 리를 이어지던 대묘에 별안간 피처럼 붉은 빛이 나타났다.
하늘을 가득 메운 핏빛에 천지가 붉게 물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선홍빛이었는데 보기만 해도 몸서리 쳐 졌다.
겹겹이 쌓인 선홍빛의 대지와 핏빛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아직 수위가 낮은 제자들은 하얗게 질려서는 도무지 감당해 내질 못했다.
하지만 구양문천과 두건명, 그리고 손일도와 은파파 네 사람의 얼굴에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고 오히려 흥분된 모습이었다.
“하하. 이런 날이 드디어 오는구나.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
두건명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누가 아니랍니까, 오늘 하루 동안 두건명께서 하신 말씀 중에 제일 듣기 좋네요.”
패도문의 손일도가 큰 소리로 웃었다.
“오늘은 구양봉주와 두삼족장의 공이 큽니다. 한 건 올렸으면 이 늙은이에게 국물 한 모금 남겨주는걸 잊지 마시길.”
은파파는 지팡이를 짚고 서있었다.
언제든 공중에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구양문천은 슬며시 웃어보이곤 말했다.
“은파파도 너무 겸손하시다니까요. 우리 천검종과 두가의 공이 크긴 했으나, 이 경우엔 저 제자들이 금제를 깨고 2층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 그것이야 말로 큰 공이지요. 종파에게 1할의 이익을 더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금제를 해결해 낸 제자가 바로 은파파의 제양문 소속 천재 제자가 아닐런지요.”.
은파파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우리 제양문을 그쪽 천검종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밝은 달 앞의 촛불이라 할 수 있지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늙은이는 천검종 제자들이 이번에 가장 많은 보물을 찾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은파파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걸 보니 우리 천검종을 정말 우러러 봐주시는군요.”
구양문천은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겸손한 말을 하고 있지만 목소리에서 겸손함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천검종이야 말로 진나라에서 제일가는 종파인데, 구양봉주가 겸손할 필요가 있나요.”
반대편에서 손일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진나라에서 천검종은 손에 꼽히는 대종이었다.
두가를 제외하곤 맞설 수 있는 종파가 없었다.
“손문주님도 참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구양문천이 공수를 했다.
“흥!”
갑자기 냉랭한 목소리가 한 편에서 들려왔다.
두검명은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눈빛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천검종도 뭐 나쁘지는 않지요. 그러나 진나라 제일의 세력이 되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제가 볼땐 진나라 제일의 세력은 분명 우리 두가입니다. 둘째는 왕실이고 그 다음이 천검종일 겁니다. 패도문과 제양문은 그 보다도 떨어지구요.”
두건명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두삼족장님의 말씀은 틀립니다. 저희 천검종이 세번째라거나, 혹은 그보다도 더 뒤에 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요. 그러나 두삼족장께서 패도문과 제양문을 이리도 무시하시니, 정녕 손문주님과 은파파님의 수위를 합쳐도 자신에게 못 미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구양문천의 가늘게 뜬 눈에서 번뜩이는 기개가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저도 겸허히 받아들여야지요. 헌데 손일도 정도라면 뭐, 그의 수위는 다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세 사람 중 아무나 상대해도 향 반개 태울 시간도 안돼서 잡을겁니다.”
“보아하니 두삼족장은 아주 자신 있으신 모양입니다.”
구양문천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뒷짐을 지고 선 두건명은 매우 오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하하!”
큰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넓은 들판을 뒤흔들만한 소리였는데 웃음소리엔 분노가 가득했다.
“두건명, 오늘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모양이군.”
손일도의 빼곡한 머릿털과 수염이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절로 움직였다.
분노가 극에 달한 듯 했다.
“손일도, 우리가 오년 전에 안 싸워본 것도 아니지않나. 설마 또 내 창에 어깨가 뚫리고 싶은 건가? 그때는 목숨은 살려주었다만, 이번엔 심장이 뚫리고 싶은 건가?”
두건명이 비웃는 표정으로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오늘날에도 자네가 그럴 능력이 된다면야 나도 말을 아끼지. 그러나 허풍을 떨려는 셈이라면, 부는 바람에 이가 빠지지 않게 조심하게나.”
손일도의 손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곧 사람 하나만한 은색 군도를 들고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휘날리는 칼날에선 드높은 기세가 느껴졌다.
“뭐라? 지금 한 판 붙자는 것인가?”
두건명이 발을 내딛자 금색의 창이 손에 나타났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축기경의 고수 두 사람이 곧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하늘을 뒤덮은 핏빛이 “팍” 소리를 내며 터지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붉은 수정으로 만든 덮개가 큰 힘에 꿰뚫려 순식간에 부서지는 것 같았다.
끝없는 붉은 빛이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투명하고 반짝이던 대묘의 외벽이 어두워졌다.
열두 줄의 통로 사이로 엄청난 빛이 쏟아지며 백리 너머로 뻗어 천하를 밝게 비추었다.
이어서 가운데 천검종이 있는 통로에서 갑자기 빛이 사라지더니 느닷없이 통로의 입구에 빛의 문이 나타났다.
빛이 파도처럼 요동치며 은은한 푸른 빛을 내뿜었다.
“2층, 여기가 2층으로 가는 통로구나. 드디어 열렸네.”
“드디어 1층을 벗어나 저리로 들어가게 될 줄이야.”
“이 통로는 아무래도 천검종 쪽에 있는 것 같네, 과연 진나라 제일의 대종이구나. 문하의 제자가 놀랍도록 아름답구나.”
“2층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누가 통로를 여는 지는 중요하지 않아. 금단정봉대수사의 비장이라니 생각만 해도 설레는군.”
빛의 문이 나타나자 사대세력과 나머지 고수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얼굴엔 설레임과 기대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