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 화 법진의 이변
“뭐야?”
여명홍과 나머지 사람들도 소령의 말을 듣고 역시나 안색이 안 좋아졌다.
산의 앞까지 왔는데 말짱 도루묵이라니, 어떻게 해도 올라갈 수가 없는 것인가?
몇 배의 방어력이라니, 이들 중 가장 실력 좋은 엽운과 단진풍이라 해도 곡일평이 날린 일격의 몇 배씩 되는 힘을 낼 수는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소령을 보며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
소령이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석실에 있을때 보다 진정한 모습임을 눈치챘기 떄문이다.
소령은 입가를 한 번 씰룩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했는데 말을 하지 않았다.
“소령 사저. 방법이 있다면 말해주십시오. 만약 위험한 일이라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여명홍은 소령의 안색이 미세하게 변한 것을 눈치 채고는 곧바로 공손히 이야기했다.
소령이 보더니 고개를 돌려 엽운에게 말했다:
“이것 봐, 얼마나 예의 바르니, 사저라고 부를 줄도 알고 말이야, 너처럼 위아래 없는 사람은 없다구.”
엽운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말을 할 기분이 들다니.’
소령은 그의 표정이 가라앉는 것을 보고는 원래는 몇 마디 더 하려했지만 곧 농담 할 마음이 사라졌다.
“사실 나도 별 다른 방법이 없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엽운의 귀에 대고 가볍게 말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만약 우리 아버지 말이 틀렸다면 우리는 어쩜 여기 갇혀 죽을지도 몰라.”
엽운은 갑작스레 기분이 변한 그녀를 보고는 물었다.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셨는데?”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 어떤 사람들은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참지 못하고 위험을 무릅쓴다고.”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체경 제자들처럼 말야. 응기단의 유혹도 뿌리치지 못하고 고작 그 한 알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를 잃은 듯이 행동하잖아.”
엽운의 눈이 거세게 번득였다.
소령의 말에 어떤 가능성이 별안간 떠올랐다.
“예전엔 아버지가 하신 말이면 전부 맞는 줄 알았어. 그런데 널 만나고 보니 아버지 말씀이 다 맞는지 조금 의심이 되네.”
소령은 기분이 다시 좋아진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왜냐하면 너 역시 연체경 제자인데도 비정상이 되어버리진 않았잖아. 거기다 나를 모질게 혼내고 예쁜 표정 한 번 안 짓기는 해도 내 걱정을 해준다는 걸 알거든. 그래서 너한테는 하나도 화가 안나. 날 사저라고 부르라고 하긴 해도... 다른 사람이었으면 내가 사저 소리 듣는 취미 따위가 있을 것 같아?”
엽운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마음속은 왜인지 모르게 떨렸다.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그래서 말야, 만에 하나 못 나가게 되더라도 적어도 너라는, 짜증나지 않는 사람이 곁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다지 두렵지 않은 것 같아.”
소령의 하얀 얼굴에 옅은 홍조가 나타났다.
엽운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 마시고 한 동안 침묵을 유지하더니 물었다.
“그 응기단 말인데, 아버지가 특별히 호신용으로 쓰라고 주신건가요?”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기단이 무슨 배추도 아니고, 나도 하나밖에 안 가지고 다니거든. 근데 약속했으니까 여기서 나가면 있다면 반드시 한 알 챙겨줄게.”
“반드시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산에 들어가는 건 문제없어요.”
엽운이 진지하게 말했다.
“뭐라고?”
소령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하다가 또 말을 아꼈다.
그저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방법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단진풍은 이때까지 줄곧 엽운과 소령이 떠드는 것을 결국 짜증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기다려야 해.”
엽운이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천천히 말했다.
“기다려?”
단진풍이 미간을 찌푸렸다.
엽운은 고개만 끄덕였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그가 무얼 하려는지도 몰랐다.
“좋아! 그럼 기다려 보자고.”
꼼짝도 하지 않고 엽운을 보다 더 이상 묻지 않고 옆에 있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이런 모습을 본 나머지 사람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한 시진, 두 시진, 세 시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곡일평과 사람들의 마음은 초조해졌고, 이대로 기다려 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엽운도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는 모양새였다.
무려 다섯 시진이나 지난 후, 엽운이 별안간 눈을 뜨자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진짜 맞는 말이었네!”
소령도 펄쩍 뛰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단진풍 역시 얼굴에서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한 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주 작은 틈새에서 수많은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아무것도 없는 듯 했던 공기 중에 다시 한 번 수많은 투명한 물결이 떠올라 무늬를 새겼다.
곧이어 아주 멀게 만 보이던 거리가 별안간 당겨져 가까워진 듯 했다.
멀리 잘 보이지 않던 그림자가 갑자기 모두와 가까워졌다.
“금 사형?!”
황포를 입은 진온이 놀라서 소리쳤다.
똑같은 황포를 입고 있는 것이 분명 응기단을 얻고는 사라진 금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금형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몸 주위에 붉은 빛이 어슴푸레하게 감돌고 있는데 마치 몸속의 피가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주위로 선명하게 꼬여있는 한 줄기 노란 기운이 마치 한 줄 한 줄 요동치는 것 처럼 보였다.
금형의 표정이 아주 이상했는데 놀라움, 기쁨과 실의,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한 곳에 뒤엉킨 듯한 느낌이었다.
곡일평이 차가운 숨을 들이마시고 반응해왔다.
깜짝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연기경!”
진온이 몸을 부르르 떨고 역시 반응했다.
그러나 마음속의 놀라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뭐라고?”
이들에 비해 엽운과 단진풍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했다.
“연기경?”
여명홍은 금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안은 연기경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못 들어오는 거 아니었나?”
“사람은 늘 요행심리를 가지기 마련이지, 그 역시 다섯 시진이나 망설였어. 지금 그가 있는 저쪽엔 이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가 닿지 못할 것이야. 그럼 흡수하기 어려운 영기들이 스며 들어서 몸이 터져 죽을 일은 없지.”
단진풍이 냉소하며 말했다.
“저 자는 아마 응기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연기경의 경지가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생각했겠지. 아니면 연기경마저 돌파해 버린 뒤 안전한 곳을 찾아 수행하며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었거나.”
“하하하하!”
바로 이 때 멍하니 있던 금형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다른 이들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소령!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직접 네 시체에서 꺼내가는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소령을 보며 점점 더 큰 소리로 웃었다.
“금사형, 응기단은 소령사저가 준 것입니다. 이제 한계를 돌파했다고 어찌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하십니까?”
여명홍이 소리쳤다.
“넌 뭐야, 설마 가까이 오면 몸에 이상한 영기가 스며들 것이라 생각하고 감히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이 정도 거리라고 내가 네놈을 어찌 할 수 없을 줄 아느냐?”
금형이 차갑게 말했다.
“넌 뭐야.”
라는 떨어지자마자 그의 손에 빛이 번쩍였고 검은색의 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간, 여명홍은 간신히 한 쪽으로 피할 수 있었다.
바닥에 꿇어 앉아 오른쪽 어깨에서 피을 흘렸다.
엽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과연 연기경의 진정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연체경과 비교하자면 연기경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연체경은 극한까지 수련해도 영력을 피부와 근육, 모공에 돌아다니게 하는 데에 그친다.
연체란 역시나 육신을 단련하는 것이고 이것은 신선의 길에서 가장 기초적인 단계다.
하지만 연기경은 완전히 다르다.
체내의 영기를 정련하여 진기로 만들고, 실질적으로 허공에 내뿜는 것이다.
금형은 조금 전에 기경을 터득한 게 분명한 듯 했고, 그저 몇 번 연습해본 수준일 터였다.
그러나 방금 발사한 진기는 놀랍도록 먼 거리를 날아왔고 심지어 방어에 능한 여명홍의 오른쪽 어깨를 뚫어버리기까지 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어리석구나! 나의 흑봉자는 본래 진기를 증폭시키는 중품영기라 연체경에 머물러 있을 땐 제대로 된 위력을 내지 못했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내 손에 이런 무기를 쥐고 있는 한, 나보다 높은 경지의 수사가 온다 해도 나에게 당할 뿐이다!”
금형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한 척 쯤 되는 길고 검은 가시가 손에서 끊임없이 번쩍였다.
“이젠 소령 뿐 아니라 모두 마찬가지다.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전부 죽을 것이다!”
독살스러운 웃음을 듣고 얼굴빛이 변한 진온이 말했다.
“금사형, 저 마저....”
“이런 곳에서 그게 무슨 상관이지?”
금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참 불쌍하네.”
별안간 소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웃겨 죽겠어. 기경 좀 배웠다고 네가 금단 수사라도 된 줄 알아? 그리고, 이곳의 진법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하다고.”
말을 마치고 엽운을 세게 잡아 끌었다.
엽운은 소령의 매끄럽고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부드러운 힘에 이끌여 그녀를 따라 푸른 산으로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단진풍은 눈을 매섭게 번뜩이며 함께 따라갔다.
금형은 무언가를 느끼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머리 위 펼쳐진 하늘엔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뇌운이 있었다.
그 사이로 전기뱀이 뛰쳐나오더니 번개가 번쩍이며 무시무시한 위세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