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 화 검은 안개
엽운은 어두운 공간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소령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곳은 1층이겠지.
그런데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 불길이 가득한 대전을 격파했는데도 아직 1층이라고?
금단 대수사님도 너무 조심하는 거 아닌가?
1층만으로도 이렇게 복잡한데. 굳이 층층겹겹이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이봐이봐, 너 왜그래?”
소령이 멍한 표정을 짓는 엽운을 보더니 팔뚝을 툭 쳤다.
“네 이름이 뭐더라? 잊어버렸네.”
엽운은 정신을 차리고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소령이는 그냥 엽운이라고 부르면 돼”
“이게 또 사저 두 글자를 빼먹네, 위아래도 없이, 다음에 또 깜빡하면 그땐 지금처럼 친절하지는 않을 거야!”
소령의 말투는 무겁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눈썹을 찡그린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소령사저. 들어오자마자 줄곧 이곳에 있었는데, 뭐 발견한 거 없어요?
엽운은 찡그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소령이 이곳을 한참 돌아다닌 이상, 여기엔 별 다른 위험이 없다는 뜻이다.
위험한 진법이나 금제 같은 게 모든 구역에 있는 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눈앞의 공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사실 이곳 또한 하나의 석실에 지나지 않는데, 단지 엽운이 있던 석실에 비해 열배는 커졌을 뿐 어떤 물건도 장식도 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들어온 뒤 무언가를 마주친 일은 없습니까? 아니면 무슨 금제를 맞닥뜨렸다거나?”
엽운은 석실 전체를 샅샅이 돌았다.
돌벽은 매끄럽고 차가웠는데,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들어와 보니 이랬어.”
소령은 한참 생각하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 번 찾아봤는데, 어떤 기관도 통제도 없었고, 나가는 길도 찾을 수 없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눈살을 찌푸렸다.
“아 맞아!”
소령은 새카만 눈을 반짝이더니 위를 쳐다보았다.
“위쪽은 너무 높아서 대충 보기만 하고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어.”
엽운은 위로 눈을 돌렸고 시커먼 안개로 뒤덮힌 꼭대기밖에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나가고 싶으면 저기서부터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엽운은 꼭대기의 검은 안개를 응시했다.
안개 위로는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볼 수 없었다.
한참을 쳐다보다가 안개 속에서 이따금 하얀 빛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아주 괴이한 모습을 발견했다.
검은 안개와 속의 하얀 빛은 분명 흉악한 기운을 숨기고 있지만 여기에 멍하니 서 있어 봤자 기운이 다해 죽어 버릴 뿐이라고 생각했다.
소령을 보며 말했다.
“일단 여기에 있어보세요. 내가 가 볼테니까.”
그러자 곧 소령은 긴장해 무의식적으로 반대하려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이상한 감정이 샘솟았다.
“원래 목숨 한 번 빚졌는데, 만약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다면 그 목숨 돌려주는 셈 치면 되잖아요.”
소령을 한 번 쳐다보곤, 말을 마치기 무섭게 거침없이 올라갔다.
“엽운!”
소령이 호들갑을 떨며 불러도 엽운은 이미 검은 안개 속으로 뛰어든 뒤였다.
“별 이상한 게 다있네!”
엽운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소령의 목소리가 막 귓가에 닿을 무렵, 검은 안개 속에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이 전해져왔다.
마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몸속으로 들이닥친 듯 했고, 별안간 마음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순간, 몸속의 영력을 제어하기가 어려워져 마치 나무토막인 양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지면에 다다랐을때 머릿속이 별안간 맑아진 듯 화들짝 놀라 몸을 뒤집어 내려섰다.
“어떻게 된거야?”
소령은 놀란 표정으로 그와 검은 안개를 바라보며 물었다.
엽운은 손을 내저으며 말없이 검은 안개로 뒤덮인 위쪽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검은 안개는 마음을 어지럽히는데, 바로 그 찰나에 어렴풋이 그 한 줄기 하얀 빛이 출구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것이며 검은 안개에 의해 왜곡되어 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검은 안개 속의 한 줄기 빛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똑똑히 보기란 지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몹시 힘들 것 같지만 그래도 좀 전의 하늘을 뒤덮은 화염보다야 몇 배는 낮으니 최소한 목숨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윗쪽에 나가는 통로가 있고, 통로를 막는 무슨 금제 같은 게 있는 건 확실해. 하지만 먼저 이 검은 안개를 막아내야 해. 검은 안개에는 강력한 심신 교란 효과가 있어.”
엽운은 생각을 확실히 정리하고는 소령에게 말했다.
소령은 크게 낙담하며 입술을 삐쭉 내밀어 말했다.
“심신을 가다듬는 보물이 있으면 될텐데.”
‘심신을 가다듬는 보물?’
멍하니 있던 엽운은 별안간 청목단병을 꺼내들더니 입에 영액을 한방울 떨어뜨렸다.
충만한 영력과 청량한 기운이 순식간에 온 몸을 뒤덮으며 격한 고통이 몰려왔다.
곧바로 별 다른 말도 없이 몸을 날려 석실의 꼭대기를 향해 돌진했다.
검은 안개가 다시 한 번 머리 속으로 파고들어 마음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몸속의 시원한 기운이 살짝 한 번 돌자 두려운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더 이상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영력이 차오르고 심신이 맑아지자 부정적인 감정들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엔 좀처럼 느껴본 적 없는 청명함만이 가득했다.
부릅 뜬 두 눈이 안개를 모두 날려버린 듯 했고 어느새 석실의 꼭대기가 있었다.
꼭대기에는 생각했던 대로 통로가 있었고, 빛은 통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꼭대기에 박힌 명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아기 주먹만 한 명주가 희뿌연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명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손을 거두고 아래로 내려왔다.
“어때 어떄?”
떨어지는 것을 본 소령이 다급히 물었다.
소령의 다급한 모습을 본 엽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검은 안개가 마음에 끼치는 영향이 너무 커 걷잡을 수가 없네요.”
소령은 곧 예쁜 얼굴로 참을 수 없단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어쩌지? 설마 여기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거야? 금제를 빨리 해결하고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내가 도망쳐 나온걸 아버지가 아시게 될거고 그럼 끝장이야.”
엽운은 자신보다 두어살 어린 소령을 보며 물었다.
“너희 아버지가 누구고, 대체 왜 몰래 뛰쳐 나온건데?”
“소령 사저라니까!”
소령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호칭을 강조했다.
이어서 그녀는 엽운의 질문엔 대답도 하지 않고 화가 난 모양새로 말했다.
“누가 우리 아버지한테 나를 문파의 시험에 참가시키지 말라 한거야! 맨날 산 속에 틀어박혀 수행만 하니까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고.”
“아버지가 도대체 누구신데? 천촉봉의 어느 장로이신거야?”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엽운이 물었다.
좀 전에 이미 명주가 금제를 푸는 진안임을 깨달았으나 문득 소령과 언니가 단 두 세마디 말로 진천한이 놓아주게 만든 것을 보고 신분이 결코 범상치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이 기회에 소령이 도대체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제대로 물어볼 참이었다.
“천촉봉? 아 그래, 네가 천촉봉의 제자구나. 나는 아냐.”
소령이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무영봉에 살고 있거든, 이번에 구양 사숙의 대열을 따라서 몰래 뛰쳐나왔는데, 안 걸렸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날 집에 돌려 보내셨을거야.”
구양사숙 이라면 설마 그 공중에 떠있던 구양봉주를 말하는 건가?
대열을 거느리고 화운비장을 개방할 수 있는 고수라면, 최소한 천촉봉의 봉주 정도는 되어야 비교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구양봉주가 바로 천검종 4대봉의 봉주 중 하나인가?
만약 그렇다면 소령의 아버지가 누구던, 최소한 구양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자는 아니겠지?
엽운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령의 집안 내력이 이리 대단할 줄은 생각치 못 했는데. 그런데 이 계집애도 말 참 안듣네. 집안의 대인을 뒤로하고 도망쳐 나오다니 혹시 이 화운비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것인가?’
“이봐 엽운, 너 방법이 떠오른거야 뭐야?”
소령은 엽운이 어디있는지 보곤 다급히 물었다.
엽운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흥, 날 속일 생각 마. 아까 니가 영액을 마셨고 그 냄새는 내가 맡아본 냄새야. 그것은 칠장로의 응신약주야.”
소령은 눈을 깜빡이더니 흥얼거리며 말했다.
엽운은 기겁을 하며 말했다.
“응신약주? 너 칠 장로를 아는거야?”
“흥, 그 어르신은 내가 어렸을 떄부터 알고 지냈어. 너는?”
소령이 자랑스러운 공작새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엽운은 이제 소령의 아버지가 적어도 무영봉 봉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임을 확신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다시 한 번 해볼게.”
이어서 그는 다시 단병을 꺼내 조심스럽게 영약을 한 방울 마셨다.
‘휙’ 하는 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졌다.
그의 모습이 다시 한 번 검은 안개를 뚫고 들어갔다.
이번엔 검은 안개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고, 하얀 빛의 명주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몸을 한번 뒤척이더니 엽운은 명주를 정확하게 잡아 당겼다.
힘 한번 들이지 않고 명주가 손에 잡혔고, 다음 순간 모든 검은 안개가 출구라도 찾은 양 석실 꼭대기의 작은 구멍으로 쏟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