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 화 만남
“역시 너였구나.”
엽운은 크게 기뻐했다.
붉은 수정이 대전을 불바다로 만드는 열쇠임이 분명했다.
수정을 거두거나 파괴하기만 하면 하늘을 가득 메운 불꽃이 분명 사그라 들 것이다.
금방이라도 타버릴 듯 한 고온을 견디며 흑요검을 사납게 찔러 넣었다.
“떙!”
흑요검이 붉은 수정에 적중하자 검신을 꽂아 넣은 후 수정을 뽑아내려 했다.
그러나 손바닥엔 강한 저항력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떨림에 팔 전체가 저려와 하마터면 감각을 잃을 뻔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화염에 휩싸인 채 엽운은 식은땀을 흘렸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저릿한 감각이 순식간에 몸의 절반까지 퍼져 손을 빼지 않으면 쓰러질거 같았다.
또 언제 떨어질지도 모를 불붙은 비석을 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화운비장의 1층이 이렇게나 험난한데, 여기를 통과한다 해도 2층 3층에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까?
엽운은 이대로 칼을 버릴지, 아니면 아직 통제가 가능한 틈을 노려 힘을 쏟을지 결정해야했다.
생사의 일각!
엽운은 지금껏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잡역의 바깥뜰에서 몸을 낮추던 것은 단지 생존을 위해서였다.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계속해서 살아나가는 것’ 이다.
검을 버린다 해도 두 번째 기회를 노릴 기운이 없어 조금이라도 심신이 흐트러지면 불바위에 맞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죽음의 구렁텅이로 사라지는 일 밖에는 없다.
절대로 검을 버릴 수는 없었다.
물러서지 않았고 혹여나 불바위에 맞게 될까 걱정하지도 않았다.
한 걸음씩 나아가, 손을 바꾸어 쥔 후 모든 영력을 흑요검에 주입하고 힘껏 들어올렸다.
“떙!”
붉은 수정은 흑요검의 힘에 들어 올려져 화염 속으로 날아올라 대전 꼭대기로 쏘아졌다.
“쨍그랑!”
수정이 날아오르는 순간, 공간 전체가 소리를 내며 마치 대전이 산산조각 나 무너지는 것 같았다.
크게 놀랐지만 딱히 별 수 없었다.
영력은 거의 바닥이 났고, 끝없이 날리는 불바위를 피해야 했다.
상태가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때도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인데 이 대전은 들어갈 순 있어도 나갈 순 없었다.
출구가 어느 쪽인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분화구가 붕괴되기 시작하자 화염이 뿜어져 나와 사방의 담벼락을 마구 때렸고. 마침내 셀 수 없이 많은 균열이 생겨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했다.
엄청난 화염 속에 자갈들이 날아다녔고 재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시야가 점점 흐려져 앞을 볼 수 없었다.
엽운은 사방을 둘러보고는 도망치려 벌떡 몸을 일으켰다.
흑요검이 그림자를 만들어 몸을 감싸더니 솟아오른 붉은 수정을 쫓아갔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살아남으려면 저 붉은 수정을 잡아야한다.
“펑펑펑!”
무수한 불바위들이 그림자에 부딪히자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치 큰 망치로 온몸을 매섭게 때리는 듯 했다.
엽운은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에서는 단맛이 났다.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더니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고온에 타들어가 사라졌다.
손으로 마치 숯을 잡고있는 듯한 격통이 느껴져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몸을 뒤집어 붉은 수정을 죽을힘을 다해 움켜쥐고는 땅에 떨어졌다.
“깨져라!”
영력이 손에 쥔 수정을 향해 미친 듯이 솟아올랐다.
영력이 주입되는 순간, 붉은 수정이 미지근해지더니 마치 숯처럼 뜨겁던 온도가 뚝 떨어지고, 부드럽고 따듯한 한 조각의 옥이 되어 포근한 느낌을 전해왔다.
동시에 하늘 높이 솟구치던 불길이 한풀 꺾이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엽운은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대전을 뒤덮은 불길뿐만 아니라 좀전에 보았던 호화로운 대전의 광경도 종적을 감추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돌로 만든 새까만 방 밖에 없었다.
안은 텅텅 비어있고 장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꼭대기에 야명주 하나가 매달려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토록 신비한 진법이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이 방이야 말로 진짜 모습이 아니겠어?”
엽운은 온화한 불빛에 빛나는 석실을 바라보며 조금 전에 맞닥뜨린 모든 것을 떠올리곤 경외심을 느꼈다.
경외는 경외일 뿐, 엽운은 사방을 둘러보고 출구를 찾으려다 어떤 보물들이 남아있는지도 살펴보았다.
양정봉이 1층에서 보물을 찾게 된다면 자신이 갖는 것이다 라고 한 말을 기억했다.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도, 찾아낸 천재지보를 천검종에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목숨과 맞바꾼 보물인데 어찌 내어줄 수 있겠는가.
석실은 텅텅 비어 일목요연했다.
엽운은 벽에 기대져 놓여있는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었다.
돌도 나무도 아닌 것이 엽운이 아는 어떤 종류의 금속도 아니고 수정도 아니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순간 가슴이 참을 수 없이 요동쳤다.
만약 보물이 있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이 상자에 넣어두었을 것이다.
뚜껑을 살짝 열자 상자에 보랏빛 수정이 놓여있었다.
수정엔 푸른 억새가 있는 듯 하기도 하고 없는 듯 하기도 했다.
보라색 수정을 손에 쥐자 좀 전에 검붉은 수정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약간의 저릿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이게 뭐지?”
보라색 수정을 손에 쥐고 세세히 감상했다.
영력을 주입하려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본적 없는 수정이지만 화운비장의 주인인 금단대수사가 상자에 넣어둔 이상 필연적으로 보물이란 것을 알았다.
손을 들어 한번 흔들더니, 수정과 상자까지 저물대에 넣었다.
상자를 집어넣은 순간, 벽의 빈 공간에 미세한 틈새가 생기더니 빠르게 확산되어 마침내 원이 되었다.
“1층을 격파한 건가?”
엽운은 멍하니 있더니 이내 크게 기뻐했다.
마음속 흥분은 거의 말로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1층은 해결됐으니 2층으로 갈 수 있게 됐다.
금단수사님의 묘지인 2층에는 어떤 천재지보가 기다리고 있을까?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망설였다.
일층부터 이렇게나 위험해 굳은 심성과 빠른 대처가 없었더라면 불길에 이미 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2층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2층이 진정으로 기경을 연마하는 제자들이 아니고서는 대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발길을 돌리자니 결코 달갑지 않았다.
하마터면 운명을 달리 할 뻔했는데, 고작 무엇에 쓰는지도 모를 보라색 수정 하나 얻고 어찌 만족할 수 있겠는가?
넘어갈까? 아니면 가지말까?
엽운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속으로 몸부림쳤다.
순간 눈썹을 번쩍 치켜 올리곤 한걸음 뛰어넘어 원을 통과했다.
원을 통과하자 벽이 천천히 닫히더니 사라져 돌벽은 온데간데없었다.
“여기가 2층인가?”
엽운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텅텅 빈 데다 빛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왼쪽으로 몇 장 떨어진 곳에서 한줄기 숨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거칠게 몸을 돌려 쳐다봤다.
어둠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는데, 작고 여윈 것이 분명 여자였다.
“어이, 거기 누구냐? 천검종의 외제자? 방금 전에 들어온 것인가? 어떻게 거기서 튀어 나온 거지?”
어둠속에서 들리는 어린 여자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서려있었다.
곧이어 갸냘픈 그림자가 속도를 내며 다가왔다.
용모가 수려하고 여리여리하지만 훗날 경성의 미색은 감출수 없었다.
“아, 너였구나?”
연두색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가 엽운을 보더니 이내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여자아이를 본 엽운도 얼떨떨했는데, 분명 일전에 잡역 앞뜰에서 진천한에게 핍박을 당했을 적에 보았던 두 여자 아이들 중 하나인 소령이었다.
“소령 사매였구나. 어쨰서 이런 무덤에 있는 거야?”
엽운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사매야? 사저라고 불러야지. 내가 너보다 먼저 입문했는데.”
소령이 입을 삐쭉거리더니 칭얼대며 말했다.
엽운은 곧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래그래 소령 사저. 사저도 1층 진안을 격파하러 들어온 겁니까? “
소령은 앳된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들어봐. 내가 몰래 숨어 들어왔는데 말이야, 여기 갇혀서 못나가게 될 줄은 몰랐지 뭐야.”
멍하니 있던 엽운은 이상한 듯 물었다.
“소령이 너 이미 기경을 연마하는 수준에 도달했어? 2층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거야?”
소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소령 사저야, 잊지 마. 그리고 누가 여기가 2층이래? 여긴 1층이야. 난 기경을 연마하기엔 아직 조금 모자라.”
“1층이라고?”
엽문은 어리둥절해 하더니 별안간 안색이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들어오니까 이곳으로 보내졌어. 당연히 1층이지.”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