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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선공-40화 (40/227)

제 40 화 흉계

“너! 올라와라!”

시합장의 상황을 둘러보기도 전에 엄한 호령 소리가 엽운의 귓가에 들려왔다.

검은 도포를 입은 한 제자가 무표정으로 엽운 쪽에 비어 있는 경기장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또 다른 한쪽에 있던 소녀 한 명에게도 같은 동작을 취했다.

엽운의 안색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방금 란 장로가 제자를 공격한건 실력을 숨기고 항복하는 일 따윈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 검은 도포를 입은 제자는 다음 시합의 상대를 아무렇게나 지목하는 것 같았는데, 그들에게 조금의 휴식 시간도 주지 않았다.

이 시합은 장로들과 흑색 도포 제자들의 손에 달려 있기에 어떠한 요행도 바랄 수 없었다.

게다가 첫 번째 시합이 끝난 후 장로들은 그들의 실력을 똑똑히 지켜본 후, 흑색 도포의 제자들을 시켜 강한 상대끼리는 붙을 수 없게 만들어 마지막까지 남는 이는 분명 신입 제자들 중 가장 강한 자가 될 것이다.

“생사가 사람의 손에 좌우되는구나. 다행히 요행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엽운이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체내에 있는 흑백의 빛이 번뜩이며 지나갔다.”

“엽운 사형, 조심하세요.”

이때 여명홍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너도 첫 시합을 통과했느냐?”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으나 몸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여명홍은 이미 시합을 치른 것이 분명했다.

“너도 조심하거라.”

여명홍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림자를 번쩍이며 흑포를 입은 제자가 지목한 시합장 위로 떨어졌다.

"사형. 어서 오십시오."

위에서 미리 기다리던 소녀는 엽운이 자신의 맞은편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전의가 일어나 체내의 영력이 두 손으로 뿜어져 나왔다.

엽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영력에서 풍겨져오는 기운을 보니 소녀의 수위는 겨우 연체경 4단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가만히 서서 공격을 받아주어도 상처하나 입히지 못할 정도였다.

"엽운 사형, 저는 왕아제라고 합니다.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준비조차 하지 않는 엽운의 모습을 본 소녀는 나지막이 소리쳤다.

“네가 먼저 공격 하거라.”

엽운이 손을 흔들었다.

소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두 사람의 수위는 너무도 큰 차이가 났기에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고, 만약 그가 먼저 공격한다면 아마 이 소녀는 중상을 입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왕아제는 멍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엽운 사형, 제가 주제넘게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엽운은 호기심을 보였다.

“무슨 질문?"

왕아제는 엽운에게 다가가,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방긋 웃어보였다.

"그게 말이죠, 사형께서는 죽을 때 어떤 모습이실까 궁금해서요."

향기로운 바람이 소녀의 손끝에서 세차게 날아와 엽운의 얼굴을 덮쳤다.

순간 주눅든 여자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피에 굶주린 살인자로 변해있었다.

옥처럼 새하얀 손끝은 새빨간 전갈의 독침으로 변해, 엽운의 가슴을 찔러왔다.

엽운은 겨우 연체경 4단계인 왕아제가 기습을 해올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대응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한 발 늦었다.

"잡역 외원에서 여기까지 온 제자들 중에 좋은 사람이 없었지."

엽운은 깨달았다.

눈앞에 보이는 이 소녀는 어떤 보물이나 공법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독침으로 변한 손가락의 영력에서 그녀의 진짜 수위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연체 5단계 내식경의 절정!

수위를 한 단계나 숨기고 있었다니!

몸에서 영력이 솟구쳐 나와 순식간에 가슴을 감쌌다.

왕아제의 공격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독침이 된 손의 위력만큼은 대단했다.

영력이 보호해주었으니 엽운이 물러서기만 하면 된다.

거리를 두면 더 강한 방어를 펼칠 수 있고, 반격할 여지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왕아제는 진작에 엽운의 생각을 계산해 두었다.

게다가 엽운은 그녀의 수위를 얕잡아 보았고 공격조차 하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왕아제가 다가와 3년간 숨겨왔던 최강의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피하거나 막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엽운은 흑백 빛을 통해 다시 태어난데다 고요함 속에서 깨달음마저 얻었다.

게다가 칠 장로가 만든 영주의 잔액을 시험해본 뒤로 판단력도 한 단계 향상됐다.

딱 한 걸음 물러난 뒤 발길을 멈추었다.

영력을 순식간에 가슴에 모은 후 오른쪽 주먹에 하얀 빛을 두른 채 왕아제의 허리를 매섭게 때렸다.

왕아제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아제는 살의로 가득 차있었다.

칼날처럼 차가운 얼굴에서는 약간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먹을 마주하고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오른손의 독침에서 다시금 새빨간 빛을 뿜어대며 가슴을 찔렀다.

그녀는 엽운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처럼 급조된 공격으로는 심한 부상을 입히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전갈 독침은 엽운의 가슴에 꽂혀 순식간에 심장을 파고들며 그를 죽일 것이다.

푹!

그녀가 예상한 바대로, 손가락의 독침은 완벽하게 엽운의 옷을 뚫고 그의 방어막을 관통하여 가슴을 찔렀다.

새빨간 피가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와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수려한 입가에 음산한 웃음기가 어렸다.

그러나, 곧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가슴을 파고든 독침이 강력한 힘에 의해 가로막힐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전갈 독침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이 이상 파고 들어갈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왕아제는 가슴이 철렁했다.

심장을 찌를 수 없다면 엽운처럼 웅장하고 순수한 영력을 가진 자에게 상처를 입힐 방법이 없다.

게다가 말할 필요도 없이 일격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왕아제가 공포에 질린 찰나 그녀는 왼쪽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곧이어 강력한 힘에 의해 10장이나 날아가 시합장 난간에 세게 부딪치고는 땅에 떨어졌다.

“어떻게 된거지? 대체 왜?”

왕아제는 바닥에 고꾸라지며 옆을 보았는데, 엽운은 조용히 제자리에 서있었고 가슴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조금만 더 들어갔다면 심장을 뚫고 순식간에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엽운의 몸 속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2년간 몰래 수련한 전갈 독침을 막을 뿐만 아니라, 반격까지 했다.

“영기다. 보아하니 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영기가 있는 것 같아.”

왕아제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엽운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난 네가 다칠까봐 걱정했는데, 오히려 이렇게 지독할 줄은 몰랐구나."

왕아제가 일어서는 것을 본 엽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냉소를 지었다.

왕아제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공포의 기운이 자신의 몸을 감싸 영력조차 흐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입을 열어 항복을 외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더니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오른쪽 허리에 격렬한 고통을 느끼며 나가 떨어졌다.

왕아제는 눈앞의 광경을 똑똑히 보았고, 자신이 이미 시합장 아래로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헉!”

입에서 선혈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나도 한 방 돌려주마. 이걸로 비긴거다.”

시합장 위, 엽운은 주먹을 쥔 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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