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화 영전
엽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곡일평의 목소리였다.
"엽운 사형, 혹시 영석이 아직도 부족하신가요?”
몸을 돌리기도 전에, 곡일평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석이 많다고 불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항상 부족하지."
엽운은 몸을 돌려 등 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곡일평을 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곡일평에게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곡일평의 얼굴빛은 평소와 같고 심지어 살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엽운 사형, 지금 우리 둘은 동전에 함께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우리의 상대는 서전의 단진풍입니다.”
엽운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나는 누구와도 맞설 생각이 없어. 게다가 단진풍 사형은 경도의 왕실 출신이라 영석이 많기 때문에, 미움을 살 생각 따윈 없다.”
곡일평은 눈살을 찌푸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전에 사형께서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우리 셋의 수위가 가장 높아요. 우리 둘이 손만 잡으면, 동서전은 우리 세상이 될 겁니다.”
엽운은 고개를 저었고, 여전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네가 아무래도 군약란을 잊은 모양이구나. 그녀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데, 언제쯤 우리 차례가 되었느냐?”
곡일평이 무얼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단진풍과 곡일평을 싫어하지만,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한다면, 단진풍이 곡일평보다 조금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군약란의 수위는 우리 모두가 이미 봤습니다. 실력은 이미 연기경에 이르렀고요. 군약란처럼 놀라운 재능을 가진 자들은 작은 천촉봉쯤이야 눈에도 안 찰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상대도 되지 않을거고요.”
곡일평은 인상을 썼다.
“우리 둘이 손잡고 단진풍만 처리한다면, 모든 게 우리 손에 결정이 날 테니 영석을 버는 것도 더 쉬워지지 않겠습니까?”
엽운은 냉소를 지었다.
“그건 불가능해. 우리는 각자 제 살 길을 찾으며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보다 먼저 천촉봉에 오른 제자들은 다 죽었다고 생각하나?”
곡일평은 멍하니 있었다.
마침 천촉봉 제자 한 명이 앞을 지나갔는데, 그는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그들을 쳐다보기는 커녕, 매우 다소 무거운 표정을 짓고 아주 다급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풍기는 분위기는 말할 수 없이 진중하고 침착했다.
엽운은 곡일평을 한 번 보고는 말했다.
“이 사형들 가운데에는 연체경 7단의 수위에 이른 사람도 많을 것이다. 만약 이들의 눈에 띄면, 반드시 죽게 될 걸. 그러니까 그냥 수행에 전념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말썽 일으키지 않고 말이야.”
곡일평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럼 저의 제안을 거절하신거죠?"
“전에 너도 손장로에게 들었지. 천촉봉의 외문제자는 모든 수행 자원을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데, 그를 위해선 임무를 수행하거나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고 했지.”
엽운은 그를 한 번 보고는 말했다.
“내 마음을 움직일만한 영석을 내놓는다면 너를 도와 뭔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곡일평은 분노에 찬 눈으로 차갑게 말했다.
“제 영석은 뭐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시나요?”
엽운은 덤덤히 말했다.
“넌 아직 나에게 영석 하나를 빚지고 있으니, 내가 너를 돕길 원한다면 먼저 빚진 영석부터 갚고 나서 다시 말하거라.”
곡일평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살의를 억누르며 말했다.
“제가 사형에게 진 빚은 갚아야죠. 헌데 제가 조언 하나 하겠습니다. 너무 욕심내지 마십시오.”
엽운은 미동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곡사제, 또 무슨 할 말이 남아 있는가? 별일 없으면 나는 가서 어떤 종문이 있는지 알아 보려는데.”
“그렇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곡일평은 떠나는 순간 두 눈에서 불을 내뿜으며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엽운,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조만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엽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앞에 있는 임무란을 계속 쳐다봤다.
지금의 그는 이미 내식경에 이르렀으니 곡일평이 무슨 영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끊임없이 영석을 얻을 수만 있다면 곡일평 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됐다.
임무표에는 높은 것에서부터 낮은 것까지 수없이 많은 임무가 있었다.
“이틀 후에 우리를 소집할텐데, 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군. 다른 곳으로 가야하는 임무는 받을 수 없다.”
엽운은 임무표를 훑어봤는데, 적합한 것은 가장 낮은 단계인 영전 개간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영전 개간, 영전 1묘를 개간하면 중품영석 1개의 포상이 나왔다.
영전, 엽운은 그저 듣기만 했을 뿐,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영전은 영초와 기이한 꽃을 재배하는 곳으로 영기가 넘친다고 한다.
영전에는 이따금씩 높은 등급의 영초가 나온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엄청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중품영석 하나라… 보상이 나쁘지 않군.” 설마 영전 개간이 어렵겠어?”
엽운은 영전에 본래 관심이 많아서, 한 번쯤 눈으로 보고 싶었다.
잠깐 망설이던 그는 시련전을 향해 걸어갔다.
시련전 입구의 책상 뒤에는 어린 천촉봉 제자 하나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자는 둥 마는 둥 한 모습이었다.
엽운은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사형, 제가 1단계 임무를 받아 영전을 개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전 개간? 네가 맡을거야? 확실해?”
긴 책상에 앉은 어린 외문 제자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맞습니다. 저는 한번도 영전을 본 적 없어서 말입니다. 진작에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엽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오, 허리패를 이를 줘봐라.”
어린 제자는 그를 한 번 보더니, 그대로 손을 내밀었다.
엽운이 허리패를 건네주자 어린 제자가 허리패 위에 가볍게 손짓을 하곤 다시 그에게 돌려 줬다.
“자, 이제 영전을 개간하도록. 임무를 완수한 후에 영전을 관리하는 칠장로님께 확인시켜 드리면 중품영석 하나를 받을 수 있을거다.”
어린 제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내가 허리패에 표시를 해뒀으니, 그 지도대로 찾아가면 된다.”
엽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영기를 허리패에 주입했다.
허리패가 뿜어내는 광막에 빨간 점이 하나 더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형.”
엽운의 공손한 모습을 보고 젊은 제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한 가지 더 일러주었다.
“사실 영전을 개간하고 지키는 것은 간단해 보이지만, 제법 힘이 드는 일이다. 왜냐하면 영전의 영약들 중에는 키우기 어려운 것들이 있거든, 아마 관리자를 탓하게 될 걸. 그리고 우리 근처의 몇몇 영전들을 관할하는 일곱 장로들은 성격이 좀 괴팍해서 상대하기 까다로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은 보통 제자들이 받는 일이 거의 없는데 말이야.”
“성격이 괴팍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사형의 조언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저 한 번 보려고 하는 것뿐이니, 상으로 영석을 얻지 못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엽운은 약간 멍해졌지만, 그래도 진심을 다해 감사를 표했다.
지도를 따라 엽운은 곧 표시된 계곡에 도착하였는데 막 골짜기에 들어서자 갑자기 요상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이 기이한 향에는 여러 가지 향내가 뒤섞여 냄새를 맡으니 거부감은 전혀 들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향긋한 냄새만으로도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걸.”
엽운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문득 이 계곡의 영기가 바깥보다 더 짙게 느껴졌다.
그는 이미 내식경에 이르렀기에 이런 곳에 머무는 것이 밖에 있는 것 보다 훨씬 도움이 되었다.
"멈춰라, 게 누구냐, 영전곡에 와서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느냐?"
바로 그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그림자 하나가 앞쪽 산길에서 번쩍였다.
검은 모포를 입은 젊은 제자 두 명이 나타나자 엽운은 자신의 허리패를 건넸다.
"두 사형들께 인사 올리겠습니다. 소생 엽운은 방금 영전을 개간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영전을 개간한다고? 확실해?”
좌측의 검은 옷을 입은 제자가 어리둥절해하며 허리패를 받았다.
그리고는 놀랍다는 듯 또 다른 검은 옷의 제자에게 허리패를 건넸다.
두 사람은 엽운의 허리 패를 보고 눈을 마주친 뒤 일제히 엽운을 바라봤다.
“네가 임무를 맡았을 때, 시련전의 사형이 너에게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느냐?”
순간 엽운은 약간 머뭇거리며 말했다.
“칠장로님의 성격이 괴팍해서 제가 더 조심해서 일해야 된다는 것만 들었습니다.”
검은 옷의 두 제자는 다시 한 번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패를 돌려주었다.
“그렇다면, 들어가거라. 먼저 칠장로님께 찾아가서 보고하도록. 어르신께서 영전을 어떻게 개간하는지 알려 주실거다.”
“네. 사형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 제자들의 표정은 엽운의 마음 속 의심이 더욱 커지게끔 만들었지만,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감사를 표한 뒤 알려준 방향으로 나아갔다.
수백 장을 지나 한 곳에서 모퉁이를 돌자, 곧바로 시야가 넓어지더니,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뜻밖에도 거대한 영전이었는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대강만 추정해 봐도 이 영전의 길이는 적어도 수십 리는 되었다.
그런데 밖에서 보면 골짜기가 크지도 않은데 어찌 이 영전은 이렇게 길어 보이는 것일까?
무슨 수를 쓴 것일까?
영전 안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고 척 봐선 이름도 모를 기이한 꽃과 풀들이 은은한 향기를 뿜어대어 얼굴을 확 덮쳤다.
엽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정신을 차려 보니, 수십 리나 되는 영전은 기묘한 진법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법은 공간을 넓히고 영기를 정화하고 흡수하는 기능도 있기에, 이곳의 영기는 바깥보다 더욱 맑고 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