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화 내식
엽운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곳의 영기는 채집곡 보다 훨씬 진했다.
게다가 연심전의 단광(丹光)의 영향을 받지 않아 숨을 쉴 때마다 맑은 물로 몸을 씻는 듯했다.
“나의 수위는 이미 연체경 4단계인 연장경 절정에 도달했으니, 이어서 연체경 5단계까지 돌파할 수 있다면, 다음 시험에서 8등 안에는 충분히 들 수 있을 거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가 장식품을 약간 훑어보고는 포단 위에 앉았다.
오른손을 뒤집자, 모든 영석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놀랍게도 하품영석을 제외하고도 무려 60여개의 중품영석과 일곱 개의 상품영석이 있었다.
가진 영석의 수는 앞으로 수행의 길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게끔 했다.
“취영진이 있으면 좋았을텐데... 그럼 영기를 빨아들이는 속도를 크게 높일 수 있는데.”
“지금 이 영석들을 손에 쥐고 있자니 보물산에 들어온 것 같군, 그래도 조금씩 천천히 파볼까.”
"이변이 없는 한 반년 정도는 영석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일찍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고서에서 금제진법을 연구하던 고수가 영석을 이용하여 취영진을 배치해 영석 안의 영기를 더욱 빨리 방출시키고 더 나아가 정화시켜 흡수하기 쉽도록 만들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취령진을 배치할 수 있는 대수사는 천검종 전체에서도 그리 많지 않고 천촉봉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엽운은 두 손으로 중품영석 하나를 쥐고 머릿속의 잡념을 떨쳐며 천검종의 기초심법을 천천히 실행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부터 순수한 기운이 천천히 경맥을 따라 팔을 가로질러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바로 이때 종소리와 함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갑자기 그의 숙소 안으로 들려왔다.
“모든 신입 제자들은 3일 후 정오에 연무전 광장으로 모여라."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세 번 울리고 난 후 천천히 흩어져 사라졌다.
엽운은 이제 막 수련을 시작했는데, 별안간 수련이 끊기게 되어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열흘 뒤에 동서전의 신입 제자를 대상으로 시험을 본다고 했으면서 지금은 또 무슨 일로 모이라는 거야?."
이번 시험이 당겨진 것도 그렇고, 갈수록 무언가 조금 이상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3일의 시간은 연체경 5단계의 수위에 오르기엔 분명 부족하지만 엽운은 좌절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았다.
3년 동안 잡역 제자의 수행을 통해 초조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이 급할수록 오히려 더 심경에 안좋은 영향을 끼치고 수행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었다.
열댓 번의 호흡을 한 후,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련을 이어갔다.
흑백 빛의 개조를 거쳐 영기를 받아들이는 속도는 일반 잡역 제자들보다 월등히 빨라졌다.
그래도 중품영석은 현재 수위에 비해 함축 되어있는 영기가 굉장히 컸다.
무려 반나절의 시간을 들여 중품영석 두 개는 그저 조금 어두워졌을 뿐이었다.
엽운은 이 같은 속도에 놀라지 않았다.
일전에 수련할 때도 거의 5일 동안 50여 개의 하품영석을 흡수했는데, 이렇게 계산해보면 중품영석 반개의 영기와 비슷한 양이 된다.
심묵은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영석의 영기를 모두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요사스럽다고 느껴진 것이다.
엽운은 서두르지 않고 수행했다.
영석의 영기는 체내에서 천천히 돌며 영력으로 조금씩 전환되고 흡수되며 정화되었다.
갑자기 가슴의 단중혈에서 희미한 빛 하나가 휙 지나갔는데, 이내 흑백의 빛이 한데 뒤섞여 흩어졌다.
흑과 백은 서로 질서가 있어 조금도 어지럽혀지지 않았다.
순간 몸에 들어온 중품영석의 기운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배출구를 찾아 흑백 빛을 향해 미친 듯이 솟구쳤다.
눈 깜짝할 사이, 체내의 모든 영기가 조금도 남김없이 깨끗이 흡수되었다.
엽운은 깜짝 놀라 통제를 잃었다.
두 손바닥 사이에 있는 중품영석의 영기가 흘러나오는 속도가 더없이 빨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본래 명주실처럼 가늘게 흡수되던 영기가 지금 이 순간 한 줄기 강이 된 듯 그의 경맥을 타고 솟구쳐 올라 흑백 빛을 향해 달려갔다.
흑백의 빛이 한 데 모여, 마치 끝없는 동굴처럼 미친 듯이 영기를 흡수했다.
순식간에 엽운의 손바닥 안에 있던 중품영석이 녹아 가루가 됐다.
엽운은 겁에 질려 전혀 반응을 할 수 없었다.
기초 심법을 쓸 수도 없었다.
손바닥으로부터 온 몸의 모공 곳곳에 몰려드는 영력의 흡수 속도는 심묵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흑백의 빛은 몸에 남아있던 나머지 중품영석의 영기를 스스로 흡수하기 시작해 속도가 느려질 기미가 없었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 중품영석은 끊임없이 녹았다.
이각이 채 안 되는 시간에 무려 60여 개의 중품영석이 재가 되었다.
안에 담긴 영기는 모두 흡수되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흑백의 빛은 마침내 배를 채운 듯, 서서히 단중혈로 되돌아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도대체 이게…”
엽운의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억울함이 몰려왔다.
60개가 넘는 중품영석이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 재산이냐 하면, 그가 반 년 동안 수행하는데 충분한 양이었다.
그런데 지금 모두 사라졌고, 그 속에 담긴 영기를 많이 흡수하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흑백의 빛에서 영기가 솟구쳤다.
순수, 웅장, 깨끗, 간결.
엽운의 머릿속엔 순간 이 여덟 글자가 떠올랐다.
그것은 그가 순간 느낀 감정이었다.
세상에 이런 영기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순수란, 말 그대로 안에 담겨있는 영기가 얼마나 높은 순도를 지녔는지 느껴졌다.
웅장이란, 이 영기가 가진 힘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거대하다는 말이다.
깨끗함은 이 영기 속에 조금의 불순물도 없다는 것이고 간단함이란 엽운이 이를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영력은 경지의 제한을 전혀 받지 않고 얼마든지 흡수하고 정화할 수 있었다.
엽운은 멍하니 있었다.
그의 몸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 영기를 받아들였다.
이 영기를 눈앞에 둔 그의 몸은 마치 탐욕적인 괴물이 된 것 같았다.
전혀 반응하지 않았지만 기초 심법이 이미 저절로 실행되고 있었다.
설령 더 높은 경지의 수행자라 하더라도, 영기를 흡수하여 정화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고 또 정화의 과정중 약간의 손실이 생겨 영기가 몸 안에서 흩어져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영기는 이미 정련된 것처럼, 마치 엽운이 원래 지니고 있던 영력처럼 그의 몸 곳곳으로 밀려들었고, 그의 영력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럴수가!”
엽운은 깊은 충격에 몸이 굳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릿속은 점점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연기경에 달한 제자의 위압을 마주한다면, 어쩌면 흑백 빛의 도움 없이도 한두 명쯤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마저 하고 있었다.
지금의 경지로 연기경 제자의 위압을 막아낼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암석이 쌓인 담벼락 위에 개미 두 마리가 기어가는 것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 중 앞에 있는 한 마리는 잎사귀도 하나 끌고 가고 있었다.
좌측에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결코 청각을 방해하지 못했다.
가짜 산 위의 한 마리 새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그의 귀에 떨어졌다.
하늘에서는 조금씩 영기가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그의 호흡을 따라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천지의 영기는 내식경에 달하기 전까지는 그대로 흡수하거나 정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천지의 영기가 체내로 들어왔고, 흑백 빛의 도움 없이도 이를 느낄 수 있었다.
천지의 영기가 체내에서 한 번 순환 후 곧 바로 조금씩 흡수했다.
비록 효율이 그리 좋지는 않다만, 거의 흡수하지 못했던 이전과 비교하자면 큰 차이가 있었다.
별안간 엽운은 입과 코로 숨을 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에 입이 있는 것처럼 온몸의 땀구멍을 통해 천지와 소통할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천지의 기운이 모공에서부터 몸으로 파고 들어, 기초심법의 작동에 따라 육신을 보양하고 경맥을 넓혔다.
“쾅!”
영혼 깊은 곳에서 나는 커다란 소리를 들었다.
이내 흑백 빛이 뱉어낸 영력은 순식간에 매우 깨끗이 흡수되었고, 사방의 영기는 주인을 찾은 듯 모공을 향해 쏟아지듯 들어왔다.
몸을 중심으로 주변 백 장 안에서는 새와 벌레가 울며 맑은 바람이 불어왔고, 화초가 미세하게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이 전부 다 그의 귀, 그의 눈, 그의 마음속에 존재했다.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마음속에서 일어나 말로 다 할 수는 없었지만 또렷하게 느껴졌다.
내식경, 이것이 바로 연체경의 5단계인 내식경이었다.
엽운은 미친듯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