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화 혈제
"아무리 급하게 내려가려 했다지만, 이리도 경솔할 수가 있나."
엽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음속으로 불가사의함을 직감하였다.
이때 몸 속 흑백의 빛이 다시 한번 빛나 자신도 모르게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반응했다
‘이 금단의 기운은 사람들의 마음에 위압감을 줄 뿐 아니라 분명 환상도 불러일으키는 거야!’
다른 이들은 분명 금단 단기에 의해 정신이 흐트러졌지만, 그는 흑백 빛의 흐름이 있기에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무언가 음험한 느낌이 그의 마음에서 다시금 솟아나 체내에 퍼져 나갔다.
또다시 여러 제자들이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 운해를 향해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곧바로 아래쪽의 깊은 물 위로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자들 중 누구도 구조되지 못하고, 실제로 바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같은 시험의 가혹함은, 만약에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거나 혹은 흑백 빛의 비밀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을 것임을 다시금 일깨워줬다.
잡역 제자들과 시험을 받는 제자들을 대하는 장로들의 태도를 떠올려보니 자신이 그들과 동등해지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보물을 갖고 있는 것이 발각되면 가차없이 죽임을 당하고, 보물은 빼앗길 것이다.
엽운은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곧 한 줄기 휘황찬란한 빛을 보았는데, 그 휘황찬란한 빛이 운해에서 뛰어오르자 교차하는 강력한 흡입력이 완전히 힘을 잃은 듯했고, 그 무엇도 휘황찬란한 빛을 막지 못했다.
“군약란!”
엽운은 그것이 보라색 혈맥을 받아낸 천부적인 재능의 소녀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소용돌이의 흡입력을 완전히 막아내며 허공에서 한 걸음 씩 걸어 내려갔다.
소용돌이는 그녀를 방해하기는 커녕 마치 돌계단처럼 군약란을 순조롭게 내려주었다.
그녀의 옷자락이 나풀거렸고 그 자태는 몹시 아름다웠다.
순식간에 군약란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자신과 군약란과의 영맥 재능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금갑천장을 이길 수는 없을텐데, 뭐 어쩌겠어?”
이러한 생각은 엽운에게 두려움을 잊게 하고 오히려 강한 승부욕과 반항심을 주었다.
‘비록 내가 하찮은 존재고 너희가 신성한 존재일지라도, 나는 너희들을 물어 피를 볼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마음대로 죽이는걸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다!’
손가락을 칼처럼 펴서 절벽을 향해 세게 꽂았다.
찬란한 금빛을 머금은 건너편의 비석이 그의 심기일전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비석은 적의를 내뿜기는커녕 오히려 칭찬하듯이 금빛을 토해내 양 절벽의 암벽 안으로 떨어뜨렸다.
훅!
단단한 암벽에 어찌 쉽사리 손을 끼워 넣을 수 있겠는가.
비록 파편이 약간 튀었지만, 손가락 자국이 생긴 게 전부였다.
그러나 엽운은 멈추지 않고 매섭게 또 한 번 손을 날렸고 그의 손끝에서 피가 흘러나와 암벽 위의 손가락 자국 위에 떨어졌다.
그러자 손가락 자국 안쪽에 있던 바위가 부드러워진 듯, 엽운의 손을 따라 그대로 손바닥의 반을 집어 삼켰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엽운은 어리둥절했다.
손에 전해오는 말랑함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고, 별안간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엽운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잡역 제자들이 장검, 비수 등의 무기로 암벽에 구멍을 뚫으려 하는 것을 보았는데 불꽃과 맑은 소리만이 울릴 뿐 약간의 흠집조차 보이지 않았다.
엽운은 자신의 왼손을 한 번 보고, 또 아래 제자들이 들고 있는 병기를 한 번 보자, 문득 머릿속이 맑아졌다.
“설마 이건가?”
엽운은 손가락을 살짝 흔들자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흘러나와 딱딱한 바위에 얼룩덜룩 떨어졌다.
곧이어 피로 얼룩진 바위가 물러져 손가락이 그 속으로 살짝 들어가더니 몸을 단단히 고정시켜서 운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흡입력을 막을 수 있었다.
엽운은 이 절벽에 도대체 어떻게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는 몰랐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시험에 참여한 대부분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몸에 지닌 가장 단단한 물건으로 암벽을 뚫어 운해의 흡입력을 막아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시련에 참여한 제자들이 자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들이라고 생각한 엽운은 망설이지 않고 소리쳤다.
"자신의 피를 암벽에 바르면 암벽이 물러진다!"
그의 목소리가 아랫 쪽을 향해 메아리쳤다.
그러나 상대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그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병기를 암벽에 아무리 찔러봐도 작은 점하나 안 생기는데, 하물며 피와 살을 가지고 되겠는가?
피를 암벽에 바르면, 암벽이 물러진다고?
이 작자는 일부러 잡역 제자 몇 명을 더 떨어뜨려 자신이 통과할 확률을 높이려는 속셈일 것이다.
대부분의 잡역 제자들은 이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엽운의 말은 전혀 신빙성이 없었다.
그러나, 몇몇 제자는 한번 시도나 해보자는 심산으로 손바닥을 베어 암벽에 피를 뿌렸다.
그러자 그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타났다.
손바닥이 암벽에 깊게 박혀 그들의 몸을 암벽에 쉽게 고정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짜였다니.”
모두 어리둥절해 하더니 곧 크게 기뻐하였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어렴풋이 엽운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눈에서 모두 감사의 빛이 솟아났다.
바닥과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흡입력도 더욱 강력해졌다.
엽운이 암벽의 비밀을 발견하지 못 했다면, 이 흡입력을 당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생명을 구해 준 큰 은인이었다.
샤샤샥!
세 명의 잡역 제자가 엄청난 흡입력을 견디지 못하고 엽운의 머리 위를 지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너희들은 왜 날 못 믿는거냐? 피다, 자신의 피를 암벽에 바르면, 안전하게 아래까지 갈 수 있다고!"
엽운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한 번 일러주었다.
"이 자식, 개소리 하지마라. 우리 힘을 빼놓으려고 일부러 그러는거지? 정말이지 음흉한 속셈이구나."
윗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는 조소가 가득했다.
그는 마치 엽운이 생각하는 바를 꿰뚫어 보았다는 듯 만족스러워 하며 지껄였다.
“맞아, 분명히 그럴거야.”
“내가 보기에 그리 좋은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우리가 죽이는 게 낫겠다, 어차피 여기서 죽이는 건 아무 문제없잖아.”
"좋아, 바닥까지 내려가면 죽여 버리겠어. 저놈이랑 나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마."
엽운은 고개를 들어 안타까운 눈초리로 몇 사람의 얼굴을 훑어본 뒤 속도를 높여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까지 엽운을 비웃던 자들은 숨 몇번 쉬는 사이에 엄청난 흡입력을 견디지 못하고 곧장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엽운은 천천히 기어 내려가 두 발을 땅에 딛는 순간 편안한 마음으로 숨을 내쉬었다.
머리 위 10장 너머에는 맹렬한 흡입력이 없는 곳이 없었고, 고작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은 곧바로 빨려 들어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러나 바닥에서는 그 흡입력의 반도 느껴지지 않았고, 회오리바람은 마치 땅 위로 우뚝 솟은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생겨난 소용돌이는 아름다운 은하수처럼 멀리서 보니 화려하게 빛났다.
주위의 바닥에는 피와 사지가 도처에 깔려있는데, 매우 참혹했다.
“천검종 잡역 골짜기에서의 생활은 사람을 참 이기적으로 만들지. 이런 순간에도 나를 믿지 않기로 하다니.”
엽운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속의 기쁨이 사라지고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사형, 정말 감사합니다!”
엽운이 넋이 나간 채로 위쪽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는 동안 한 목소리가 옆쪽에서 들려왔다.
한 제자가 두 손에 피를 가득 묻히고 서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팠지만 그의 얼굴엔 오히려 웃음과 기쁨이 가득했다.
“그래도 너는 나를 믿어줬구나.”
엽운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는, 나중에 반드시 배로 갚겠습니다. 우리가 이 연심전의 시험을 통과하여 비석 뒤의 출구에서 만날 수 있길 바라 겠습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땅을 보자 마음이 무거워져 엽운에게 손을 흔들곤 앞쪽 절벽을 향해 떠났다.
엽운은 그를 눈으로 배웅하고, 맞은편의 절벽을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반쯤 왔을 뿐이고 아직도 한참 더 올라가야 하는데, 맞은편 절벽에는 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