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화 연기
“멈추세요, 진사형 멈추세요!”
풋풋한 소녀의 목소리가 엽운 뒷 쪽 숲속에서 들려왔다.
“진천한, 멋대로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위풍당당하시군요!”
곧이어 날카로운 화살처럼 하늘을 찌르는 목소리도 들려왔는데 다가갈 수 없을 만큼 차갑게 느껴졌다.
순간 주위 수십 장 안의 공기가 마치 흐름을 멈추는 듯하더니 싸늘한 냉기가 뿌려져 기온이 뚝 떨어졌다.
곧이어 두 사람의 그림자가 숲속에서 나타났다.
열두 살 가량 된 소녀는 오밀조밀하고 청초한 얼굴이 훗날 경국지색이 될 용모였는데, 반짝이는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소녀 뒤에는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있었는데, 날씬한 몸매에 아무런 장식 없이 옅은 파란색 끈이 허리에 묶여 있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폭포같이 떨어져 내려온 검은 머리칼은 허리까지 길렀고 마찬가지로 아무 장식 없이 연한 파란색의 끈만이 묶여있었다.
여자가 천천히 걸어오자 발을 디딜 때마다 사방의 기온이 조금씩 낮아지는 것 같았다.
진천한의 입가에 보이지 않는 한기가 스치며 담담하게 말했다.
"두 사매들이었구나. 할 말이라도 있느냐?"
흰 치마 여인의 고운 눈망울에 한 가닥의 조롱이 스쳤다.
“저 잡역 제자가 유옥과 결투를 시작할 때부터 보고 있었는데, 사형께서 공정하게 처리했다고 말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맞습니다, 진천한님 어서 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희 사저께서 노하셔 끝까지 책임을 물게 될 것입니다.”
소녀는 고개를 끄떡이며 곁눈질로 엽운에게 눈을 찡긋하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소음설, 소령, 너희들 정녕 이 일에 끼어들 샘이냐?”
진천한이 콧방귀를 끼며 천천히 말했다.
"오늘일은 분명히 사형께서 잘못하셨는데 어찌 이 잡역제자를 벌하려 하십니까?"
소령은 양손을 허리에 걸치곤 생때를 부렸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들뜬 모습으로 진천한의 소매를 붙잡으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진천한 선배님,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실까? 평소엔 이러지 않으시면서. 저 둘은 그냥 풀어주세요~ 네?”
진천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엽운을 산문 밖으로 내쫓기는 어렵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만약 사형이 끝까지 그럴 샘이라면, 저는 즉시 결투를 신청해 사형께 도전할 것입니다.”
소음설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협박하는 것이냐?”
진천한의 눈에 갑자기 서리가 번쩍거렸다,
”문내에서 겨루기가 있을 때 기회가 오겠지.”
이 말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 가 버렸다.
팽팽하게 조여있던 엽운의 몸이 편안해졌지만 땀방울이 순식간에 등을 적셨다.
비록 방금 전 진천한과 싸울 생각이긴 했으나 이 두 명의 여 수련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오늘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천한 정도의 수위라면, 마음만 먹으면 기를 쏘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정체가 뭐지?"
그는 진천한이 이 두 사람의 수위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신분조차 껄끄러워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언니, 저 사람은 언니를 못 이길 걸 뻔히 알면서도, 막무가내라니까요.”
소령 역시 진천한이 이렇게 쉽게 물러서리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리며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였다.
소음설은 먼 곳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차갑게 말했다.
“가자.”
“응”
소령은 엽운을 다시 쳐다보고는 펄쩍펄쩍 뛰면서 따라갔다.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은 오히려 엽운을 멍하게 만들어 감사의 말을 전할 기회조차 없었다.
“언니, 오늘따라 진천한이 왜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 했을까?”
"생각하기도 귀찮지만, 그는 저 잡역제자를 죽일 마음을 먹었던 모양이야."
“에?”
두 여인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멀어져 있는 듯 없는 듯 그윽한 향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누구도 이런 결말이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많은 잡역 제자들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한동안 꿈을 꾸듯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유옥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고 온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그도 이런 결말을 믿을 수 없는 듯 멍하니 있었다.
“진천한이 이렇게 그냥 가버렸다고?”
저 두 여자가 쪼아대니 물러나버렸다.
‘저 두 여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어찌 엽운을 위해 나선 것일까?
순간, 유옥은 마음속에서 싸늘한 기운이 솟아 윗도리가 차가워지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 엽운이 그녀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엽운에게 맞서는것은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꼴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조금 전 엽운의 주먹을 설명할 수 있는데, 그 믿을 수 없는 힘은 절대 연체경 4단계의 몸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정말 이 생각이 맞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 아닌가?
온몸의 아픔을 잊은 유옥은 이내 몸이 으슬으슬해졌다.
유옥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지금 그는 엽운이 자신의 존재를 잊기만을 바라며 빨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엽사형.”
먼저 심묵이 기쁘게 소리쳤다.
좀 전에는 그도 충분한 용기를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온몸에 힘이 빠지고 두 다리도 풀려 땅에 넘어지고 말았다.
엽운은 몸을 돌려, 일어서는 심묵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심묵, 고맙다.”
심묵의 눈가가 별안간 조금 붉어졌다.
엽운은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유옥은 몰래 떠났지만, 사실 엽운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천촉봉의 제자씩이나 되어서 영력은 자신보다도 떨어지고, 하품 영기인 흑요검을 들고서도 당해내질 못했으니, 이런 사람은 이제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진정한 위협은 진천한 같은 존재였다.
연기경
조금 전 진천한의 경지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며 한 줄기 차가운 빛을 내뿜었다.
최초의 수선자는 연기사라고 불리었는데, 연기경에 달하여 비로소 입당해 수선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연기경을 수행하는 공법은 대외적으로는 전혀 없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우선 천촉봉의 외문 제자 시험을 통과하고 먼저 외문 제자가 되어야만 장래에 연기경의 경지에 오르고 내산 제봉에 들어가 내문 제자가 되고, 더 나아가 정예 제자가 되고 또 심지어 수제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엽운은 이런 신분에 예전처럼 집착하지는 않았지만, 예전보다 더욱 절실하게 수위와 힘이 갖고 싶어졌다.
천검종 외문 제자 시험은 이제 불과 십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 미루어 볼 때에는 시험을 통과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외문 제자의 시험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 매번 같다는 보장도 없고, 또 수위가 충분한 경지에 올랐다고 해서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험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모르는 이상 계속 수위를 강화하고 경지를 높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엽운 역시 수련할 시간이 필요했다.
유옥과의 싸움에서 쉽게 이길 줄 알았지만, 몸 속 흑백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쉽게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흑백의 빛이 도대체 어떤 보물인지 아는 것이 없고, 여러 번 그 속의 비밀을 캐보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흑백 빛의 신비한 효과는 늘 수동적이어서 그의 통제가 먹히지 않았다.
아니, 반드시 흑백 빛의 비밀을 찾아내야 했다.
"엽사형, 외문 제자 시험이 코앞에 다가왔네요. 꼭 외문 제자가 되십시오."
심묵의 목소리가 엽운의 생각을 멈추었다.
엽운은 고개를 돌렸다.
심묵의 눈빛만 봐도 자신을 생각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천촉봉을 비롯한 제봉의 제자가 되어 윗분의 사숙들과 심지어 장로들과도 관계를 맺게 되면 더더욱 앞날이 보장될 것이다.
엽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너도 마찬가지다."
심묵은 어리둥절했다.
“저요?”
“이 영석을 너에게 줄게.”
엽운이 손바닥을 뒤집자 그의 손에 중품영석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