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77화 중국? 없애버리면 되지(22) >
다이로가 재준을 향해 걸어오자 재준은 빙글 웃었다.
“그렇지, 지금 네가 나타날 타이밍이지.”
“어? 왜? 내가 또 적당한 시기에 나타난 건가?”
“그래,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행차하셨지?”
다이로가 앤서니를 힐끔 보고 말했다.
“‘엘리’는 우리가 계속 운영하는 게 어떨까 해서.”
“‘엘리’?”
“왜? 안 되는 건가?”
큭큭큭큭큭큭.
재준이 손가락으로 다이로를 가리키며 웃었다.
“재밌네. 재밌어. 가져,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다면, 이라니?”
“다이로, 다이로. 이 멍청한 놈아.”
“뭐?”
“아니지, 모두 멍청했지. 너만 그런 건 아니지.”
큭큭큭큭큭.
“뭐야? 날 또 놀리는 거야?”
철컥.
다이로가 총을 꺼내 슬라이드를 잡아당겼다.
“이봐, 멍청이. 그렇게 당하고도 총을 나한테 겨누는 거야? 또 환상에 사로잡혀 에로댄스라도 추게 해줄까? 아닌가? 러시아 군인들이 추는 코사크가 더 나을까? 알지? 이렇게 팔짱을 끼로 앉아서 다리를 앞으로 내미는 거.”
다이로가 흠칫 놀라며 제이콥을 바라봤다.
제이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중해라, 다이로.
다시 한번 경험하고 싶지 않다.
“다이로, 내가 하나만 알려줄게. ‘엘리’는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블랙’이 만든 허상이야. 뭐, 엘리자베스든 ‘블랙’이든 상관은 없지만.”
“그래서?”
“문제는 한동안 ‘블랙’이 활동을 못 한다는 거지.”
“뭐?”
“그러니까, 콘택트폰 생산도 중단되고 중국 서버도 중단되는 거야. 너희가 할 일이 없어졌어. 이제 백수야, 백수. 실업자.”
임재준!
다이로가 두 눈에 불꽃을 튀기며 재준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다이로!
제이콥이 오히려 다이로에게 총을 겨누었다.
“총 내려놔. 두 번은 안 돼.”
다이로가 제이콥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봤다.
“제기랄, fuck, fuck.”
큭큭큭큭.
재준이 너무 재밌다는 듯 웃었다.
‘블랙’이 없으면 가상현실도 없는 건데.
역시 경험이란 게 무섭긴 무서워.
“자, 이제 내가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해줄게.”
다이로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재준을 노려봤다.
“뭔데?”
“자, 이제 세계는 주인이 없게 되었어. 미국은 패권을 얘기하기에 피해가 너무 크고, 유럽은 허, 알지? 그냥 쑥대밭이야.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시아는 방사능에 쩔어서 왕따가 됐는데.”
“그게 뭐?”
“지도자가 없네?”
“뭐?”
“이런 세기말적 상황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잖아. 근데 여기 우리의 4총사가 버젓이 각 대륙을 대표하게 생겼네. 다이로는 남미, 앤서니는 유럽, 위쉬안은 아시아, 제이콥은 북미. 어때, 세계를 나누어 가지고 잘살아 볼 의향은 있나?”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라니, 생존자들을 모아서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야 하잖아. 이 좋은 기회를 누가 휙 낚아채 가면 안 되지 않겠어?”
“임재준, 너는……. 정말…….”
“우린 저기 위. 보이지?”
재준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 위에서 새로운 문명을 개척할 거야. 그러니까 너희는 아래에서 지금까지 이어 온 역사를 계속 써.”
“우리보고 방사능에 오염돼서 죽으라는 소리잖아?”
“너, 바보니? 누가 방사능에 노출된다고 죽는데?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는 거야. 다음 세대에서 아주 괴상한 놈들이 나오겠지. 대륙의 주인이 되는 건데 그 정도는 감수해도 되지 않을까?”
다이로가 재준을 향해 싱겁게 웃었다.
“우리를 저 위로 데리고 올라가진 않겠지?”
재준이 손을 까딱였다.
“당연한 말을. 우리도 편하게 사는 날이 있어야지. 언제까지 서로 언제 죽일까 고민하면서 살래? 남은 목숨 편하게 좀 살자. 응?”
다이로는 제이콥, 앤서니, 위쉬안을 차례로 돌아봤다.
“제이콥, 나랑 남미로 가자.”
풋.
제이콥이 다이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이로, 우린 여기까지가 맞아. 난 북미로 갈 거야.”
제이콥이 앤서니를 봤다.
“제 고향은 러시아입니다. 전 러시아로 가겠습니다.”
큭큭큭.
위쉬안이 웃었다.
“다들 이런 분위기네. 그럼 내가 아시아를 맡지. 아무래도 내가 제일 유리한 것 같은데.”
“중국은 어쩌려고?”
“중국? 없애버리면 되지. 아직 ‘엘리’를 추정하는 세력들이 많거든. 다이로, 그냥 나와 함께 중국에 남는 게 어때?”
“미친놈. 그럼 남미를 누군가 먹게 내버려 두자고? 그렇게는 안 되지.”
다이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아디오스 아미고.”
저벅, 저벅, 저벅.
다이로가 손을 흔들며 헬기를 향해 걸어갔다.
위쉬안이 모여 있는 대중을 향해 걸어갔다.
앤서니와 제이콥이 재준을 한 번 보고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재준이 이 황당한 장면을 보고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
“미친놈들.”
진짜 자신들이 대륙의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짜 인간은 변하지 않는구나.
어쩌면 ‘블랙’이 맞을지도 모르겠네.
아니, 인공지능이니까 정확한 경우를 따져서 최선의 선택을 했겠지.
진짜 내가 없었으면 인류는 멸망했을 거 같은데.
“아빠.”
“어, 진.”
“우리도 가요. 우리도 할 일이 많아요. 우선 엄마 몸을 만들어야 해요.”
엘리자베스…….
그래, 우리도 할 일이 있지.
***
일 년 후.
재준은 태평양 한가운데 건설한 공중 건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상으로부터 50km 높이의 성층권에서.
참 신기하단 말이야.
이렇게 멀리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이 평화로워 보이는데.
지구라는 땅덩어리에서는 여전히 아귀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 4총사가 잘하겠지.
다이로, 제이콥, 앤서니, 위쉬안, 너희만 믿는다.
개고생 좀 해라.
“보스.”
윌켄이 흥분된 톤으로 재준을 부르며 다가왔다.
“왔어요?”
“펠그리니가 인공지능을 좀 더 보완했어요. 이제 한시름 놨습니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그동안 공중 건물과 공중 도시는 각각의 시스템으로 관리되었다.
이제 하나의 시스템으로 서로 연결되어 상호보완적인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보스, ‘블랙’은 소멸한 겁니까?”
“글쎄요. 딱 눈에 보이는 결말이 있으면 좋겠는데 신호니 파동이니 하는 것들이 보여야 말이죠.”
“보스, 궁금해서 그러는데.”
“뭐가요?”
“만약 ‘블랙’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것도 글쎄요.”
재준은 말을 얼버무려버렸다.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이미 지나버린 과거가 되었는데.
그래도 만약에 ‘블랙’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면 인간이 다른 종에게 했던 일을 인간이 그대로 당했겠지.
사육되고 재배되는 종으로.
“우리 4총사는 어때요?”
“다이로는 역시 다이로입니다. 콜롬비아 전체를 마약 합법 지역으로 만들었어요.”
‘블랙’이 사라지고 ‘드럭리걸 존’은 가동을 멈췄다.
하지만 다이로는 인공지능이 하던 일을 수동으로 바꾸고 서빙 로봇 또한 인간으로 대체했다.
놀라운 것은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며 전 세계의 마약 중독자들을 콜롬비아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말하라면 콜롬비아라고 대답할 수 있다.
앤서니는 러시아를 거쳐 프랑스에 자리를 잡았다.
마약과 다르게 ‘기억의 길’ 신도들은 프랑스로 모여들어 거대한 공동체를 만들었다.
캡슐이 없어 ‘커뮤니티 서밋’은 사라졌지만, 오프라인에서 그 체제를 그대로 만들었다.
투마로우가 아프리카에서 했던 대로 소규모 단위로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도우며 살아갔다.
위쉬안은 중앙판공청의 서버를 장악하고 중국 공장들을 돌렸다.
다행인 건 투마로우의 로봇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통신 시스템을 알아냈다.
이제 로봇은 중국에서 위쉬안에 의해 만들어져 전 세계에 보급되고 있었다.
제이콥은 텅 빈 북미 대륙을 곡창 지대로 만들었다.
세계 경제를 장악하던 실리콘밸리와 정치적 지배의 야욕에 불타던 워싱턴은 인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공허한 땅이 되었다.
이제 미국과 캐나다는 비옥한 옥토에서 대규모의 곡물을 재배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여기도 다행인 것은 제이콥이 곡물로 부를 축적할 마음이 없었다.
지구의 대지에 사는 사람들은 큰 교훈을 얻었다.
자산의 중앙집권화는 지배와 복종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재준은 윌켄과 걸으며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덧 진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저씨 왔어요?”
엘리자베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또, 또, 열심히 연구하는 애를 건드리고 있네.”
“아니에요. 지나가다 잠시 들른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안드로이드 몸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진의 작품이다.
어쩌면 우리 중에 가장 먼치킨이지 않을까 싶다.
안드로이드 육체를 벗어나 전자 신호 형태로 인터넷망을 돌아다닐 수도 있고 안드로이드 육체로 인해 늙지도 않고 병도 걸리지 않으며 힘으로 따져도 성인 남성의 다섯 배에 가깝다.
그리고 감정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그게 방해하는 거야.”
“그런 아저씨는 왜 여기에 들른 건데요? 이것도 진을 방해하는 거예요.”
“아니지, 난 업무차 들른 거고, 넌 놀러 온 거잖아.”
“나도 업무차 들른 건데요?”
“무슨 업무?”
아, 아, 아.
진이 시끄러운지 소리를 질렀다.
“왜 여기서 매일 싸우시는 거예요? 두 분이 똑같아요. 왜 같은 시간대에 오셔서 그러냐고요. 이럴 거면 둘이 데이트를 하세요.”
뭐?
뭐?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 없어요. 어차피 내가 아들이고 두 분이 부모잖아요.”
허.
재준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숨을 내뱉었다.
“엘리자베스랑 나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알아?”
“15년이잖아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속담이 있어. 15년이면 엄청 큰 차이야.”
“꼰대.”
“뭐? 뭐? 뭐, 꼰대?”
“차라리 이번에 아빠도 안드로이드로 갈아타시죠. 괜히 엄마가 부러워서 그러는 것 같은데.”
아, 아, 아, 뒷목.
재준이 목덜미를 잡았다.
“할아버지한테 가보세요.”
헉, 정곡을 찌르다니.
“알았어, 알았어, 나, 간다.”
“엄마도 나가세요. 저 웜홀 연구해야 해요.”
흥.
“알았어. 갈 거야. 좀 똑똑하다고 생색은…….”
엘리자베스가 후다닥 재준과 팔짱을 끼고 걸어갔다.
“아저씨, 우리 오늘은 뭐 하고 놀죠?”
“할아버지한테 가야지.”
“지금 두 분이 바둑을 두고 있잖아요. 오늘까지 97패째를 기록하고 있어요.”
“그러게 아무리 두 분이 머리를 맞대도 AI한테는 안 된다니까 그러네.”
엘리자베스의 카킬과 재준의 임병달은 매일 AI와 바둑을 두었다.
“죽기 전에는 꼭 한 번 인간이 이기는 걸 봐야 한대요.”
“아니, 당신들이 무슨 이세돌이야? 꼭 이기는 걸 보게?”
“그러니까요, 내가 좀 도와준다고 했는데, 글쎄, 나보고 인공지능 도움은 필요 없다고 말하더라니까요.”
“뭐? 널 몰라도 한참 모르시는구나.”
“그쵸.”
“그러게, 우리 엘리자베스가 능력은 있어도 머리는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닌데.”
“뭐라고요?”
아, 아, 야, 주먹으로 치지 말라고.
너 안드로이드야.
재준과 엘리자베스가 멀어지자,
혼자 남겨진 윌켄이 피식 웃었다.
보스, 후후.
이제 그 모습 그대로 좀 쉬어도 될 것 같은데.
그동안 너무 달리기만 했어요.
윌켄이 창밖을 바라봤다.
여기는 지상 50km 높이의 성층권.
창밖으로 우주가 보인다.
그동안 함께해 주신 독자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제477화 중국? 없애버리면 되지(22) > 끝
ⓒ 번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