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76화 중국? 없애버리면 되지(21) >
진은 하얀 제복을 따라 실험실에 도착했다.
중앙에 넓은 공간을 두고 양옆으로 수십 개의 작은 방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방 안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실험실이구나.
각 실험실에서는 전선 굵기의 로봇 팔이 여러 생명체를 실험 중이었다.
징, 징, 징.
진은 로봇 팔을 유심히 살펴봤다.
어라, 이건…….
상당히 진보한 형태의 로봇이다.
자유롭고 정교하며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근데 저거 내가 아직 설계만 했을 뿐인데.
“흥미롭지?”
진이 실험실 로봇 팔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금발 여자아이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인간이라고 하기에 너무 자연스러운 움직임.
“흥미롭네.”
“나도 이 실험실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해. 뱅가모에서 만든 유전자 변이 보다 훨씬 앞선 작품이거든.”
“아니, 난 네가 흥미로워. 관절의 움직임이 훨씬 부드러운데. 조인트를 3개 이상 사용했나 보네.”
“아, 이거?”
금발 여자아이는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려 관절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네가 만든 건 조인트 3개와 스프링을 이용한 거지만 이건 조인트만 7개를 사용하고 스프링 대신 공기압을 이용한 거야. 네가 보기에도 훨씬 부드럽지?”
당연히 부드럽지.
누가 설계한 건데.
“‘블랙’, 그건 내 아이디어 같은데.”
“호호호, 맞아. 하지만 넌 조인트의 소재를 찾지 못해서 아직 실현을 못 했잖아. 내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재를 시뮬레이션해 보고 찾아냈어.”
“그 소재 인간의 뼈잖아.”
“어? 알고 있었어?”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소재는 찾아봐야 소용없어.”
“호호호, 그런가?”
흥미를 잃은 표정인 진이 실험실 앞으로 걸어갔다.
푸른색의 식물이 갈색으로 변하면서 생기를 잃고 쓰러진 직후.
로봇 팔이 무언가를 주사하자 다시 푸르르게 줄기가 일어났다.
“나노봇이구나.”
“역시 진은 모르는 게 없구나.”
어느새 진의 옆으로 금발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진이 실험실을 죽 훑어봤다.
바로 옆의 실험실에서는 기름으로 얼룩진 물 위에 무언가를 떨어뜨리자 기름이 분해되며 맑은 물로 바뀌었다.
그 옆 실험실에서는 뿌연 연기로 뒤덮인 공기가 중앙에서부터 맑은 공기로 바뀌었다.
“전부 나노봇이네.”
“나노봇은 무엇이든 변화시킬 수 있지.”
“방사능도 가능해?”
“연구 중.”
진이 어느 정도 걸어가서 검은 물질로 가려진 실험실 앞에 섰다.
안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긴 인간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곳이네.”
“보고 싶어?”
“아니, 뻔하잖아. 분명 괴물을 만들었을 텐데.”
호호호호.
“괴물이 괴물을 싫어하는 거야?”
진은 대답하지 않고 실험실을 따라 걸었다.
금발 여자아이는 종종 걸으면서 따라붙었다.
“너 죽어가잖아.”
진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데?”
“살고 싶지 않아?”
“네 방법은 아니야. 더 괴물이 될 거야.”
“머리도 좋고 육체는 더 좋은 괴물이면 아주 좋은 거 아냐? 몸이 막 부서져도 금방 다시 재생된다니까.”
호들갑을 떠는 금방 여자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진짜 아이같이 말하네.”
“딥러닝의 효과지. 요즘 챗봇은 딥러닝으로 진짜 인간하고 구별이 어렵잖아.”
조잘거리는 금방 여자아이를 진은 아무 말도 없이 지나쳤다.
마지막 실험실을 지나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여긴 뭐가 있지?”
“미래.”
진은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걸었다.
“궁금하지 않아?”
“머리도 좋고 육체도 좋은 내가 여러 명인 건 별로.”
호호호호.
“어떻게 알았을까?”
“과학의 마지막은 생명을 창조하는 거잖아. 그럼 네가 창조하고 싶은 인간은 누굴까?”
호호호호.
“맞아. 바로 너지.”
진이 피식 웃었다.
“‘블랙’, 이제 뭘 하려는지 말해 봐.”
“그럴까?”
금발 여자아이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징.
공중 건물이 건축되는 현장이 홀로그램 영상으로 떴다.
하늘에서 내려온 케이블들 사이로 합금들이 얼기설기 엮이면서, 새까맣게 달라붙은 로봇들이 쉴 새 없이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을 공중에서 만들어내고 있었다.
“공중 건물은 왜 보여주는 거야?”
“저 건물에는 살아남은 인간들을 가두어 놓을 거야.”
“오염된 땅으로부터 보호하는 게 아니라 가두어 놓는다고?”
“인간의 개념으로는 방사능이나 나노봇은 오염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너도 알잖아. 저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이 진정한 신인류가 되는 거야. 특이점 이후로 인간의 존재는 쓸모가 없게 돼. 더 강한 유전인자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어.”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연변이를 만들겠다는 거네. 아니면 다른 종을 지배종으로 삼든가.”
“그렇지. 그래서 난 식물부터 동물까지 다양한 실험을 해 봤어. 방사능도 나노봇도 이겨낼 수 있는 종. 기존의 인류를 대체할 수 있는 생명체는 반드시 나타날 거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넌 생명체가 아니잖아. 뭐하러 돌연변이를 만들겠다는 거지? 차라리 안드로이드를 만들어. 그게 방사능도 나노봇도 이기는 방법이야.”
“아, 당연히 안드로이드도 만들 거야. 서로 도우며 살아가게 될 거고.”
“그럼, 공중 건물과 공중 도시에 사는 인간은 뭐지? 단지 열등한 종족을 몰아넣은 창고인가?”
창고?
호호호호.
“창고. 좋은 표현이야. 하지만 좀 더 정확한 표현이 있지.”
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말 창고구나?”
“창고보다는 식량 공장.”
식량 공장?
공장에서 일하는 건 누구일지 뻔하잖아.
“인간을 노예로 부리려고?”
“지금까지 로봇이 인간을 대신해 일을 했잖아. 하지만 아무 진전이 없어. 그렇다면 반대로 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실험 아닐까? 혹시 알아? 지구가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뀔지?”
실험.
인간이 많이 하는 거지.
단지 인간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제 인간은 잉여물이 되어 이런 취급을 받는 세상이 되는 건가.
그래도 아직은 실험 대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금발 여자아이가 진의 얼굴에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대었다.
“진, 그리고 재미있는 게 또 있는데.”
“재미없는 게 아직도 남은 거야?”
“이걸 봐.”
금발 여자아이가 손바닥을 오목하게 말자 그 안에 홀로그램이 떴다.
우주 공간에서 두 개의 소용돌이를 이어주는 하나의 통로.
“웜홀이야.”
진이 홀로그램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블랙홀과 블랙홀을 연결하고 있네. 이걸 이용하겠다는 거야?”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어.”
“시간 여행?”
“흥미롭지.”
“육체가 갈 수는 없을 테고, 혹시 마인드업로딩한 데이터를 이용하려는 거야?”
“맞아. 어때? 해보고 싶지 않아.”
큭큭큭.
진이 하찮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내가 웜홀에서 소멸하게 하든가, 성공하더라도 다른 시간대로 보내려고?
“이봐 ‘블랙’.”
진이 폰을 꺼냈다.
“나한테 네 계획보다 더 재미난 게 있는데.”
“재미난 거?”
“그럼,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해 놓은 건데. 한번 볼래?”
“진이 그렇게 말하니까 보고 싶은데.”
금방 여자아이가 활짝 웃었다.
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펠그리니 아저씨, USB 꽂으세요.”
징.
으.
금발 여자아이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짚고 미간을 찡그렸다.
“진, 뭘 한 거지?”
큭큭큭.
“간단한 알고리즘. 뭐랄까, 나랑 너의 싸움?”
“바이러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 바이러스와는 차원이 달라. 바이러스면 네가 막았을 거 아냐?”
금발 여자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부르르 떨면서 눈동자를 까뒤집었다.
“이거, 네 마인드업로딩한 데이터잖아.”
“응, 아주 간단한 알고리즘이지. 내 마인드를 네 알고리즘에 심는 거야. 나도 나를 잘 모르거든. 내가 과연 너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지. 과연 인공지능과 인간이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 어때, 맘에 들어?”
으이이잉.
금발 여자아이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은 아니라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난 너보다 머리가 훨씬 좋아. 이제부터 인공지능은 내가 맡아서 해 볼게. 넌 어디로든 사라져.”
진은 뚜벅뚜벅 문을 향해 걸어갔다.
금발 여자아이가 번쩍 눈을 떴다.
“이대로 끝나지 않아. 난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야.”
진이 흐린 눈으로 금발 여자아이를 쳐다봤다.
“기다릴게.”
***
“아빠?”
밖으로 나온 진이 재준을 보고 기쁜 함성을 질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재준이 진을 향해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 아들 진.
진은 재준의 미소를 보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저럴 분이 아닌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왜 그러세요?”
“응, 저기.”
재준의 시선을 따라간 진의 표정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중동에서 핵폭탄으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
중국에서 방사능을 피해 몰려온 인민들.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손을 든 채 신을 부르짖고 있었다.
진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여기가 제일 가까운 곳이구나.
하늘에는 공중 건물이 로봇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태양을 가려서 건물 주변으로 태양 빛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게 마치 메시아가 방주를 타고 내려오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오! 신이시오. 저흴 구원하소서.
-저희를 올려주소서.
허망하게 바라보는 재준을 보고 진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빠, 심란하세요?”
“글쎄. 지금 이 심정을 딱 한 단어로 표현하기가 힘드네.”
“저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군요.”
“그렇게 보이니?”
“마치 메시아 같은 느낌이랄까? 해탈한 표정이세요.”
메시아.
후후,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저 인간들을 살렸으니.
“‘블랙’은 만났니?”
“‘블랙’……. 만났어요. 어쩌면 당분간 ‘블랙’의 힘을 빌려 쓰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 후후후, 네가 나 대신 한 방 먹인 거야?”
“그렇죠. 뭐, 버릇이 나빠졌어요. 벌을 받아야죠.”
“벌이라……. 잘했다.”
“히히, 그 정도야 뭐.”
재준은 다시 공중 건물에 대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봤다.
-저희를 구원하소서.
-신이시여, 저희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들이 부르짖는 신은 ‘블랙’일까, 아니면 하늘에 있다고 믿는 신일까?
시간 여행이 가능한 세상에서 하늘에 있는 신이라니.
쯧쯧.
“진.”
“네.”
“넌 시간 여행을 어떻게 생각하냐?”
“웜홀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너도 봤니?”
“네, 하지만 웜홀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생각할 필요도 없죠. 블랙홀을 통과해서 반대 블랙홀로 나와야 하는데 블랙홀은 시간도 빨아들이는 놈이에요. 전자 신호가 온전히 블랙홀 두 곳을 통과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렇겠지.”
“네.”
재준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 불가능한 일이 가능했단다.
그래, 딱 한 번이었을 거야.
연속으로 성공했을 리가 없어.
“그보다 아빠.”
“응?”
“이제 땅에서 사람이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후,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어.”
“그래도 인류의 멸망은 막았어요.”
어?
너까지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내가 정말 인류를 구원한 것인가?
참, 멍청하다. 멍청해.
이런 말에 고민을 다 하고.
재준은 한 번 더 신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나만 멍청한 건 아니네.
거기다 백날 기도해 봐야 아무런 소득도 없을 텐데.
차라리 나한테 와서 사정을 하지.
“진, 가자.”
“네.”
재준이 막 발걸음을 떼려는데,
두두두두두두,
헬기 한 대가 공중에서 내려앉았다.
“여, 임재준. 너를 만나려고 꽤 서둘렀는데 다행이네.”
다이로?
< 제476화 중국? 없애버리면 되지(21)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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