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54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25) >
FEMA(연방재난관리청).
그레이를 중심으로 고든과 카멀라가 양쪽으로 앉아 있었다.
탁자에 있는 타블릿에서 영상이 재생되었다.
“이게 핵융합 발전소 지하에 있는 거란 말이지?”
“네.”
그레이가 턱을 쓰다듬으며 영상을 바라보았다.
“커도 너무 큰 거 아냐?”
“거의 30만m²를 다 덮을 정도 같습니다. 아마 전부 PIM으로 구동되어서 한 대 한 대가 웬만한 슈퍼컴퓨터 네다섯 대의 성능을 발휘할 겁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게 양자컴퓨터 같은데 수천 대는 있습니다. 청장님 말씀대로 전 세계 인구를 다 감시할 정도의 크기입니다.”
“거봐, 내 예감이 딱 맞았다니까. 어유, 이러니 우리가 감당이 안 됐지.”
그레이가 다시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이거 촬영한 요원은 어디 있어?”
“아직 ‘사이진’에 있습니다.”
“설마 임재준의 끄나풀은 아니겠지?”
“주변에 다른 요원들 말로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이거 조작된 영상인지 판별해 봤어?”
“네, 실제 영상이 맞습니다.”
“그럼, 데이터 센터를 처리해야 할 텐데. 누가 좋겠어?”
고든이 그레이를 결연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네가? 설마 지난 일에 대한 사죄, 뭐 이런 거면 하지 마. 나 그런 일을 마음에 담아 두는 성격 아닌 거 알잖아.”
“그런 거 아닙니다. ‘블랙’을 잠재우는 일입니다. 누구한테 맡길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음, 불안한데…….”
고든을 보는 그레이의 눈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만약 실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아시잖아요. 바로 역풍이 불어올 겁니다. 임재준이 모든 역량을 쏟아부으면 저희는 견디기 힘듭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까지 달려들 겁니다.”
“그렇긴 하지. 투마로우가 미국에서 철수하면 미국이 주저앉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그러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만약 신분이 노출되더라도 제가 뒷수습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재난 조사 나왔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그것도 청장 보좌관이 직접 나온 건데.
근데 왜 자꾸 불안하지.
뭔가 하나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래, 그러면…….”
말을 이어가다가 카멀라를 봤다.
“카멀라.”
“네.”
“빌을 만나서 서로 주고받을 대사 좀 잘 짜 봐. 알지? 백악관과 ‘기억의 길’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물어뜯는 그림.”
“네.”
“새로운 의회와 백악관을 미리 지어 놓길 잘한 것 같아. 이 기회에 제대로 주인 행세를 해 봐.”
“네. 염려 놓으십시오.”
“그래, 그렇지.”
그래야 하는데.
고든과 카멀라가 동시에 움직인다고 해도 과연 임재준이 흔들릴까?
그레이는 자신의 계획을 정리해 봤다.
사우스다코타와 아이오와, 일리노이주가 이어져 있다.
사우스다코타에는 중앙의 미주리강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사이진’이 있고 동쪽에는 ‘기억의 길’이 있다.
‘기억의 길’ 본당에서 북쪽, 동쪽, 남쪽 300km에 걸쳐 도시가 건설되어 있고 남동쪽 도시의 끝자락 아이오와주 경계선에 새로운 의회 건물과 백악관이 들어섰다.
아이오와주와 접해 있는 일리노이주의 시카고에는 FEMA(연방재난관리청) 비밀 기지와 빌라가 있다.
‘기억의 길’이 자치국을 주장한다.
백악관은 인정하지 못하고 쿠데타의 원흉으로 ‘기억의 길’을 지목한다.
FEMA와 국방부, 국토안전부는 군대를 이끌고 사우스다코타와 아이오와주 경계에서 대치 상황을 만든다.
대치 상황에서 핵융합 발전소 지하에 있는 데이터 센터를 날려버린다.
서버를 잃고 대지가 주저앉아 핵융합 발전소는 가동을 중단한다.
그리고 국민은 임재준의 선택을 강요한다.
임재준은 ‘기억의 길’을 선택하든 백악관을 선택하든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
그때 FEMA가 임재준을 제거한다.
투마로우를 미국이 차지한다.
그레이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빌어먹을. 꼭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
새로운 백악관.
빌어먹을 년.
빌은 카멀라와 마주 앉아서 겉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속으로 쌍욕을 날리며.
전에 만난 카멀라와 느낌이 너무 다르다.
겉모양만 보면 카멀라 대통령과 똑같은데.
어디서 성형수술을 했는지 기가 막히게 잘했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이 여자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레이, 정말 무서운 인간이다.
대통령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아니 죽였겠지.
그 자리에 이 여자를 앉혀 놓았다.
“원하는 게 뭡니까?”
빌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이유나 결과를 따지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무엇이 떨어지는지 궁금하지도 욕심이 나지도 않았다.
단지 지금 상황이 빨리 정리되어서 자신도 앤서니를 따라 중국으로 가고 싶을 뿐이었다.
카멀라가 입을 나불거리며 무언가를 잔뜩 쏟아 냈다.
빌은 자신이 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오물을 받는 통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괜찮으시겠어요?”
“이미 그레이와 약속이 되어 있던 일입니다. 괜찮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서로 주고받고 끝내는 거죠.”
“듣는 거와 달리 굉장히 쿨하시네요.”
“그렇게 봤다면 다행이네요.”
“시간이 된다면 같이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은데.”
대통령이 이렇게 천박해서야 원.
“건강이 안 좋아 몸에 해로운 건 안 합니다.”
거기에 너까지 포함해서.
“아, 그러시군요. 아쉽네요.”
그 이후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고 빌이 일어섰다.
집무실을 벗어나며 뒤를 돌아봤다.
이 싸움 어쩌면 내가 잘못 선택한 것 같아.
이겨도 져도 내가 설 자리가 없다.
***
‘사이진’ 텐트촌.
한 달 전부터 ‘사이진’에 숨어들어 핵융합 발전소를 지켜보던 고든과 요원들은 계획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기억의 길’과 대치 상황은 어때?”
“겉으로는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입니다.”
‘기억의 길’이라고는 하지만 빌은 어디서 용병들을 잔뜩 데리고 왔다.
겉에서 보면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위기감을 조성했다.
“투마로우는 어때?”
“조용합니다. 아무런 동요가 없습니다. 아예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밖과 단절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음.
예상외로 조용하다.
하긴 임재준이라면 선택을 강요받을 거란 걸 충분히 예측했겠지.
괜히 끼어들어 먼저 돌을 맞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다다다.
다급한 표정의 요원 하나가 고든을 향해 달려왔다.
“팀장님,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준비해.”
고든의 말에 요원 다섯이 평범한 배낭을 하나씩 멨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나둘씩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약속된 장소에 다들 모였다.
고든의 시선에 로봇이 서버가 담긴 박스를 옮기는 모습이 담겼다.
“1차 이동이 끝났습니다. 지금 잠입하시죠.”
“잠깐 대기.”
하늘 위로 대형 드론이 서로 스치며 주변을 감시하듯 지나갔다.
좌우를 살피며 메릿의 유무를 확인했는데, 메릿은 없다.
“이동해.”
고든과 다섯 요원은 낮은 자세를 유지한 채 지하로 통하는 문을 열고 계단을 소리 없이 뛰듯이 내려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숨을 죽이고 한 시간이 흘렀을까.
쾅.
로봇의 작업이 끝나고 문이 닫혔다.
“이동.”
고든이 앞으로 치고 나가고 다섯이 그 뒤를 따랐다.
확.
은은한 전등이 실내를 밝혔다.
여기까지 이야기 들은 대로다.
엘리베이터가 보이자 조용하게 빠르고 낮은 자세로 다가섰다.
윙.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동.”
모두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자.
윙.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역시 이동 단추는 없다.
이때.
쉬이이이이이익.
천장에서 새하얀 소독 기체가 쏟아졌다.
읍.
“모두 입을 막아”
쉬이이이이이익.
기체가 천장으로 빨려 올라갔다.
이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킁킁.
분명 소독을 위한 게 확실한데.
당황해서 몰랐을 수도 있지.
지이이이이잉.
말대로 엘리베이터가 고속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잉.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우와!
모두 일순 심장이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어두운 공간에 끝없이 이어진 서버들.
쉴 새 없이 깜빡이는 붉은 빛들만이 이곳이 살아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정신 차려.”
고든이 요원들의 주위를 환기시키고 명령을 내렸다.
“넌 남고 나머지는 이동한다.”
고든은 만약을 대비해 한 명을 엘리베이터에 남겨두고 넷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지잉.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지이이이이이잉.
엘리베이터가 올라가 버렸다.
“팀장님.”
“기다려 봐. 한 명을 남겼으니 다시 내려올 거야.”
모두 말없이 엘리베이터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런 제기랄.
들킨 건가?
아니야, 아직.
들켰다면 이곳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지.
“그만, 우린 계획대로 C4를 설치한다.”
그래, 여기만 폭파하면…….
하지만 고든이 서 있는 이곳은 너무 넓었다.
자그마치 30만m²의 공간이다.
한쪽의 길이가 최소한 17km가 넘는 거리다.
중앙에 있는 양자 컴퓨터를 집중 공략해야 한다.
“모두 따라와.”
양자컴퓨터가 폭파되면 우린 여기서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
폭파음을 듣고 로봇이 달려오는 건 둘째치고 그 전에 유독가스로 인해 살아날 확률은 극히 낮다.
멈칫.
가던 발걸음이 굳었다.
양자 컴퓨터가 사라지면 ‘블랙’이 멈출까?
여기 있는 건 서버일 뿐인데.
진짜 중요한 ‘블랙’의 알고리즘이 파괴되는 건 아니잖아.
그럼, 이건 개죽음인데.
“팀장님,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고든이 멈추자 당황한 요원이 물었다.
“아, 아니야. 일단 중앙으로 가서 C4를 장착한다.”
“네.”
그래, 일단 폭탄은 설치하고 보자.
고든은 현란한 불빛을 내는 서버 사이를 걸어갔다.
어림잡아 9km를 걸어가야 했다.
5km를 걸었을까.
헉, 헉, 헉, 헉.
고든의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압박이 가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다른 요원들도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움직이고 있었다.
“팀장님, 이상한데요. 중력이 증가한 것 같습니다.”
“나도 느끼고 있어. 조금만 더 힘을 내. 기어서라도 중앙까지 가야 해.”
“네.”
이상하다.
분명 평지를 걷고 있는데 왜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걸까?
헉, 헉, 헉, 헉.
중앙에 거의 다다르자 거대한 원통형 컴퓨터가 보였다.
마치 인간의 내장에 혈관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 같은 형태의 컴퓨터 수천 대가 꿀렁꿀렁 데이터를 처리하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모두 잠시 휴식.”
으아.
고든과 요원들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
고든은 쓰러진 요원들을 바라보니 한숨이 나왔다.
이제 어쩐다.
폭탄을 설치한 후에는 무얼 해야 할까?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눈이 저절로 감기는 게 괜히 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어 잠을 쫓아 보았다.
주위의 요원들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보안이 허술한 이유가 있었어.
여긴 들어오면 나갈 수가 없는 곳이다.
고든은 다시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안 돼.
정신 차려.
배낭 하나를 질질 끌면서 양자 컴퓨터 앞에 섰다.
C4 폭탄을 꺼내 컴퓨터 아래에 붙였다.
제길 너무 힘들다.
다시 배낭을 끌고 조금 떨어진 양자 컴퓨터로 향했다.
철컥.
그리고 다른 곳에도.
철컥.
C4 폭탄을 계속 붙여 나갔다.
그리고 요원이 잠든 곳으로 돌아와 다른 배낭을 끌고 다른 양자 컴퓨터로 향했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 제454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25)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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