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53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24) >
핵융합 발전소 회의실.
모두 뉴욕에서 벌어진 영상을 보고 윌켄의 부연 설명을 들었다.
“보스, 우리가 먼저 메렛으로 치죠?”
워서스틴이 재준에게 주먹을 들어 보였다.
“동부는 아직 나노봇이 사방에 깔려 있어서 안 돼. 괜히 메렛만 고장 나. 그리고 공격하는 것보다 방어하는 게 훨씬 쉬워. 우리가 굳이 먼저 칠 필요가 있을까?”
“그럼, 우리가 쿠데타를 일으킨 범죄자가 되잖아요.”
“그걸 믿을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키면 좀 어때. 우리에게 명분도 있고 좋지.”
“네? 진짜 쿠데타를 하려고요?”
“쿠데타가 무슨 뜻인지 알지? 그냥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거야.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라고. 솔직히 그레이나 우리나 다 지역을 선점하고 있는 모양새가 쿠데타랑 별반 다르지 않아.”
“그럼, 전에 서형길이 말한 자치국이라도 선포하죠.”
“아니, 멀쩡한 국가를 왜 자꾸 둘로 쪼개려고 그래? 너 베네수엘라에서 오래 있더니 상당히 과격해졌는데?”
툭툭.
페렐라가 워서스틴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너의 의견을 지지한다는 듯이.
“과격한 게 때론 빠른 해결을 불러올 수도 있어요.”
쯧쯧쯧.
“보스가 원하는 건 빠른 해결이 아냐.”
보다 못한 윌켄이 나섰다.
“그레이가 저렇게 나오는 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야. 미국에서 쿠데타라니 말이 돼? 하지만 자꾸 사람들에게 인식을 시키면 진짜 미국에서도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는 게 당연시되는 거라고. 그레이는 그걸 노리는 거야. 그리고 그레이를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거고.”
“그레이를 지지하는 세력이라뇨?”
“국민의 절반은 그레이를 지지한다고 봐야지. 그렇지 않고는 저런 자신감이 있을 수가 없어.”
“국민의 절반이요?”
모두 윌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퀴니코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반역자를 찾는 듯했다.
“아니, 지금 미국을 이렇게 만든 놈들인데. 믿는다고요? 핵을 쏘고 나노봇을 막지도 못해서 오히려 퍼뜨린 게 저들인데. 정말 저들을 지지하는 인간들이 절반이나 있다고요?”
하하하.
윌켄이 퀴니코를 향해 웃었다.
“아, 미안해. 퀴니코. 내가 자꾸 보스를 닮아 가나 봐.”
빠직.
재준이 윌켄을 노려봤다.
거기서 내가 왜 나와?
윌켄은 재준에게도 손을 들어 미안하단 표현을 했다.
“퀴니코, 핵을 쏜 건 도날드고, 나노봇을 퍼뜨린 건 투마로우야.”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믿는 것과 저들이 말하는 것이 다르다는 거지.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니까. 저들은 거짓을 조작해서 사실로 퍼뜨리고 있어. 핵과 나노봇은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고.”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아니, 사람들이 진짜 믿는다고요?”
“더 잘 믿지. 우리가 얘기하는 것과 백악관이 얘기하는 것 중에 어디 말을 더 믿을까? 아무리 사람들이 싫어해도 아직은 미국을 대표하는 건 백악관이라고. 우리보다는 더 믿을 수밖에 없어.”
“아니, 우리가 여기 사우스다코타에서 살 수 있게끔 해줬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우리가 아니지. ‘기억의 길’이지. 우린 핵융합 발전소와 나노봇 효소를 만들어 돈을 버는 기업이잖아. ‘기억의 길’은 이익을 취하지 않는 종교고.”
세상에.
이야기가 이렇게 된다니.
윌켄의 말에 모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지금까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이 전부 돈을 벌기 위해 한 일이 된 거네요.”
“그렇지. 보스는 그래서 우리가 먼저 손을 쓰면 안 된다는 거야. 그러면 국민들이 우리를 외면할 거고 진짜 쿠데타가 일어나서 우리 자산을 다 빼앗아 갈지 몰라. 여기서부터는 머리를 잘 써야 해.”
짝, 짝, 짝.
재준이 손뼉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 그렇다고 국민의 선심을 얻기 위해 전기나 효소를 공짜로 나눠줄 마음은 없어. 도날드를 핵을 쏜 원흉으로 만들지도 않을 거고. 우선 지금은 철저히 방어에 집중할 거야. 그리고 틈이 보이면 한 번에 끝내야 해. 두 번은 없어. 그러니까 그 한 번의 기회를 잘 알아차려야 하는 게 정말 중요해. 그레이는 이런저런 훼이크를 쓰면서 우리를 도발할 거거든.”
아.
워서스틴과 페렐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우리 너무 단순한 나라에서 너무 오래 있었나 봐.
퀴니코가 다시 나섰다.
“그럼, 이번 쿠데타의 원흉으로 우리를 지목하면 어떻게 대응할 거예요?”
“그때 도날드가 나서서 자치국을 선포하는 척해야지. 도날드 성격상 실제로 할지도 모르지만.”
“그럼 쿠데타를 인정하는 게 되잖아요.”
“글쎄 과연 그럴까? 그레이가 우리를 도발한다면 우리도 그레이를 도발하는 거야. 먼저 발끈하는 쪽이 지게 돼 있어.”
“자치국을 인정할 수도, 인정 안 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는 거군요.”
“그렇지. 그래서 그레이는 자신의 입으로 우리를 지목하지 못해. 아마 도날드가 선언하기 전에 ‘기억의 길’이 대타로 나서겠지.”
“설마 ‘기억의 길’이 자치국을 선언합니까?”
“그래야 재밌는 그림이 그려지는 거 아냐? 우리의 입장이 상당히 난처하게. ‘기억의 길’이 바로 옆에 있는데 우리가 자치국을 인정하면 우린 배신자가 되는 거고, 자치국을 인정하지 않으면 ‘기억의 길’과 대치 상황이 되는 거잖아.”
‘기억의 길’이 자치국을 선포한다고?
“그러면 ‘기억의 길’이 벌써 그레이와 손을 잡았다는 겁니까?”
“요즘 4대 IT 기업이 너무 조용하지 않아?”
“그건 아마존이 파산 위기에 처했으니까요. 아마존을 살리기 위해 그쪽으로 총력을 기울이는 게 아닐까요?”
“아마존 살리기에 실패하면?”
“그럼……. 헉, 부채 보증을 선 애플과 구글이 투마로우에 돈을 갚아야 하네요.”
“그뿐이 아니지. 아마존이 파산하면 클라우드 서비스를 우리한테 사가야 해. 부채에 인수자금까지 들어가야 하는 거야.”
“엄청난 부담이네요.”
“그런데 ‘기억의 길’이 나서면 우리가 난처해지고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잖아. 어쩌면 부채를 안 갚을 수도 있고 클라우드 서비스를 안 사도 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어.”
“빌이 어떻게 우릴 배신할 수가 있을까요?”
“아직 벌어진 일이 아니야. 너무 고민하지 마. 대비만 하자는 거지. 대비만.”
아, 머리 아프다.
모두가 자기 살겠다고 남을 죽이는 일에 나서다니.
“아니, 지금 동부를 다시 살리는 데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이런 기 싸움을 해야 한다니. 아유, 힘드네요. 힘들어.”
하하하.
“미국을 놓고 한판 벌이는 싸움이야. 세계 최강 경제 대국을 놓고. 지금까지 기업 인수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잖아.”
어휴.
한숨 쉬는 퀴니코를 보며 재준이 빙글 웃었다.
그레이, 미국을 살리겠다는 생각은 좋은데.
내가 생각하는 시나리오는 아니었으면 좋겠어.
투마로우를 밟고 가면 안 되지.
이때,
【지하 서버에 인간이 접근하려 합니다.】
‘블랙’이 먼저 재준을 찾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약간 놀란 재준이 물었다.
“누군데?”
【FEMA 소속의 ‘사이진’입니다.】
“그래? 문을 열어줘 봐. 무슨 짓을 하나 보게.”
【네.】
팟.
스크린에 웬 여자 하나가 핵융합 발전소 지하로 굴러떨어지는 게 보였다.
이거 봐라.
그레이, 이거 독이 든 사과인데.
덥석 물면 후회해도 늦어.
***
후, 후, 후.
메렛을 피해 핵융합 발전소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 겨우 다다랐다.
오래전부터 핵융합 발전소를 돌아다녀 보았는데 유독 한 곳의 문만 특이한 모양이었고 사람이 출입하는 걸 본 적도 없었다.
가끔 수만 대의 박스가 로봇에 의해 옮겨지는 게 다였다.
딱 컴퓨터 크기의 박스.
저건 분명히 서버이고 여기는 데이터 센터가 확실해.
오늘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바로 오늘이 박스가 들어가는 날이다.
문은 다섯 시간 정도 열려 있고 로봇이 이동하는 시간에 약간의 틈이 있었다.
지금 그 시간의 틈을 이용해 문 앞에 와있다.
슬쩍 문안을 들여다보니 어두웠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후다닥.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으아아아악.
우당탕 퉁탕.
계단을 굴러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고, 아고, 아고.
한동안 허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꼼짝 않고 버텼다.
쾅.
로봇들이 일을 마치고 문이 닫혔다.
엥?
나 이제 어떻게 나가?
스마트폰을 꺼내 전원을 켜려다가 잠시 생각하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내가 미쳤지.
스마트폰을 켜는 순간 내 위치가 발각될 텐데.
일단 일어나서 주변을 살핀 후 발을 떼서 어둠에 적응하며 앞으로 몇 미터를 전진하자,
확.
사방이 환하게 밝아졌다.
움직임을 자동으로 인지하는지 은은한 전등이 켜졌다.
눈을 들어 천장을 죽 살폈다.
망했네.
사방이 CCTV네.
나중에 자수라도 해야겠다.
뭐, 이렇게 된 거 당당하게.
발걸음을 씩씩하게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10m 정도 앞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제기랄 여기가 한계인가?
근데 버튼이 없다.
다가가자 ‘지잉’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저절로 열렸다.
지문인식이 홍채 인식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엘리베이터에 타자 여기도 누를 수 있는 버튼이 없다.
지잉.
문이 닫히고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몸이 축 가라앉는 걸 보니 엄청난 속도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지이이이이잉.
속도가 느려지고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지잉.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욕이 먼저 튀어나왔다.
fuck.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수 없었다.
이 핵융합 발전소 총면적이 30만m²라고 알고 있는데, 이 지하에 도시만 한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공간을 서버가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이게 다 몇 대야?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이판사판이다.
일단 문자부터 날리자.
[핵융합 발전소 지하가 데이터 센터입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로 전환했다.
어디, 어디.
사정없이 셔터 버튼을 눌러 찍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동영상도.
주변을 죽 둘러 동영상도 찍었다.
그리고 전송을 시도했는데, 안 된다.
지하라 그런가?
아니면 아예 이 안에선 전송이 안 되는 건가?
일단 나가자.
그런데 어떻게 나가지?
이 엘리베이터는 왜 문이 열린 채 가만히 있는 걸까?
나갔다가 들어오면 다시 작동하려나?
발을 살짝 내밀어 봤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후다닥.
밖으로 잽싸게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지잉.
아, 나갔다가 들어오는 거구나.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갔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속도였다.
지이이이이잉.
속도가 줄고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지잉.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확.
역시 동작을 인지했는지 은은한 전등이 들어왔다.
후다닥.
계단을 올라 문 앞에 섰다.
텅.
어? 문이 저절로 열렸다.
슥.
문을 나서자마자 벽에 기대었다.
후, 후, 후.
사방을 살펴보았는데 다행히 아무도 없다.
일단 사진을 보내야 한다.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과 동영상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됐다.
이제 들키지 않고 여길 벗어나면 된다.
아직은 이 거대한 공간이 알루미늄 돔으로 덮는 공사 중이라 주변은 어수선했다.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니다.
< 제453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24)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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