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52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23) >
뉴욕주.
다다다다다다다.
헬기가 한 대가 빌딩 옥상에 내렸다.
“잠시만요.”
헬기에서 내리기 전에 고든이 주사기를 꺼냈다.
“팔 걷어 보세요.”
“아, 효소.”
그레이가 팔을 걷자 고든이 주사기를 혈관에 주사했다.
“이거 하루에 한 번씩 이 짓을 하니까 꼭 약쟁이가 된 것 같아.”
“약쟁이 맞습니다. 이거 없으면 저희 죽습니다.”
큭큭큭큭.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이 짓거리를 하네.”
고든도 자신의 팔에 주사기를 꽂았다.
“이제 내리셔도 됩니다.”
“자, 가보자고.”
그레이가 내리면서 헬기의 거친 바람 때문에 중절모를 움켜쥐며 바닥을 살폈다.
많이도 갈겼네.
죽이지도 못했으면서.
바닥에 팬 총알 자국을 발로 문지르며 따라 걸었다.
건물의 끝에 다다랐다.
“여기로 떨어졌는데 드론 택시가 대기하고 있었단 말이지.”
안토니오와 리노가 뛰어내린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네. 미리 준비한 듯합니다.”
그레이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었다.
“그럼, 이제 임재준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다 알겠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도망친 두 놈이 다 말했을 겁니다.”
“뭐, 알아도 상관은 없는데…….”
그레이가 말을 하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드론 택시라…….
고든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입을 뗐다.
“스마트폰 사용을 중지했는데도 이미 우리 계획을 알고 있는 겁니다.”
“아니,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블랙’의 감시 범위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파악을 하고 있단 말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도망친 두 놈 말이야. 우릴 염탐하기 위해 보냈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블랙’이 있는데 굳이 사람을 보낸다? 그건 아니야. 안 그래?”
“그럼 그 두 놈이 우연히 우리가 하는 일을 목격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그게 훨씬 타당해. 그리고 그 두 놈이 위험에 처하자 ‘블랙’이 도와준 거지.”
“그게 가능할까요? 아무리 인공지능이라 해도 미국 전체 인구를 하나하나 다 감시한다는 건 전 세계 서버를 다 동원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글쎄, 내 생각엔 미국 전체가 아니라 지구 전체 같아.”
“지구 전체요?”
“데이터 센터 알아보는 건 어떻게 됐어?”
“제가 자리에 없어 중단되었습니다.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블랙’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데이터 센터야.”
“데이터 센터가 아니라면 알고리즘이겠네요.”
“그렇지, 사실 나는 알고리즘이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어떤 알고리즘을 만들었기에 지금 이런 능력이 가능한 걸까? 궁금하지 않아?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도 그렇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정확성도 그렇고. 근데 말이야. ‘블랙’ 꼭 인간 같지 않아?”
“인간이요?”
“그래, 아주 닮은 인간 하나 있잖아.”
고든은 그레이의 말에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임재준 말입니까?”
“그래, 임재준. 마치 임재준 같단 말이지.”
“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아니야, 진은 진짜 인공지능이고. 감정이 없잖아. 하지만 ‘블랙’은 진보다는 감정적이란 말이지. 항상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안 그래?”
“잘 모르겠습니다.”
“에이, 왜 그래? 빌라에 좀 있었다고 머리가 굳은 건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뭐 죄송까지. 어쨌든, 이번에도 전혀 상관없는 두 놈을 굳이 살려야 했을까? ‘블랙’이라면 우리가 하는 일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긴데. 그놈들이 죽었으면 우리가 의심하지 않았을 거 아냐? 왜 굳이 살려서 우리가 경계하게 만드냔 말이지. 이런 게 꼭 임재준이야. 상대에게 자신의 패가 ‘이거다’라고 흔들어 놓고, 알면서 덤벼들다 당하게끔 하는 거.”
“그럼, 우리가 대비하는 걸 역으로 이용한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겠어? 우린 우리대로 시간 버려, 에너지 쏟아부어, 그렇게 만든 걸 한 방에 쓰레기로 만들면, 우리가 얼마나 손해야. 그럴 때 또 한 방 때리면 우린 그냥 쓰러지는 거지. 지금까지 임재준한테 다 그렇게 당했잖아. 중요한 건 말이야…….”
그레이의 양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블랙’이 나오기 전에도 임재준은 그렇게 했다는 거야. 그렇게 월가를 장악한 놈이지.”
“그럼, ‘블랙’은 임재준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어졌단 말이네요.”
“난 그게 맞다고 봐. 임재준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까, 그렇게 생각해야 당하지 않을 것 같지 않아?”
고든은 무척 즐거워하는 그레이를 봤다.
당신이나 임재준이나.
대놓고 뺨 때리는 스타일이니까.
“그럼, 이번 건은 그대로 진행할까요?”
“그렇지. 카멀라가 여자라는 이유로 반기를 든 쿠데타 세력이 있었다. 어때?”
“시대에 역행하는 이미지를 씌우기에는 딱 적당하네요.”
“그렇지?”
“바로 투마로우를 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카멀라 말이야.”
“네.”
“굽을 좀 높여. 키가 작아 보여. 요즘은 사소한 거에 꼬투리가 잡히는 세상이잖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이때.
끄아아아악.
주변에서 경계를 서던 군인 하나가 온몸이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어서 효소 뿌려.
옆에서 방역을 담당하던 군인이 효소를 마구 뿌려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고든이 그레이 앞에 섰다.
“피하시죠. 여기 나노봇이 아직 존재합니다.”
“괜찮아. 죽을 놈은 어차피 죽는 거야. 피한다고 사는 것도 아닌데.”
그레이가 주변에 무작위로 효소를 분사하는 군인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에고,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건지……. 그냥 ‘카리브’ 사용하라고 해. 괜히 피해만 늘리지 말고.”
“네.”
고든이 군인 하나를 불러 스마트폰 사용을 지시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 스마트폰에서 ‘카리브’를 작동시켜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삐.
저기다.
뿌려.
쯧쯧쯧.
그레이가 혀를 차며 헬기로 향했다.
그래, 이런 짓거리를 하더라도 투마로우만 손에 넣으면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데 문제는 없어.
투마로우만 손에 넣으면.
***
핵융합 발전소 앞.
블랙워터가 이상한 놈 둘을 잡았다는 소식에 재준이 밖으로 나왔다.
근데 온몸이 고대 유물인 양 고대 문양을 문신으로 뒤덮은 두 명이 보였다.
“이 사람들은 뭐예요?”
재준이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안토니오와 리노를 보고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갱단인가?
안토니오는 재준을 보자마자 심장이 잠깐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헉!
임재준이다.
이제 거의 죽은 목숨이다.
하지만, 모르는 게 무식하다고.
“우리가 바로 뉴욕에서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안토니오 패밀리다.”
리노가 당당하게 말했다.
안토니오도 절대 예상하지 못한 무식한 리노의 당당함.
리노, 하지 마.
그냥 조용히 있자.
안토니오가 리노의 허세를 말리려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재준이 리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론, 안토니오 패밀리라고 들어봤어요?”
“글쎄요. 뉴욕에 워낙 갱단도 많고 이름들도 거기서 거기라 헷갈리거든요.”
“헷갈린다고? 안토니오 패밀리와 같은 이름이 어디 있다고 거기서 거기라는 거지?”
“안토넬로, 아메데오, 앤드리아, 아멘돌라, 다 비슷하지 않나?”
“딱 봐도 다 다른데?”
제발 좀 리노, 그냥 그렇다고 하라니까.
“그건 됐고, 너희들은 여긴 왜 온 거야?”
“우리가 오고 싶어 온 게 아니라, 갑자기 누군가 전화로 드론 택시로 뛰어내리라고 해서 뛰어내렸더니 택시 문이 닫히고 열리니까 여기던데.”
전화? ‘블랙’이구나.
“택시로 뛰어내리기 전에는 뭐 했는데?”
“뉴욕에서 군인들이 유명인사들을 총으로 죽이는 걸 봤다. 운이 나쁘게도 들켜서 도망치다 보니 전화가 오고 택시로 뛰어내리라고…….”
“됐어. 그 말은 또 들을 필요 없고. 그러니까 뉴욕에서 군인들이 유명인사들을 죽였다는 말이네.”
“맞아. 최소한 백여 명은 죽었을 거야. 우리가 그 장면을…….”
“그만.”
“그러니까 우리가 본 것은…….”
“그만, 안 들어도 된다니까?”
“내가 여기다 다 찍어 놨는데? 이게 없으면 협상이 어려울 건데.”
“무슨 협상?”
“흥, 우리도 머리가 있다고 정부와 협상으로 돈을 뜯어낼 거잖아.”
“돈은 무슨, ‘블랙’, 내 스마트폰으로 옮겨.”
재준이 스마트폰을 켜자 동영상이 다운로드 되었다.
다 됐네.
“이거 말하는 거지?”
재준이 빙글 웃으며 동영상을 재생했다.
리노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재빨리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했다.
없다.
자신이 찍은 동영상이 사라졌다.
리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맞는데.
이 스마트폰은 분명 내 건데 어떻게 동영상이 저리로 옮겨진 거지?
“마술인가?”
“테론, 이 덤앤더머 좀 저리 보내.”
재준이 ‘사이진’ 쪽을 가리켰다.
테론이 레이몬드에게 손짓을 했다.
“데려가.”
“네.”
레이몬드가 일어서라고 손을 까닥였다.
“일어나.”
“그건 우리가 목숨 걸고 찍은 거라고.”
리노가 발악하듯 소리치자 안토니오가 리노를 잡아끌었다.
“그만해. 그냥 가자. 제발.”
“보스 왜 그래요? 우린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요.”
너 죽을래?
안토니오가 리노의 얼굴에 바짝 다가섰다.
리노가 살짝 긴장하며 물러서자 다시 바짝 다가서서 이빨을 꽉 깨물면서 속삭였다.
“저거 안 보여? 블랙워터라고. 그리고 저쪽은 임재준이고.”
“임재준이요? 그게 누군데요?”
“그냥 얌전히 여길 벗어나서 얘기 좀 하자. 응?”
“왜 그런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그래요?”
안토니오가 리노를 개 끌 듯이 잡아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재준은 다시 스마트폰의 영상을 재생시켜서 테론에게 보였다.
“테론, 이 영상에 나오는 군인 실제 군인인가?”
테론이 영상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재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 인사들을 색출해서 죽였다?
왜 이렇게 무리하는 걸까?
시간이 없는 건가?
아니면 시간을 끌려고?
무엇 때문에?
보스.
윌켄이 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보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지금 백악관 대변인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뭔데요?”
“뉴욕주에서 백악관을 점령하려는 쿠데타가 있었답니다. 일당 중 일부는 총격전 과정에서 사살되었고 체포된 자들로부터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쿠데타요? 미국에서?”
푸하하하하.
그레이, 이건 거의 코미디 수준이잖아.
기껏 생각해 낸 게 쿠데타라고?
“우리도 대응해야 할 것 같은데요.”
“대응할 필요가 있나요? 너무 뻔한데.”
“뭐가요?”
“이걸 보세요.”
재준은 스마트폰의 동영상을 윌켄에게 보여주었다.
영상을 보는 윌켄의 얼굴이 구겨졌다.
“총격전 같은 건 없었군요.”
“체포된 사람도 없었어요.”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럴 리가요. 이 동영상을 촬영한 사람들이 탈출해서 여기로 왔는데.”
“정말입니까?”
“그레이도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백악관에서 발표했다는 것은 전면전을 해보자는 거네요.”
“그렇다고 봐야죠.”
코미디이긴 한데.
이걸 현실화시키는 건 다른 문제지.
사람들은 ‘설마’ 하면서도 ‘역시’를 말하고 싶어하니까.
< 제452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23)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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