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49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20) >
사우스다코타, 대통령 임시 거처.
카멀라가 천으로 가슴을 가리고 먼저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고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당신 좀 거칠어졌어?”
고든이 고개를 돌려 살짝 미소를 지었다.
“요즘 피곤한 일이 많으니까. 그보다 카멀라 당신도 격렬하긴 마찬가지였어.”
피식.
카멀라가 쑥스러운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침실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앞날은 이렇게 밝을 거라는 듯.
“그레이는 어때?”
“아, 정말 신기한 일인데, 그레이가 은퇴하고 싶다고 했어.”
“정말? 그 욕심쟁이가 웬일이래?”
“그렇다고 다 믿지 마.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알아. 하지만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건 확실하네.”
“멀쩡한 미국을 원했어. 근데 동부가 날아간 미국이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야.”
카멀라가 일어나 격렬했던 지난 밤의 행적을 확인하며 자신의 옷을 하나둘씩 주웠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걸터앉으며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도날드가 원하는 선거 방식은 어떻게 생각해?”
“괜찮은 거 같은데. 국민이 직접 후보를 내세우고 후보를 투표로 뽑는다는 건 좋은 일이잖아. 예전처럼 당에 의존하는 시대는 우리에게도 좋지 않고.”
“어째서지? 당이 배경이 되면 더 편한 거 아닌가?”
“솔직히 이제 시대가 바뀌었잖아. 선거 운동을 하기 위해 가상현실을 방문하는 시대에 민주당이니 공화당이 무슨 힘을 발휘하겠어. 그리고 예전에는 의원 하나 섭외하려면 당을 상대해야 했는데 이제 의원 하나에 집중할 수 있잖아. 상대하기 쉬워질 거야.”
“그럼, 그대로 밀고 나가란 말이지.”
“응.”
“괜히 걱정했네. 난 또 반대할까 봐 걱정했는데.”
고든이 침대에 걸터앉은 카멀라에게 다가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다음 선거에서 이길 생각만 해. 자금은 빌이 얼마든지 댈 거야.”
“진짜 이상하네.”
“뭐가?”
“아니야.”
카멀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것도 아니란 몸짓을 했다.
이렇게 자상한 놈이 아닌데.
갑자기 사람이 변했어.
하긴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전까진 긴장이 보통이 아니었겠지.
이제 한 시름 놓은 거고.
고든이 카멀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투마로우에서 효소를 대량 생산한다고 했으니까, 먼저 투마로우부터 방문해서 국민의 신뢰를 얻어 봐.”
“효소?”
“탄소나노튜브의 연결고리를 해체하는 효소야. 이제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지.”
“오케이, 그런 거라면 내가 잘할 수 있어.”
“그리고…….”
고든이 아니라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왜 무슨 못할 말이라도 있어?”
“그게 꼭……. 아니야, 당신이 굽히는 건 싫어.”
“뭐야 그게? 말해 봐.”
“전기, 전기 말이야. 동부에 전기를 공급해야 하거든. 핵융합 발전소에서 전기를 공급해 줬으면 해서.”
“그럼, 부탁해야 하는 거네.”
“그렇지.”
“그건 좋은 거 아냐? 국민을 위해서 대통령이 직접 기업에게 사정하는 그림인데.”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그리고 언론에는 미리 연락해 놨어. 사진 잘 받게 미용사도 섭외해 놨고.”
“어, 알겠어.”
정말 너무 변했는데.
“나 먼저 나갑니다. 이따 투마로우 앞에서 봐. 참, 저녁은 같이해. 문자 보낼게.”
고든이 나가고 카멀라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천천히 일어섰다.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는 천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도 모른 채.
뭔가 이상하다.
저녁을 같이하자고?
오늘 저녁에 내 남편이 오는데?
내가 한 이야기를 잊어먹은 건가?
***
진코퍼레이션.
재준은 신기하다는 듯이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멀라가 도착 전에 그레이의 보좌관이 기자들에게 위압적으로 무어라 지시를 하는 게 보였다.
“‘블랙’.”
【네.】
“저 사람은 고든 아냐? 근데 좀 느낌이 다른데.”
【일주일 전에 새로 임명된 그레이의 일곱 번째 보좌관 고든입니다.】
“그 전에도 고든이었고 지금도 고든이야?”
【그레이의 보좌관은 전부 이름이 고든입니다.】
이것 봐라.
인형을 키우고 있었다?
마침내 카멀라가 도착하고 수십 명의 기자 앞에 서자 기자들이 열렬하게 사진을 찍고 마이크를 들이밀며 질문을 하는 장면이 보였다.
띠링.
월켄이 들어서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무, 요란합니다.”
윌켄이 저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재준도 인정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
“다음 선거에서 어떻게든 이겨보려는 거겠죠. 아무튼 좋은 거잖아요. 다들 열심히 뛰겠다는데. 진심이면 더 좋겠지만. 아니어도 말 같지도 않은 법안 만든다고 의회에 처박혀서 거드름이나 피우는 거보다는 낫네요.”
“오늘 효소 발표 전에 온 거 보면 발이라도 걸칠 생각인가 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면 알겠죠.”
잠시 후.
띠링.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밝은 표정의 카멀라가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재준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카멀라의 표정이 굳으며 재준의 손을 바라봤다.
건방진 놈이, 대통령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
그래, 참자, 지금은 대행일 뿐이니까.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만 참자.
호호호.
“이렇게 실제로 보니 상당히 미남이시네요.”
“별말씀을. 어떻게, 차가 좋을까요? 아니면 위스키로 한잔 드릴까요?”
술? 이놈 봐라.
내가 여자라고 얕잡아 본다 이거지?
비서실장이 카멀라에게 다가와서 뭐라 속삭이자 인상을 꽉 구겼다.
그리고 저리 가라고 손짓을 했다.
괜찮아.
다시 재준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위스키 좋군요.”
“역시 내가 대통령님은 다를 줄 알았다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재준이 술 냉장고에서 위스키 한 병과 잔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재준이 카멀라의 잔에 위스키를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잔을 살짝 들어 올려 건배를 표하고 단숨에 들이켰다.
카멀라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단숨에 잔을 비웠다.
은은하게 달콤한 향이 올라오자 기분이 확 좋아졌다.
“상당히 기분이 좋아지는 위스키네요?”
“그럼, 가실 때 한 병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호호호.”
“별말씀을.”
재준이 다시 카멀라의 잔에 위스키를 따라주며 말했다.
“부탁하러 오신 거죠?”
카멀라의 잔을 쥔 손이 살짝 떨려서 위스키가 출렁였다.
후후후.
“맞습니다. 동부에 전기를 공급해 주십시오. 발전소가 돌아가지 않아 재건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아, 전기요?”
“네. 가능하다고 알고 왔는데.”
재준이 톡톡톡 탁자를 두드리며 카멀라를 바라보며 빙글 웃었다.
카멀라가 재준의 시선을 피해 비서실장을 쳐다봤다.
혹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비서실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카멀라가 다시 재준에게 돌아오자, 재준이 스마트폰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알겠습니다. ‘블랙’.”
【네.】
“다시 가동해.”
【네.】
명령을 내린 재준이 카멀라를 보고 다시 빙글 웃었다.
“됐습니다. 이제 전기가 공급될 겁니다.”
카멀라는 재준의 명령이 머릿속에 빙빙 돌았다.
머가 이렇게 쉬워.
아니지, 그게 아니라.
“다시 가동하라니요?”
“아, 그거 재가 발전소를 중단시켰거든요.”
“무슨 말이죠?”
“알면서 물으시는 겁니까? 아니면 진짜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무슨 말인지 잘…….”
“그냥 그레이에 대한 경고라고 해 두죠.”
“뭘…… 알고 있었습니까?”
“모르면 이상한 거 아닌가요? 나노봇이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온 사람이 그레이예요. 그럼,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레이도 나를 감시하는 거로 아는데.”
“그레이가…….”
꿀꺽.
카멀라가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끙.
재준이 카멀라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며 말했다.
“자, 또 다른 부탁이 있으십니까? 오늘은 대통령님이 내 술친구가 되어 주시니까 뭐든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효소에 대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카멀라가 비서실장을 노려봤다.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네.”
비서실장이 밖으로 나가자 윌켄도 밖으로 나갔다.
“여기 도청이나 몰래카메라 있습니까?”
“도청이요?”
“네.”
하하하하.
재준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블랙’.”
【네.】
“그레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국방부 장관과 식사 중입니다.】
“그들 대화를 들려줘.”
【네.】
-청장님, 그냥 군대를 동원하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이길 수 있겠어?
-특수부대로 암살을 시도하면 가능합니다.
-그러다 실패하면. 전부 몰살당하는 거야. 임재준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알고 하는 소리야?
-블랙워터 아닙니까?
-아는 게 그게 다야?
-설마 메렛을 말하는 겁니까? 그건 EMP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럼, ‘블랙’은.
-‘블랙’이요? 그건 인공지능일 뿐입니다. 전원을 차단하면 됩니다.
-당신은 그게 문제야. 좀 더 알아 봐. 누가 옆에 있는지.
-아,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단순해서야, 원.
-죄송합니다.
“됐어. 그만 끊어.”
재준의 명령에 카멀라의 얼굴이 슬프게 변했다.
“이게 뭐죠?”
“뭐긴요? 당신들이 뭘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거죠.”
“그럼, 내가 뭐하러 왔는지 다 알고 있었습니까?”
“그럼요. 난 도청 장치 같은 거 없이도 전 세계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다 알고요.”
“근데 왜 가만히 있는 겁니까?”
“글쎄요.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어차피 당신들끼리 지지고 볶는 걸 참견할 마음도 없고. 난 나한테 칼을 들이대는 자들만 상대합니다. 아시죠? 그 상대는 언제나 참혹하게 끝났다는 거.”
“어떻게 이런 일이…….”
“이봐요. 카멀라 대통령님. 난 지금 유럽으로 향하고 있는 그레이 구를 막는 것 때문에 탈모가 일어날 지경이에요. 당신들이야 미국을 차지하려고 음모와 협잡을 꾸미는 것 같은데. 난 거기 별로 관심 없어요.”
“저, 술 한잔 만 더.”
“아, 죄송합니다. 잔이 빈 걸 몰랐네요.”
재준이 카멀라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졸졸졸졸졸.
잔에 술이 넘쳐 흘렀다.
그래도 재준은 계속 술을 따랐다.
넘친 술이 탁자를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카멀라의 눈이 재준의 눈과 마주했다.
“아시겠죠. 자기 그릇의 크기를 모르면 비싼 술을 버리는 겁니다.”
카멀라가 잔을 들어 단숨에 넘겼다.
후.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왜 저한테 알려주는 겁니까? 숨겨도 되는 건데요. 제가 그레이한테 말을 할지도 모르는데.”
재준이 다시 카멀라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탕.
그리고 병을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카멀라가 재준을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이곳의 왕이니까.”
왕.
“알고 있으라고요. 아무리 신하가 못나도 칼을 잡기 전에는 내치지 않아요. 하지만 칼을 드는 순간 그는 갈기갈기 찢겨서 사자 우리에 던져지는 겁니다.”
부들부들.
카멀라의 손이 술잔을 들지 못할 만큼 떨렸다.
재준이 카멀라의 잔을 들어서 그녀의 입 앞에 가져다주었다.
카멀라가 재준을 바라보며 술잔을 받아 들이켰다.
“죄송합니다.”
재준이 등을 소파에 기댔다.
“죄송할 거까진 없어요. 몰랐으니까 그랬을 거고. 이제 알면서 같은 행동을 하면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카멀라가 일어나려는데 재준이 한마디를 건넸다.
“고든, 조심하세요.”
카멀라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고 수치심으로 입술을 잘게 씹었다.
“고든을 아세요?”
“카멀라, FEMA의 기록을 뒤져보면 항상 보좌관은 고든이란 인물일 겁니다.”
“그게 무슨?”
“그레이의 보좌관은 누가 되었든 이름이 고든이에요.”
< 제449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20) > 끝
ⓒ 번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