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48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19) >
“무시한다고 그게 해결이 되나?”
“당연하지. 말을 섞지 않는데 자기들이 뭐 어쩔 거야. 서양 사람들은 이상해. 자꾸 뭔가 설명하려 들거든. 근데 입을 닫아. 절대 대꾸하지 마. 그리고 잘 봐봐, 어떤 현상이 일어나나.”
“그럼, 어떻게 되는데?”
“설명을 들어야 하는 인간들은 아주 속이 시커멓게 탈걸? 개인적으로 전화도 올 거야. 따로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지만 그마저도 거절하면 상대는 거의 짜증이 한계까지 다다를 거야. 그런 인간 다루는 거야 쉽잖아.”
“개무시…….”
미래당 의원들이 서형길의 말에 동조하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래, 뭐 싸울 필요가 있겠어.
-우리의 정책과 법안을 국민에게 설명하면 그만이지.
-맞아, 이제 정치도 변해야 해. 언제까지 양당 체제처럼 국민을 외면하는 정치를 할 수는 없지.
이때.
문이 열리고 재준이 들어섰다.
“임재준.”
도날드가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모두의 시선이 재준에게 쏠리며 일제히 입을 닫았다.
뭐야? 이 분위기는.
“무슨 일 있습니까?”
“드디어 백악관에서 의회를 사우스다코타에서 열겠다고 해서 다들 걱정하고 있었어요.”
“아, 의회. 그런데 이런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도 의회의 동의를 얻어서 처리해야 하는 겁니까? 누가 하나 총대를 메고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야 진척이 있을 텐데요.”
“그 누군가를 정하는 것은 일단 선거를 통해서 정해야 합니다.”
“선거……. 그거 인터넷으로 해도 되는 거잖아요.”
“인터넷으로 하면 조작을 할 여지가 많습니다. 지난번에도 러시아가 선거에 개입해서 말들이 많았잖아요.”
“그게 다 자신에 대한 신용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이 말도 맞는 것 같고 저 말도 맞는 것 같고. 그럴 때는 ‘카리브’에 물어보면 되잖아요. 그러라고 만든 건데.”
“‘카리브’요?”
“그럼요. 선거에 가장 유용한 게 ‘카리브’일 것 같은데.”
“투표는 그렇다 쳐도 후보는 각 당에서 추천해야 할 텐데요.”
“아니, 지금 그 당을 믿고 있다가 핵을 쏘는 사달이 났는데, 국민한테 또 당에서 추천하는 사람을 투표하라고 하면 하겠어요? 유세하다 돌 안 맞으면 다행이지.”
돌이면 다행이지. 총알도 날아올 판인데.
“그렇다고 아무나 후보가 될 수는 없잖아요.”
“왜 안 돼요? 인터넷을 이용하면 가능하죠. 일단 사이트든 앱이든 하나 만들고 국민은 자신이 생각하는 후보를 누구라도 괜찮으니 등록하라고 하세요. 꼭 정치인이 아니어도 상관없으니 아무나. 단 후보자의 동의는 있어야겠죠.”
“그럼 수많은 후보가 나올 텐데요.”
“무슨 상관이에요. 컴퓨터가 일하지 인간이 일합니까? 자, 후보가 등록됐으면 투표를 시작합니다.”
“후보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살펴볼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카리브’에게 물어봐야죠. 이 많은 후보 중에 나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후보가 누구냐, 이렇게.”
“아, ‘카리브’에게…….”
“그렇죠. 집계는 순식간에 다 처리될 겁니다. 1차 후보를 가려서 2차 투표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3차, 4차, 50% 이상 득표를 한 후보가 나올 때까지 계속 진행하면 금방 끝날 것 같은데.”
“후보를 검증하지 않아도 될까요?”
“그걸 할 필요가 있을까요? 매번 후보 데려다 놓고 부동산이 어쩌고 학위가 어쩌고 하지 말고 ‘카리브’에게 맡기면 ‘카리브’가 알아서 걸러 줄 겁니다. 만약에 옆집 아저씨가 너무 맘에 들어서 후보로 내세웠다 칩시다. 그럼 ‘카리브’는 옆집 아저씨에게 후보로 나설 건지 물어볼 겁니다. 옆집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과거에 떳떳한 사람이라면 후보로 나설 것이고 혹시나 어두운 과거를 숨기고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거절할 겁니다. 이러면 후보에 대한 검증은 잘 마무리되지 않을까요? 불만도 최소화되고. 그리고 수만 명, 수십만 명이 후보로 나와도 순식간에 처리될 겁니다.”
“그럼 ‘카리브’가 원하는 후보가 당선되는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예요. 도날드, ‘카리브’ 안 써봤죠.”
헉.
“사실 뭔가 고르기 힘들 때, 가끔.”
“에이, 열심히 해보면 편한데. 어쨌든, ‘카리브’는 주인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해줍니다. ‘카리브’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자신의 주인이 당뇨병 환자면 당뇨병 환자에게 가장 유리한 공약을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겁니다. 극단적으로 주인이 연쇄 살인마면 연쇄살인에 적합한 공약을 내건 후보를 선택할걸요?”
“그건 좀.”
“예가 그렇다는 겁니다. 예가.”
“아, 그렇죠.”
주변이 술렁였다.
-‘카리브’를 이용하는 선거라면 유권자들의 불만이 많이 줄어들긴 하겠네.
-하지만 정치인의 입지가 줄어들겠지.
-무슨 소리. 오히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최선의 선택이 되는 거잖아. 권위가 더 높아지지.
-그런가?
재준도 의원들의 반응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야 중요한 선택을 인공지능에게 맡기기 시작하겠네.
“그럼, 지금 미국의 재난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등장하겠네요.”
“그렇겠죠.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순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모두의 시선이 재준을 향하고 있었다.
재준이 좌우로 눈을 굴리며 상황을 직감했다.
“어허, 난 무조건 후보 사퇴입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절대 안 합니다. 무조건 사퇴. 아니 더 확실히 해야 해.”
재준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카리브’, 나한테 들어오는 추천은 무조건 거절이야.”
도날드가 재준의 스마트폰을 슬며시 잡았다.
“아직……. 법안도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아, 그러네. 내가 김칫국을 먼저……. 죄송합니다.”
“근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원을 통과하는 건 문제가 없는데 상원 통과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때, 도날드의 비서가 다가와 무언가를 전달했다.
“임재준, 대통령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겠어요?”
“잘 전달하고 말고가 있습니까? 문제는 선택인데. 선택하지 않으면 저희는 자치국을 선언할 겁니다.”
“오,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네요.”
도날드가 재준을 보며 주먹을 쥐어 보이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자, 카멀라, 그레이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선 안 통해.
***
FEMA 보좌관실.
고든은 스마트폰을 책상에 올려놓고 누군가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멀라가 도날드와 담판을 지을 수 있을까?
그레이가 미국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가능성이 꽤 높았다.
정부는 이미 장악되었고 언론도 통제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의회.
의회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재난을 회복하는 동안 의회 동의 없이 대통령이 단독으로 모든 행정을 지휘할 수 있는 재난 통제 법안만 통과하면 미국을 손안에 쥘 수 있었다.
대통령은 이미 자신과 통정의 관계.
의회, 상원은 이미 작업이 끝났으니 남은 건 하원.
도날드 설득에 실패해도 상관없다.
선거에서 이기면 되니까.
하원의 임기는 2년, 그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무조건 사우스다코타에서 의회를 열기만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안을 통과시킬 자신이 있었다.
띠링.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고든은 재빨리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성공, 마지막 선거 방식이 문제이지만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야.]
좋아, 이제 다 됐다.
고든은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악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그레이는 실눈으로 고든을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냐고?”
“아, 네. 카멀라가 도날드와 협상을 잘 마무리한 것 같습니다.”
“그래?”
“네.”
“근데 그게 자네가 좋아할 일인가?”
“마지막 고비 아닙니까? 의회만 장악하면 미국을 저희 뜻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미국을 손에 넣는 거지. 미국을 손에 넣는 건 세계를 손에 넣는 거고. 그렇게 보면 세상은 참 쉬워.”
“이런 날이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청장님도 나이가 많이 들었고요.”
“내 나이를 왜 자네가 걱정해? 청장하고 싶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아니야, 이제 나도 좀 쉬고 싶어.”
“네? 아니 인제 와서 그런 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저기 폐허가 된 동부를 재건하려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지끈거려. 저걸 언제 하나 하고.”
“걱정 마십시오. 아래에서 잘 처리할 겁니다.”
“그래, 내가 삽을 들고 건물을 올릴 건 아니니까.”
에고, 에고.
그레이가 자신의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고든, 투마로우에 대한 건 잘 처리할 수 있지?”
“정확히는 임재준입니다.”
“아, 그렇지. 임재준.”
“법안이 통과되면 언론에서 일제히 나노봇에 대한 의심성 기사를 쏟아낼 겁니다.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칩니다.”
“임재준이 가만있겠어?”
“반박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겁니다. 언론은 더 깊이 파고들 테니까요. 그럼 FBI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게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미국을 떠나는 선택을 할 겁니다. 그때는 투마로우에 압류 통지를 하고 모든 경제 활동이 정지될 겁니다. 시간이 걸릴 뿐 임재준을 떨어내는 건 기정사실입니다.”
“그래, 지금까지 임재준에게 당한 기업인들 끌어내서 합류시켜.”
“이미 조치는 다 해 놓았습니다.”
그래, 그래, 고든이 일은 참 잘하는데.
그레이가 내선 버튼을 눌렀다.
삐.
“들어와.”
벌컥.
검은 양복을 입은 장정 넷이 들어와서 고든 옆에 섰다.
고든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미 조치를 다 취해놨다며.”
“그럼…….”
“맞아, 이제 네가 쓸모가 없어졌다는 거야.”
“청장님.”
고든의 머리에서 경종이 울렸다.
들킨 건가?
“에이, 재미는 충분히 봤잖아. 그럼, 잠시 쉬고 있어도 돼. 카멀라가 어떻게 나오나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어? 너를 위해 자신을 버릴지, 아니면 너를 버리고 자신을 지킬지.”
“알고 있었습니까?”
고든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내가 모르는 게 있으면 안 되잖아. 근데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 장난감을 더럽히고 있는데 그걸 모를 리가 있나? 카멀라한테는 내가 잘 말해줄게.”
고든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레이를 위해 일하면서 그의 스타일을 너무 잘 안다.
아마 빌라에 감금되어서 결국에는 죽일 것이다.
그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친다.
휙.
고든이 가슴 안쪽에 있는 권총을 꺼내려고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검은 양복의 몸놀림이 워낙 빨랐다.
검은 양복 하나가 고든의 팔을 비틀고 머리를 소파에 대고 눌렀다.
윽.
그레이가 고든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고든, 그동안 수고했어.”
“이러지 맙시다. 지금까지 내가 당신을 위해 해준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에이, 그런 걱정은 하지 마. 그 수고는 내가 다 전달해 줄 테니까.”
그레이가 일어나서 누군가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누군가 고든 앞에 섰다.
고든이 억지로 얼굴을 돌려 그를 봤다.
뭐야, 이게.
“그레이, 이 개새끼.”
“하여튼, 너도 참. 인사해, 고든. 고든이야.”
“고든입니다.”
고든 앞에 고든과 똑같이 생긴 고든이 고든에게 손을 내밀었다.
< 제448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19)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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