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39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10) >
“우리를 테러 단체로 만들어서 재난의 책임을 물을 거란 말입니까?”
마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책임을 져야지. 방금 말했잖아. 나노봇을 퍼뜨린 건 앤서니라고.”
“하지만 증거는 없습니다.”
“오,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나 보네. 맞아, 증거는 없어. 아니,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 거야.”
마크가 그레이를 노려봤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FEMA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럼, 재밌는 동영상 하나 보여줄까?”
그레이 말이 끝나자마자 보좌관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자, 이건 뭐 아는 사람은 다 본 동영상이야.”
동영상을 재생하자 데미안이 방독면을 쓰고 플로렌스 교도소에서 다이로와 제이콥을 탈옥시키는 CCTV 장면이 보였다.
“이건 교도소 내 CCTV에 잡힌 거니까 확인해 보면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아. FBI나 CIA에도 있고. 아마 방송국에도 있을 거야.”
방독면?
“이게 증거가 됩니까?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데.”
“어허, 거, 성격 급하기는 기다려 봐.”
그레이가 또 다른 CCTV 영상을 재생했다.
이번엔 위쉬안이 데미안을 어깨에 둘러메고 소형비행기로 다가가는 영상이었다.
“이게 누군지 알겠지?”
위쉬안?
마크의 고개가 잠들어 있는 앤서니에게 돌아갔다.
앤서니, 정말 네가 나노봇을 퍼뜨린 거야?
“이제 위쉬안에게 물어보면 끝나는 거잖아. 나중에 한번 진지하게 얘기해 봐. 아, 마크, 자네는 데미안이 누군지 모르지? 아닌가? 일고 있나? 아무튼, 어디 있더라. U튜브에 쫙 깔린 영상이 있는데……. 여기 있다.”
그레이가 U튜브에서 국토안보부가 ‘기억의 길’에 폭력을 행사하고 앤서니를 체포해 가는 영상을 보여줬다.
“여기, 이 아이가 데미안이야.”
그 사건 당시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데미안이 보였다.
마크도 보았던 영상이었다.
탈옥 영상과 지금 영상을 번갈아 떠올리며 데미안의 실루엣을 비교했다.
아니라고 우길 수도 있지만, 확실히 같은 아이가 맞아.
“그럼, 진짜 중요한 걸 볼 차례야.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마음의 준비까지?
꿀꺽.
마크가 마른침을 넘기며 빌을 돌아봤다.
빌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레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레이가 CCTV 동영상을 재생하자,
으악!
마크가 튕기듯이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영상에는 기계로 된 아이가 잠시 물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물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그레이가 눈을 치켜뜨며 놀란 마크를 봤다.
“이게 데미안이야.”
“저건 로봇 아닙니까?”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 로봇이 된 것 같아. 우리도 처음엔 믿지 않았지. 하지만 여기. 이 영상보다 한 달 전 영상이 있어.”
또 다른 CCTV 동영상이 재생되자 인간의 모습을 한 데미안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멀쩡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걸 종합해 보면 ‘기억이 길’을 떠난 데미안이 아칸소강까지 가서 나노봇을 이끌고 물속으로 들어간 거야. 데미안의 영상은 우리만 가지고 있어. 강을 따라 설치된 CCTV를 전부 지워 버렸거든.”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글쎄. 이 문제에 대해선 빌이 더 잘 알 것 같은데. 안 그래, 빌?”
후.
빌이 두 눈을 감고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빌이 묵비권을 행사하는데,
“우리도 모르는 게 많습니다.”
빌이 아닌 다른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일제히 시선이 앤서니를 향했다.
어느새 앤서니가 깨어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레이가 비릿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알아, 임모탈 외에 완벽한 기계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없어. 여긴 그만한 기술이 없을 테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그레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알고 싶은 거야. 도대체 빌, 앤서니, 너희들이 무엇을 본 건지. 빌?”
빌은 그레이를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다 알고 온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린 모두 보지 못했어요. 위쉬안이 데미안을 데려와서 저 방 안으로 데려다 놓은 것도 나중에 들어서 알았습니다.”
빌이 앤서니 뒤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문 옆으로는 긴 커튼이 유리 벽을 가려주고 있었다.
그레이가 커튼으로 다가가 천천히 커튼을 옆으로 밀었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후후후.
남겨두었을 리가 없지.
“이 방에 무엇이 있었을까? 무엇이 있었는데 인간이 로봇으로 변했을까? 빌, 이러면 곤란해.”
“다시 말하지만 난 보지 못했어요.”
그레이와 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둘 다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그럼, 위쉬안은 알고 있을까?”
“직접 물어보시죠.”
하하하.
그레이가 웃음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했다.
“미안, 미안. 이거 내가 남의 종교의 비밀을 너무 캐물었네. 이게 중요한 게 아닌데 말이야. 앤서니,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앤서니가 그레이를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신의 계시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아, 맞다. 사제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지. 그래 신의 계시는 언제 도착하는 건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신의 계시가 도착하기 전에 내가 먼저 제안을 할까?”
모두 제안이라는 말에 그레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마존이 투마로우 손에 떨어지는 건 알지? 더이상 인터넷으로 돈을 벌지 못하니 아마존은 더는 버티기 힘들 거야.”
빌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어찌나 세게 다물었는지 입가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그다음은 어디가 될 것 같아? 구글? 애플? 인터넷 다음 먹거리를 찾아 기후니 코로나니 하면서 헤매는 것 같던데. 빌, 다음 먹거리를 찾았나?”
빌은 할 말이 없었다.
“찾긴 했을 거야. 앞으로 50년간 벌어먹을 게 뭔지는 알겠지만 그게 쉽지 않아. 그런데 투마로우는 이미 잘 해 먹고 있단 말이야. 그러니 이제부터 빅테크라 불리는 기업들은 투마로우가 던지는 빵부스러기나 주워 먹을 수밖에 없을 거야. 이것도 잘 알고 있지?”
빌이 그레이를 노려봤다.
“투마로우와 손을 잡으면 됩니다. 이미 임재준과 우리는…….”
아냐, 아냐.
그레이가 빌의 말을 잘랐다.
“그건 임재준 밑에서 하인 노릇이나 하는 거잖아. 안 그래? 당신들이 투마로우 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어? 그리고 저 강 건너 핵융합 발전소는 어떻게 할 거야. 이미 사람들 머릿속에 심어 놓은 나노봇은 어떻게 할 거고.”
쯧쯧쯧.
그레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미 끝났어. 그래서 빌 당신은 자꾸 다른 곳에 투자하는 거 아냐? 의학이니, 식량이니 하면서. 투마로우와 대적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서 말이야. 그래서 데미안도 끌어들인 거고. 하지만 이를 어째. 데미안이 재앙 덩어리가 되어 버렸으니. 이 사실을 세상이 알면 어떻게 될까?”
“협박입니까?”
“응, 협박하는 거야. 우리와 손을 잡지 않으면 다시는 햇빛 구경할 수 없는 독방에 처넣을 거라고.”
후.
“뭘 하려고 우리를 끌어들이는 겁니까?”
“궁금하지?”
그레이가 등을 쫙 펴고 목에 힘을 주었다.
“FEMA는 미국이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 앞으로도 쭉 남아 있게 하는 게 목적이야. 그러려면 힘이 필요해. 아주 강력한 힘이. 근데 그 힘을 투마로우가 가지고 있으니 아주 불편해 죽겠어.”
“투마로우를 망하게 할 작정입니까?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까?”
“가능하지 않지. 맞아. 불가능해. 그래서 모두 힘을 합쳐 임재준을 궁지로 몰아넣어야지. 이번에 백악관이 ‘기억의 길’을 무너뜨리기 위해 앤서니를 몰아세우는 거 봤지?”
“투마로우를 테러 집단으로 만들려는 겁니까?”
“아니, 말귀를 왜 이렇게 못 알아먹어? 임재준만 테러범으로 몰아간다고.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잖아. 지금 데미안이 아주 열심히 일을 해주고 있는데, 우리가 그런 데미안을 실망시키면 안 되지.”
“데미안?”
빌의 머리가 서늘해졌다.
미친놈.
지금 일부러 데미안을 방치하겠다는 거잖아.
“투마로우가 이미 나노봇을 없앨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데미안은 곧 투마로우에 의해 사라질 겁니다.”
“그래, 맞아. 이대로 간다면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항상 변수는 있게 마련이라니까.”
“변수라니요?”
“멕시코만은 태풍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잖아. 태풍과 나노봇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뭐라고?
“지금 일부러 데미안과 태풍이 만나게 내버려 두는 겁니까? 태풍을 만나면 나노봇이 사방으로 흩어질 거예요. 미국 전역에서 그레이 구가 생길지 몰라요. 진짜 재앙이 될 겁니다. 당장 데미안의 진로를 다른 곳으로 틀어야 해요.”
“왜?”
“왜라니요? 당연한 것을……. 당신 미쳤어.”
“맞아. 잊으면 안 돼. FEMA는 재난이 일어나야 활동하는 곳이라는 걸 말야.”
“안 돼. 그렇게 되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야. 전 세계가 그레이 구의 재앙에 노출된다고.”
빌이 벌떡 일어나 그레이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대로 저 정신병자가 하는 말을 계속 들어야 하나.
일부러 재난을 만든다고.
흐흐흐.
그레이의 입에서 비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우리와 손을 잡으면 살 수 있다니까?”
이…… 미친놈.
빌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데,
“협조하겠습니다.”
믿기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앤서니의 목소리였다.
“투마로우에서 임재준과 진을 떨어뜨려 준다면 협조하겠습니다.”
앤서니…….
빌과 마크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앤서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재앙을 만드는 거라고.”
“압니다. 하지만 데미안과 태풍이 만나기 전에 임재준과 진을 물러나게 하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될 겁니다.”
짝짝짝짝.
하하하하.
그레이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렇지. 바로 이런 정신이 필요하다니까. 무조건 안 된다고 하지 말고 가능하도록 만들어야지. 앤서니, 아주 훌륭해. 살려 놓은 내가 다 보람이 느껴져.”
빌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앤서니를 봤다.
앤서니, ‘블랙’을 투마로우에서 해방시키려는 거니?
우리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
빌의 생각을 읽은 건지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럴 줄 알고 내가 알맞은 희생양을 만들어 놨으니까.”
“그건 또 뭡니까?”
“우리가 정면에 나서서 투마로우와 싸우진 않을 거야. 괜히 총알받이가 되는 건 무모하거든.”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거, 사람, 좀 진정해. 우린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벌써 흥분하고 그래? 흥분하면 지는 거야.”
빌어먹을 놈.
“앤서니,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기억의 길’ 신도들을 철수시켜줘. 나도 우리 요원들을 뺄 테니까.”
“알겠습니다.”
앤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싸움은 백악관이 해야지. 우린 무기가 없지만, 백악관은 법이란 무기가 있잖아.”
“새로운 법안을 만들어서 투마로우를 압박하겠다는 겁니까?”
“빌, 흥분하지 말라니까. 그리고 지원군도 있어.”
“지원군이요?”
“아서와 세르게이가 합류할 거야.”
“그럼 제프도 합류하는 겁니까?”
“아마존은 버려. 이미 너무 기울었어. 팔 하나는 줘야 투마로우도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 제439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10)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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