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34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5) >
FEMA.
“여기서 너무 일찍 죽인 거 아냐? 뭔가 더 실랑이하는 연출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쯧쯧.
그레이가 영상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헐.
보좌관이 그레이를 보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현장에선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래도 적절한 타이밍이었습니다.”
“그런가? 어디.”
다시 한번 돌려본 그레이가 그나마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보니 좋네. 좋아. 그럼, 앤서니는 어디 있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우리 쪽 아이들도 꽤 많이 붙였고요. 명령만 내리면 바로 움직일 겁니다.”
음.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결정이 잘 안 서네.”
“뭐가요?”
“앤서니 말이야. 우리 빌라에 데려다 놓는 게 좋을까, 아니면 ‘기억의 길’에 넘겨주는 게 좋을까 말이야.”
“우리가 ‘기억의 길’과 싸울 일은 없습니다. 넘겨주는 게 맞습니다.”
“그지? 나도 그게 좀 더 맘이 가더라고. 앤서니가 ‘기억의 길’에 들어가면 국토안보부가 또 난리 칠 텐데. 대비는 되어 있어?”
“마크가 움직였습니다.”
“어떻게?”
“마크가 사우스다코타주에 본사 이전을 단행했습니다.”
“오호,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인데? 그 주변을 발전시키겠다는 말이네.”
“거기에 더해 ‘기억의 길’이 주변에 방주를 세우려고 합니다.”
“알루미늄 돔 말하는 거지?”
“네.”
그러니까.
톡톡톡톡.
그레이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미국이 나노봇에 죽든 말든 우리는 살겠다?
“미국과 결별하겠다는 거네. 독자노선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앤서니는 당분간 안전할 겁니다. 그리고 며칠 전 도날드와 서형길이 ‘기억의 길’에서 빌과 마크를 만난 것 같습니다.”
“가만, 가만, 누구?”
“도날드요.”
“그놈 말고.”
“서형길 말입니까?”
“그래, 그래. 서형길. 임재준을 도련님으로 모시는 놈. 그놈이 ‘기억의 길’에서 빌과 마크를 만났다고……. 그럼 투마로우가 힘을 실어 줄 수도 있다는 거네.”
“그렇게 판단됩니다.”
오호.
이거 봐라.
‘기억의 길’이 투마로우를 등에 업고 도시를 만든다?
정부뿐만 아니라 나노봇에도 안전한 지역이 된다 이건데.
나노봇이 아칸소강을 따라 내려가면 마지막이 루이지애나, 그다음은 멕시코만, 바다다.
나노봇이 바다로 들어가 버리면 전 세계급 재난이 될 것이고.
만약 남미에 상륙한다면 그야말로 남아나는 게 없겠지.
그다음은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
전부 폐허가 될 수 있는데.
알 게 뭐야?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돼야 미국이 다시 선두 국가의 자리를 유지할 수도 있고.
어쨌든 미국 남동부만 버리면 되는 일인데…….
이 정도만 되어도 FEMA가 나설 일은 없겠는데…….
그레이는 다시 지도를 보았다.
근데 이거 참.
눈에 밟힌단 말이야.
미시간호
아칸소강은 오클라호마의 머스코지 지역에서 포르 깁슨 호수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
포르 깁슨 호수는 욘 마틴 저수지보다 열 배는 큰 호수.
그러나 정작 문제는 포르 깁슨 호수를 거슬러 올라가면 미시간호가 있다.
여긴 이야기가 다르지.
만약 나노봇이 미시간호로 향한다면?
미국 동부는 통째로 사라진다.
왜? 여기가 바로 오대호이니까.
슈피리어호, 미시간호, 휴런호, 이리호, 온타리오호 순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빠진다.
즉 미시간호에 나노봇이 도착하면 물의 흐름을 타고 최소한 네 개의 호수를 거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럼 그 아래에 있는 워싱턴, 뉴욕 다 사라진단 소린데.
사라진다? 그런 일은 없겠지.
월가에 많은 자산이 있는 투마로우가 막아 줄 테니까.
가만, 그런데 월가에 투마로우 자산이 있나?
투자은행 자산은 전부 시스템일 뿐이잖아.
데이터 센터.
실제 데이터가 월가에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아니, 그 비싼 월가에 데이터 센터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혹시 투마로우가 핵융합 발전소 주변에 데이터 센터가 있다면?
‘기억의 길’은 정부와 맞먹는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
왜 투마로우가 월가에 자산이 있다고 생각한 거지?
미친.
가만, 가만, 가만.
임재준 너 설마 나노봇을 미시간호로 움직이는 건 아니지?
왜 아니야? 그렇게 되면 동부와 북부는 거대한 장벽이 생기는 건데.
그동안 소외되었던 지역에 새로운 세력이라…….
개발은 해안가인 동부와 서부에 집중되어 있다.
동부는 정치와 금융, 서부는 과학과 기술.
중부, 특히 아무것도 없는 사우스다코타, 노스다코타, 몬태나, 와이오밍 같은 주들은 투마로우와 ‘기억의 길’이 들어서면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이럴 수가.
그걸 놓치고 있다니.
나이 먹으면 죽어야 한다니까.
“이봐, 투마로우 데이터 센터가 어디 있지?”
“투마로우 시티와 프랑스에 있습니다.”
“달랑 두 개? 아마존도 전 세계에 아홉 군데나 데이터 센터를 가지고 있는데. 투마로우가 두 개?”
“지금까지 파악한 것은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다시 전 세계를 뒤져서 다 파악해. 특히 미국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 당장.”
“네. 알겠습니다.”
멍청이. 멍청이.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어.
너무 오랫동안 재난이 없어서 늘어진 거야.
임재준, 설마 나노봇으로 미국을 둘로 나누려는 건 아니지?
그럼 정말 우리가 나서야 된다고.
***
라스베이거스 비밀 핵 기지.
“아니, 일을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망칠 수 있는 겁니까?”
대통령의 분노에 국토안보부 장관은 입을 다물었다.
“지대공 미사일이 해킹으로 무용지물이 되었다면 앞으로도 쓸모가 없다는 거 아닌가요?”
“그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준비 중입니다.”
“지금 나노봇이 위치토를 향하고 있어요. 위치토를 넘어서면 강물의 양이 급속히 불어납니다. 그 전에 막아야 할 거 아닙니까?”
“가든 시티에 접근 전에 소이탄을 사용할 계획입니다. 이미 전투기도 대기 중입니다.”
“전투기는 해킹당하지 않는단 보장이 있습니까?”
“전부 수동으로 진행할 겁니다.”
하. 참나.
대통령은 라스 애니머스 작전 실패로 몇 배나 불어난 그레이 구 때문에 속이 탔다.
이제 그레이 구가 지나가는 강 주변의 도시는 폐허로 변했다.
콜로라도와 캔자스는 다음 선거에서 아예 후보를 내지도 못하겠네.
이때.
“대통령님.”
비서실장이 급하게 들어서며 대통령을 불렀다.
또 무슨 일이 터졌네.
“무슨 일이야?”
“앤서니가 호송 도중 테러로 인해 크게 다쳤습니다. 지금 인근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 중입니다.”
대통령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면서 국토안전부 장관을 향했다.
진짜 병신 같은 게,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네.
“테러범은 잡았어?”
“현장에서 FEMA 요원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그런데 테러범이 경찰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사살되었으면 누가 매수했는지 모르는 거네.”
“네, 죄송합니다.”
“괜찮아. 자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누가 병신같이 일을 한 게 잘못인 거지.
그래도 사살되어서 입을 열 일은 없어졌네.
이때, 또 다른 비서실 직원이 뛰어 들어와서 비서실장에게 귓속말로 무어라 말을 하고 나갔다.
대통령은 비서실장의 입 모양에서 ‘지저스’를 보았다.
“또 무슨 일입니까?”
“바람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강물의 흐름이 예상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1시간 안으로 시속 1km를 넘을 것 같습니다.”
“이런, 미친.”
대통령의 입에서도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휙.
거칠게 국토안보부 장관을 노려봤다.
“장관, 무슨 계획 없습니까?”
“이, 있습니다. 중간에 시라큐즈라는 작은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당장 전투기를 띄워서 소이탄을 퍼붓겠습니다.”
“당장 띄우세요.”
“네.”
국토안보부 장관이 나가고 대통령이 영상을 봤다.
갑자기 빨라진 바람.
신이시여,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는 겁니까?
이때, 또 다른 비서실 직원이 비서실장에게 다가와 속닥이고 나갔다.
역시 비서실장의 표정은 안 좋았고 이번엔 고개까지 숙였다.
“왜? 또 무슨 안 좋은 소식인데?”
“그게…….”
비서실장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자,
“빨리 말해. 숨긴다고 해결될 시기는 지났어.”
“네, 앤서니가 사라졌답니다. 병원에서 감쪽같이.”
“뭐? 사라져? 아주 쌍으로 지랄을 하는구나. 쌍으로.”
아이고 머리야.
-대통령님. 전투기 출격했습니다.
요원의 외침이 대통령을 모니터로 시선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래, 제발 뭐라도 성공하는 걸 봤으면 좋겠다.
화면에는 전투기 세 대가 출격하는데 각자 카메라를 장착하여 모니터 세 군데에서 각기 다른 영상을 보여줬다.
그리고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영상 십여 대가 포함되었다.
쐐애애애액.
전투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어지럼증을 유발했다.
-여기는 플라이 원, 여기는 플라이 원. 목표 지점이 보인다.
-플라이 투. 이쪽에서도 보인다.
-플라이 원, 소이탄 투하를 위해 하강하겠다.
-플라이 투. 뒤따른다.
-플라이 쓰리. 뒤따른다.
쐐애애애애액.
비행기가 하강하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 비행기가 다가온다. 비행기가 다가온다. 한 대가 아니다 수십 대가 다가온다. 모두 전투 대형으로 펼쳐라. 다시 반복한다. 모두 전투 대형으로 펼쳐라.
비행기의 어지러운 화면으로 식별이 잘 안 되지만 지상의 카메라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수십 대의 경비행기가 전투기를 향해 무조건 돌진했다.
전투기는 역시 전투기였다.
경비행기 수십 대 사이를 누비며 전부 격추하기 시작했다.
쐐애애애애액.
쾅, 쾅, 쾅, 쾅.
슈우우우웅.
수십 대의 경비행기의 잔해가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런 미친, 저게 뭐야?
다시 하늘에 수천 대의 경비행기가 나타났다.
문제는 첫 번째 전투를 통해 학습한 듯 경비행기 수백 기가 동시에 전투기의 움직이는 동선을 예측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쐐애애애애액.
-으아아아악. 피할 수가 없다. 피할 수가 없어.
쾅.
순식간에 전투기 세 대가 불타오르며 추락했다.
콰콰쾅.
대통령의 고개가 끼끼끼끽 소리를 내는 듯 돌아가더니 비서실장을 향했다.
“이제 남은 게 뭐가 있지?”
“대통령님, 아직 핵은 좀 더 신중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뭐가 더 있냐고 물어보는 거 아냐?”
비서실장의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진짜 핵을 써야 하는 건가?
***
엄마, 아빠.
데미안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두 단어.
바다, 바다로 가야 해.
유일하게 행복했던 기억을 쫓아 하염없이 나아갔다.
치직, 치직.
고장 난 컴퓨터 화면처럼 노이즈가 잔뜩 낀 영상들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데미안의 대뇌가 거의 망가져서 그 부분은 인공 신경망으로 대체되었고 나노봇이 끊임없이 전기 신호를 전달했다.
하지만 인간의 뇌와 인공 신경망은 서로 불협화음을 냈다.
뇌는 인공 신경망을 침입자로 생각하며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심장이 멈추기 전에 수술을 끝내야 했기에 많은 부분을 생략했다.
그 부작용은 너무 심했다.
데미안의 의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의 의미도 희미했다.
거기다 인공 신경망에 심어진 통신 주파수는 나노봇을 데미안의 주위로 몰려들게 했다.
앞에 라킨이란 작은 도시를 연결하는 다리가 보였다.
하지만 데미안의 눈에는 치직, 치직 고장 난 영상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의식하지 못했다.
자신은 앞으로 앞으로 걸어갈 뿐.
푸석, 푸석, 푸석.
나노봇들은 데미안의 주위에 있는 탄소들로 끊임없이 복제를 하고 있었다.
너무도 위험한 존재치고는 데미안도 나노봇도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때,
치직, 치직, 치직.
데미안의 귓가에 통신 주파수가 들렸다 끊겼다 했다.
영어가 아니다.
스페인어다.
치직, 허리케인, 치직, 900헥토파스칼, 치직, 치직, 80미터, 치직 치직.
바다, 바다로 가야 해.
< 제434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5)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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