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30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1) >
미주리강.
재준과 그레이가 조그만 나룻배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었다.
“성격 참 특이하네. 이렇게 조그만 배에서 무슨 낚시야. 세계 제1의 재벌이.”
이거 위험한 거 아냐?
그레이가 퉁명스럽게 재준을 쏘아붙이며 강을 이리저리 둘러 봤다.
“여긴 나노봇이 없어요. 그렇게 두리번거리지 마세요.”
“그걸 어떻게 알아?”
“무슨 나노봇이 쾌속선입니까. 아칸소강에서 1,000km도 더 떨어진 미주리강까지 며칠 만에 달려오게. 나노봇 이동 속도가 시속 10m예요. 기껏해야 하루에 240m.”
“물속에선 더 빠르게 움직인다며?”
“아유, 정말, 그럼 저 아래 미시시피까지 갔다가 여기로 올라와야 하는데. 나노봇이 무슨 연어입니까, 강을 거슬러 올라오게?”
으흠.
“그런가.”
“근데 용건이 뭡니까? 천하의 FEMA 청장님이 나를 다 보자고 하게.”
“큭, 다 알면서 뭘 물어보는 거야? 지금 재난 상황인데. 투마로우 대책 좀 들어봅시다.”
“대책이요? 없습니다.”
“무대책이야?”
“지금까지는 아무 생각 없습니다.”
“허, 이거 나랑 밀당을 하자는 거야?”
“먼저 불러낸 사람이 누군데 밀당을 합니까?”
“나노봇 해결책 좀 알려줘.”
“없다니까요.”
“우리가 앤서니를 꺼내 줄게.”
“앤서니는 거기 좀 가두어 놓는 게 우리를 도와주는 거예요. 괜히 나서지 마세요.”
“앤서니가 필요 없다고?”
“그럼요.”
그래?
그레이가 히죽거리며 재준을 빤히 쳐다봤다.
‘블랙’의 신봉자가 필요 없다?
‘사이진’이 있으니 조직 걱정은 없다 이건가.
“그럼 다이로를 잡아다 줄게.”
“걔는 어차피 제 발로 내 앞에 올 거예요. 힘쓰지 마세요. 괜히 그러다 다쳐요. 다이로 걔 꽤 거친 놈이에요.”
“다이로가 나노봇의 일부를 가지고 있는 건 알지?”
“헉, 그래요? 큰일이네. 브라질이 난리가 나겠네. 이 기회에 알루미늄 돔이나 팔아먹을까.”
“브라질 걱정도 안 돼?”
“남의 나라 걱정을 내가 왜 해요? 지금 여기도 급해 죽겠는데.”
그래?
임재준 이놈 만만치 않네.
그럼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 하나?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지금 쓸 시기가 아니지.
“좋아, 원하는 걸 말해 봐.”
“아니, 원하는 거 없다니까요. 할 말이 있으니까 찾아온 거 아닙니까? 먼저 FEMA에서 원하는 걸 말해 보세요.”
“난 원하는 게 없는데.”
“아니, 그럼 왜 만나자고 한 거예요?”
“그야, 국가 재난 상황이니까.”
“그럼 빨리 가서 국가 재난을 극복해야지. 지금 나랑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러게.”
그레이가 재준을 보며 ‘진짜 원하는 거 없어?’라는 표정을 지었다.
“거, 정말 없다니까 그러네요. 청장님이 아무리 그렇게 노려봐도 없는 건 없는 거예요.”
“좋아. 그럼 나노봇이나 처리해 줘.”
“거참, 방법이 없다니까 그러네. 나노봇이 무슨 처리 하겠다고 하면 처리가 되는 겁니까?”
“만들었으면 없애는 방법도 알 거 아냐?”
“지금은 가두어 놓고 고열로 탄소를 태우는 방법 이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그러면 미국 전체가 불바다가 된다고.”
“그러니까 급할 때 아니면 사용 안 하고 있잖아요.”
“허, 거참.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숨기긴 뭘 숨겨요? 그나저나 이번 사태를 FEMA가 해결할 겁니까?”
재준이 그레이를 째려보며 말했다.
“뭘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FEMA가 나서면 대통령 끌어내리고 대신 국가를 운영할 거잖아요.”
“안 나서. 아직 그 정도 위기 아니야.”
“의심스러운데. 아무튼, FEMA가 나서는 건 상관없는데 내 물건에 손대면 싸움 납니다.”
“안 건드려. 거, 내가 무슨 돈에 환장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 쪽으로 보지 마.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네.”
“마찬가지입니다.”
흥.
그레이가 재밌다는 듯 콧방귀를 끼면서 재준을 보고 미소를 짓는 그때.
띠리리리링.
그레이의 폴더폰이 울렸다.
“왜?”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그레이 구가 생성되었습니다.
“그레이 구?”
그레이의 미간이 구겨지며 재준을 바라봤다.
재준도 스마트폰을 꺼내 ‘블랙’을 호출했다.
“그레이 구라니?”
【데미안을 중심으로 나노봇이 모이고 있습니다.】
“데미안?”
재준이 그레이 청장을 노려봤다.
“데미안이 살아있는 거 아셨어요?”
“알고 있었지.”
“와, FEMA도 정보망이 만만치 않네. 근데 왜 말하지 않았어요?”
“물어봐야 대답을 해주지.”
이 사람이 나랑 똑같은 방법을 쓰네.
가만.
재준은 다시 ‘블랙’에게 돌아갔다.
“크기는 얼마나 되지?”
【현재 지름 100m 정도의 크기입니다.】
“알루미늄 돔으로 가둘 수 있어?”
【가능합니다.】
“그럼 당장 준비해.”
【네.】
이번엔 확실히 데미안까지 처리한다.
재준이 노를 잡았다.
어서 빨리 진코퍼레이션으로 돌아가서 대비책을 마련해야 했다.
서두르는 재준을 그레이가 붙잡았다.
“무슨 이야기야? 재난 상황에서 정보는 공유해야지.”
재준이 그레이의 재미 어린 표정을 봤다.
이 사람도 심장이 만만치 않은 인간이네.
정보는 주고 대비를 하는 게 낫겠지.
“현재 그레이 구 크기가 지름 100m랍니다. 지금 알루미늄 돔으로 가두고 소이탄으로 태울 거예요.”
“뭐? 100m면 너무 큰 거 아냐? 언제 그렇게 커진 거야? 소이탄으로 다 죽일 수는 있고?”
“만약의 사태는 대비해야죠. 빨리 서두르세요. 진짜 재난이 닥칠지도 모르는데.”
“왜 겁을 주고 그러지? 혹시 자신 없는 거 아냐?”
“그럼 직접 하시든가.”
쩝.
그레이는 재준을 보고 씁쓰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내가 나서면 안 좋은 일이 생기는데.
일단은 분위기는 만들어야겠지.
***
앤서니를 석방하라.
앤서니를 석방하라.
의회 앞에 끝도 없는 시민들이 모였다.
국토보안부를 당장 해체하라.
국토보안부를 당장 해체하라.
시민들의 얼굴은 분노로 이글거리다 못해 누구라도 죽일 기세였다.
탁, 탁, 탁.
성난 시민 앞에 단상이 하나 놓이고 사람 한 명이 등장했다.
아, 아, 아.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의회 대변인입니다. ‘기억의 길’ 사제 앤서니 체포에 대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발표?
시민들은 잠시 침묵했다.
꿀꺽.
대변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이 더 부담스러웠다.
“‘기억의 길’ 앤서니 사제는 나노봇을 유포한 협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이에 ‘기억의 길’에 대대적인 경찰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며 불응 시에는 법이 정하는…….”
죽여.
시민 중 한 명이 단상을 향해 쇠파이프를 들고 돌진했다.
죽여라.
그의 뒤를 따라 수십 명의 시민들이 달려들었다.
막아.
대변인을 둘러싸던 경찰이 일제히 진압봉을 들었다.
퍽, 으악, 빡, 아아악.
시민이 쇠파이프를 먼저 치켜들었지만, 경찰의 진압봉이 더 빨랐다.
경찰이 시민을 또 폭행했다.
우와아아아아아.
시민들이 일제히 의회를 향해 돌진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FEMA 그레이가 손가락으로 의회를 가리켰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달 이상은 지속될 겁니다. 더 시간을 끌까요?”
“아니야, 그 정도면 됐어.”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회를 바라보았다.
이제 분위기는 만들었고.
***
백악관.
“대통령님.”
비서실장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의회가 시위 중이던 시민들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뭐요? 미국 의회가 점령되었다고?”
“손을 쓸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니, 시위를 하던 시민들이 왜 폭도로 돌변했는데?”
“의회 대변인의 발표 후. 갑자기 일어난 일입니다.”
“뭐요? 의회 대변인? 의회에 대변인이란 직책이 있어?”
“네?”
아차.
너무 다급한 나머지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다.
“동영상 있어?”
“네, 여기.”
비서실장은 태블릿을 꺼내서 동영상을 재생했다.
의회 대변인이란 사람이 발표를 하고 시민들이 참지 못하고 달려들고 있었다.
“이 사람 누구야? 본 적 있는 사람이야?”
“저는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빨리 알아봐. 빨리. 이거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저지른 테러라고. 테러.”
“네.”
비서실장이 나가고.
“대통령님.”
이번엔 국토안보국 장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나노봇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벌써 미시시피강까지 도착한 겁니까?”
“그 반대입니다.”
“반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노봇들이 플로랑스 리버 공원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한 덩어리로 뭉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덩어리로 뭉쳐요? 그게 우리가 우려하는 그레이 구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런 미친. 지금 대비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칸소강에 퍼져 있는 화염방사기를 플로랑스 리버 공원 쪽으로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나노봇이 모였을 때 한 번에 태워 죽일 계획입니다.”
그래, 한 번에.
제발 한곳에 모여라.
대통령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그런다고 다 죽일 수 있겠어요?”
갑자기 들려오는 낯선 음성에 대통령과 국토안보국 장관이 몸을 돌렸다.
“그레이 청장.”
“그레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꼭 나노봇이 된 기분이니까.”
국토안보부 장관이 앞으로 나서며 그레이를 노려봤다.
“그렇게 불러도 안 나타나더니 어디 있다가 오신 겁니까?”
“우린 항상 바빠요. 누구처럼 평상시에 놀다가 위기가 닥치면 그제야 서두르진 않아.”
“뭐라고요?”
“조용히 하고. 아까 들어보니 화염방사기로 나노봇을 잡는다는 거 같던데. 그거 좀 뒤로 미루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시가 급한데.”
쯧쯧쯧.
그레이의 표정이 ‘한심한 놈’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투마로우가 나설 겁니다. 일단 두고 보세요. 그리고 실패하면 그때 나서도 늦지 않아요.”
투마로우?
대통령의 미간이 구겨졌다.
“또 투마로우입니까?”
“내가 보기에는 화염방사기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국토안보부 장관이 주먹을 꽉 주며 나섰다.
“지금 저희 군을 무시하는 겁니까?”
“맞아요. 무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먼저 나서지 말라는 거예요.”
“뭐요?”
“능력이 없으면 사태라도 잘 파악하든가?”
쯧쯧쯧.
그레이가 혀를 차며 대통령까지 무시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통령님.”
“그냥 밀어붙이세요. 저런 노인의 말을 일일이 다 들으면서 무슨 국정을 이끌겠습니까? 고인 물은 그냥 썩게 내버려 두는 게 상책입니다.”
“알겠습니다.”
대통령은 그레이가 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그것보다 지금 의회가 시민에 의해 점령되었다고 하는데. 이야기 들었습니까?”
“네, 오면서 보고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보는 눈이 많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방송 카메라만 수백 대가 동원되어 있습니다.”
방송.
그럼 어쩐다.
“앤서니의 자백이 필요한데. 어떻게 할 거 같습니까?”
“자백하게 만들어야지요.”
그래, 만들어야지.
반드시.
***
첨벙, 첨벙, 첨벙.
데미안이 아칸소강으로 들어갔다.
첨벙, 첨벙, 첨벙.
데미안이 물속으로 사라지고 주위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둥둥둥.
갑자기 물고기 수천 마리가 강 위로 떠오르며 빠르게 분해되기 시작했다.
강물의 색이 탁해지면서 죽어가기 시작했다.
< 제430화 그걸 넘기면 어쩌라는 거야?(1)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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