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23화 자, 그럼 이제 회사 가져와야지(29) >
백악관.
“시민들이라고 했습니까? 신도가 아니라 시민 맞습니까?”
대통령은 크리스토퍼 FBI 국장에게 보고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네, ‘기억의 길’ 신도들은 대부분 캡슐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실제 활동하는 인원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근데 범죄자를 보호하면 그들도 처벌 대상 아닙니까?”
“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기억의 길’ 혐의도 아직 안 씌웠는데 어떻게 범죄자가 돼?
“경고해야 할 것 같은데. 계속 범죄자를 감싸면 강제로 해산하겠다고.”
“거기 있는 시민 모두 콜로라도 피난민이고 50만이 넘습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겁니까? 알 수 없는 나노봇이 콜로라도를 덮쳤습니다. 비상시국이란 말입니다. 누구라도 이런 시국에 정부의 공무집행을 방해하면 어떻게 해야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질서 유지는…… FBI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희는 정보를 다루는 기관이지 무력을 사용하는 군대가 아닙니다.”
“그래요?”
훗.
대통령은 크리스토퍼를 향해 콧방귀를 내뿜고는 내선 버튼을 눌렀다.
삐.
-네, 대통령님.
“국토안보부 장관 들어오라고 하세요.”
국토안보부?
당신 ‘기억의 길’을 테러 집단으로 몰고 갈 생각입니까?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대통령이 놀란 크리스토퍼를 바라봤다.
“제가 말했을 텐데요. 기회는 원하는 만큼 잡아야 한다고.”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여긴 미국입니다.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신흥국에서나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입니다. 미국이라고 군대를 동원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의회의 비준을 거치지 않으면 후폭풍이 거셀 겁니다.”
“난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은 의회 비준 없이 대통령령을 발동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기고요. 두려우면 국장은 뒤로 빠지세요.”
크리스토퍼는 망연자실했다.
왜 이렇게까지 몰아치는 걸까?
아무리 비상시국이라도 그렇지.
이해는 한다.
경제 위기와 대재앙이 미국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도망쳐도 벌써 백 번은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 미국에서 어떻게 국민을 군대로 진압한단 말인가.
똑똑.
드디어 로이드 국토안보부 장관이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대통령님.”
“‘기억의 길’ 아시죠?”
대통령의 톤이 무겁고 거칠었다.
누가 들어도 화가 잔뜩 나 있는 투였다.
국토안보부 장관은 목소리만 듣고도 대통령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 것 같았다.
‘기억의 길’을 이 경제 위기를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으로 몰아가는 일은 정부 안에선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니까.
솔직히 경제 위기를 몰고 온 건 ‘기억의 길’보다도 미국의 금리 인상이 더 크다.
자기 살겠다고 금리를 인상해 놓고 이제 와서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정치인이 자기 잘못이라고 시인하는 건 본 적이 없지만.
“알고는 있습니다만…….”
“FBI 보고에 의하면 ‘기억의 길’ 배후에 아마존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존이 맞습니까?”
국토안보부 장관이 FBI 국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크리스토퍼가 대답했다.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였다.
크리스토퍼는 더는 관여하기 싫었다.
이제 폭탄을 국토안보부에 넘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야 그나마 자리라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토안보부 장관의 시선이 다시 대통령을 향했다.
“군대를 투입하길 원하십니까?”
“‘기억의 길’을 조사하려는데 콜로라도 피난민이 주변에서 길을 막고 있답니다.”
“피난민이면 그들은 민간인 아닙니까?”
“경찰 인원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고 하니 원.”
“민간인이라면 난감한 일입니다.”
“‘기억의 길’이 미국 안보를 크게 위협하는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테러요? 그런 보고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FBI입니다. 맞죠? 국장님. 내가 그렇게 보고를 받은 것 같은데.”
국토안보부 장관이 다시 크리스토퍼를 바라봤다.
거기서 FBI가 왜 나옵니까?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긍정을 하면 FBI가 대통령과 함께 죄 없는 국민을 탄압하는 것이고 부정을 하면 대통령의 잘못을 지적하는 꼴이 된다.
대통령이 미쳤다.
왜 자꾸 어렵게 만드는 거지?
나중에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이럴 땐 두리뭉실 넘어가야 한다.
“정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증거를 수집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허, 이거 FBI가 증거를 다 수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군요. 난 그런 줄은 몰랐네요.”
대통령이 국토안보부 장관을 향해 푸념을 내뱉었다.
이 정도 눈치도 없는 국토안보부 장관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지금부터 이 ‘기억의 길’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FBI는 손을 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 우리보고 손을 떼라고?
“뭐 그러시다면 저희가 물러나겠습니다.”
“협조에 감사합니다.”
대통령이 이때다 싶게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잘됐네요. FBI 손이 모자랐는데. 그럼, 크리스토퍼 국장은 중국에서 제프 베조스를 만나고 오는 건 어때요? 국토안보부가 ‘기억의 길’을 맡고 FBI가 아마존을 맡으면 서로 시너지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국토안보부 장관이 대통령 생각에 동조했다.
크리스토퍼는 어이가 없었다.
뭐? 중국?
빠져나가려고 국토안보부에 떠넘겼는데 공조 수사를 하게 생겼다.
어쨌거나 ‘기억의 길’을 건드리면 정말 안 좋을 것 같은데.
***
기억의 길 본당.
“사제님. 이번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정부도 이제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경고해야 합니다.”
“네, 맞습니다. 어떻게 회당에 허락도 없이 맘대로 들어올 수 있습니까? 이건 엄연한 불법 침입입니다.”
“무도한 무리들 같으니라고.”
앤서니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장로들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저도 참을 생각은 없습니다.”
“따로 생각하신 게 있으십니까?”
“신께서 저에게 혜안을 주셨습니다.”
오.
모두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았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네.”
앤서니의 말에 할 말은 많지만, 장로들은 고개를 숙였다.
앤서니는 조용히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콜로라도 피난촌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피난촌 가운데를 천천히 걸어갔다.
앤서니가 지나가자 알아본 사람들은 손을 동그랗게 말았다.
고개를 숙여 그들의 인사에 화답을 했다.
한참을 지나자 작은 건물 하나가 나왔다.
앤서니가 다가가자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저벅, 저벅, 저벅.
“앤서니 왔어?”
위쉬안이 앤서니를 맞았다.
둘은 유리창 너머 침대에 누워서 수술을 받는 데미안을 보았다.
수술은 우리에게 익숙한 팜봇과 로봇 팔들이 진행하고 있었다.
“데미안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지금으로선 그냥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지.”
“신은 반드시 데미안을 살리실 겁니다.”
“근데 저놈 살려봐야 좋을 거 없는 것 같은데.”
“신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저희에게 이로운 이로 거듭날 것입니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수술 장면을 지켜보는데.
‘삐’ 하고 경고음이 들렸다.
“도착했나 보군요.”
“그래도 시간은 잘 지키네.”
위쉬안이 스마트폰을 들어 화면을 터치했다.
동시에 문이 열리고 익숙한 세 명의 얼굴이 보였다.
빌, 아서, 세르게이.
앤서니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까딱였다.
“모두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앤서니의 인사를 뒤로하고 셋은 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데미안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살아날 수 있습니까?”
“그건 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빌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앤서니가 말한 신이 저기서 데미안을 살리고 있지 않은가.
“수술을 보면 예전의 데미안은 아닌 것 같군요.”
“더 강한 인간이 될 겁니다.”
빌이 수술 장면을 응시했다.
피 대신 레이저 불빛이 더 많이 보였다.
“데미안을 죽인 게 누굽니까?”
“다이로와 제이콥입니다.”
빌이 앤서니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데미안으로 향했다.
“그럼, 지금 콜로라도에 벌어진 일이 데미안의 작품이군요.”
“맞습니다.”
“바보 같은 녀석.”
대단한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세르게이가 앤서니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이제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신앙에 대한 것입니까?”
하하하.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아주 단순한 겁니다. 지금 밖에 있는 나노봇은 진화할 것입니다.”
“투마로우의 방어가 실패한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나노봇은 저게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레이 구를 아십니까?”
으, 그레이 구.
세르게이는 가슴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1986년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어떻게 현실이 되었을까?
자기 복제하는 나노봇을 만든다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복잡한 기계적, 화학적 작용이 필요하다.
나노봇이 살아남으려면 가장 기본적인 자기 복제 능력 외에도 에너지원을 찾아서 이동해야 하고 에너지원을 동력으로 변환해야 한다.
바이러스 크기의 인공물이 이러한 복잡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세르게이가 아는 한 이에 필요한 나노 화학 기술 중 어느 것도 개발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봇이 보온병 안에 가득 들어차려면 얼마나 많은 개수가 필요할까?
그리고 나노봇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닐 수 있고 물을 이용해 먼 곳을 이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나노봇이 만들어지는 순간 이미 막을 수 없다고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무얼 선택해야 합니까?”
그건.
“나노봇이 가져오는 대재앙을 막기 위해.”
앤서니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저희와 손을 잡을 것인지.”
왼손을 내밀었다.
“정부와 손을 잡을 것인지.”
선택하십시오.
앤서니가 양손을 다시 거두어들였다.
“‘기억의 길’과 손을 잡으면 우리도…….”
하하하.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신도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만약 정부와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럼, 저희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정부와 힘을 합쳐 나노봇을 이겨내시면 됩니다.”
세르게이는 아서를 봤다.
“아서.”
아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노봇을 연구하는 곳은 몇 군데 있어. 우리도 연구 중이야. 하지만 내가 아는 곳 중에서 저걸 막을 곳은 없어.”
세르게이가 다시 앤서니를 봤다.
“근데 ‘기억의 길’은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기억의 길’이 아닙니다. 저희가 막을 수 있는 겁니다.”
“저희라면 누굴 말하는 겁니까?”
“그냥 저희라고만 알고 계십시오.”
흠.
세르게이는 혼란스러웠다.
분명한 건 정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억의 길’을 믿을 수 있냐, 그것도 아니었다.
특히, 저, 저희라는 단어가 참 맘에 안 들었다.
누군가 뒤에 숨어 있을 것 같은 뉘앙스.
“앤서니.”
후후.
빌이 세르게이의 고민을 읽었는지 가볍게 웃었다.
“우리끼리 생각을 더 해볼 시간을 줄 수 있을까?”
“그럼요. 얼마든지요. 하지만 너무 많이는 드리지 못합니다. 저희도 우선 이 재앙을 피할 방주를 만들어야 하거든요.”
방주? 그리고 저희도라니, 누가 또 방주라는 걸 만드는 건가?
“그게 뭔지 알 수 있을까요?”
하하하.
“곧 아시게 되겠지만 투마로우가 알루미늄으로 핵융합 발전소 전체를 덮을 겁니다. 저희도 이 지역에 보호막을 칠 겁니다. 그걸 우린 방주라 부릅니다.”
이 넓은 지역을 알루미늄으로 덮는다고?
< 제423화 자, 그럼 이제 회사 가져와야지(29)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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