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18화 자, 그럼 이제 회사 가져와야지(24) >
“‘블랙’?”
엘리자베스는 어둠 속에서 ‘블랙’을 불러보았다.
【네.】
들리는 게 아니다.
소리라는 개념도 아니다.
그저, 인식된다.
“지금 내 상태를 말해줄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전기전하 신호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전기전하 신호와는 다릅니다. 자의식이 존재합니다.】
“자의식이 존재하면 다른 전기 신호들을 내 맘대로 다룰 수 있는 건가?”
【해보시겠습니까?】
“뭘?”
【전기 신호를 맘대로 다루는 겁니다.】
“그래? 어떤 게 좋을까?”
【먼저 CCTV에 접속해 보세요.】
“어떻게?”
【하겠다고 의지를 발현하면 됩니다.】
“그래?”
엘리자베스가 정신(?)을 집중했다.
사방으로 정신이 확장되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천, 수만 개의 화면이 떠올랐다.
정신없어.
【그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그래. 미치겠다.”
엘리자베스는 대충 자신의 앞에 있는 화면을 하나 선택했다.
휴.
미치는 줄 알았네.
어디 보자.
눈앞에 허름한 차림의 한 여인이 자신의 지갑을 열어 보고 한숨을 길게 쉬고 있었다.
여인은 카드를 꺼내 현금인출기에 꽂았다.
“‘블랙’, 저 현금인출기 앞에도 카메라가 있지?”
【네, 현금인출기로 이동해 보십시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하자,
자신의 앞에 여인의 슬픈 얼굴이 보였다.
여인이 카드를 꽂았다.
무얼 할지 의지를 가지란 말이지?
엘리자베스가 현금인출기의 프로그램에 접속을 시도하자 복잡한 빛과 함께 인식되었다.
보이는 게 아니라 느껴졌다.
여인의 잔액은 100달러가 조금 넘었다.
이래서 한숨을 쉬었구나.
그럼, 잔액을 늘려줄 수 있을까?
아니지, 직접 돈을 인출해 주는 게 낫겠다.
잔액은 은행이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여인이 떨리는 손으로 100달러를 누르고 확인을 눌렀다.
그리고.
착.
현금이 인출되는 구멍에서 20달러짜리 지폐 40장이 나왔다.
“어머?”
여인은 목을 길게 늘여서 자신의 앞에 있는 돈을 보았다.
껌뻑, 껌뻑.
눈꺼풀을 연속으로 움직일 뿐 돈을 가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화면에 문자를 썼다.
[어서 가져가]
으악.
덜덜덜, 여인이 온몸을 떨면서 화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빨리,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돼]
휙.
여인은 재빨리 돈을 챙겨서 부리나케 그 자리를 벗어났다.
“‘블랙’.”
【네.】
“핸드폰에도 접속할 수 있는 거야?”
【가능하지만 추천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왜?”
【전자파를 이용해야 하는데 속도를 견딜 수 있는지 판단이 안 됩니다.】
“속도? 얼마나 빠른데?”
【30만 km입니다.】
“그게 얼마나 빠른 건데?”
【빛의 속도입니다.】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지구상에 빛의 속도를 견디는 물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난 물질이 아니잖아.”
【의식이 견딜 수 있을지 판단이 안 됩니다.】
“해보면 되지. 뭐.”
【주변에 전자파를 인지해 보십시오.】
엘리자베스는 전자파를 보고 싶다는 의지를 다졌다.
순간, 셀 수 없이 많은 전자파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수천, 수만, 아니 수억 개의 전자파가 정신없이 하늘과 땅으로 솟구치는 듯 보였다.
“이래서는 원하는 전자파를 찾을 수가 없잖아.”
【누구의 것을 원하십니까?】
“아까 그 여자의 핸드폰.”
【그 전자파로 옮겨드리겠습니다.】
“좋아.”
슝.
으악!
하늘로 솟구치는 속도에 엘리자베스의 정신이 빠르게 소멸되어 갔다.
버텨야 해.
질량을 가졌다면 빛의 속도를 견딜 수 있는 물질은 지구상에 없다.
모두 공기의 마찰에 의해서 타버린다.
질량이 있다면?
문득 엘리자베스는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는 거야?
난 질량이 없는 신호일 뿐이잖아.
이건 내가 인간일 때 경험에서 오는 공포일 뿐이야.
바보같이.
엘리자베스는 눈은 없지만, 눈을 감은 듯 고요한 평정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인공위성을 거쳐 다시 땅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슝.
핸드폰 안으로 들어가서 핸드폰 주인의 경험을 들추어 보았다.
아들이 둘이네.
생활이 많이 어렵구나.
어머, 아들은 똑똑하네.
띠리리리링.
800달러를 거머쥔 여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도 뜨지 않는데 벨이 울린다.
여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 보, 세요.”
-아, 아까 돈 준 사람인데. 잘 살라고. 파이팅.
덜덜덜.
툭.
핸드폰이 꺼졌다.
털썩.
여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백악관.
“대통령님, 세르게이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비서실장과 함께 세르게이가 들어섰다.
아서와 빌을 만나던 자리에서 대통령 비서실장과 통화를 했다.
대통령이 따로 만남을 원한다고.
이유는 구글이 해줘야 할 일이 있다는 것.
기업의 실세를 대통령이 굳이 만나겠다고 하는 건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한창 어려운 시기니까.
세르게이는 정부가 보편적기본소득제를 위해 구글 전 사업장에 투마로우 로봇을 강제로 투입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4대 IT 기업은 투마로우 로봇에 백도어가 심어져 있는 걸 우려하여 쓰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어서 오세요.”
세르게이가 주춤거리자 대통령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저희는 아직…….”
선뜻 악수하지 못하자 대통령이 세르게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왜 이렇게 긴장하는 겁니까? 세계 최대 기업을 창업한 분이. 내가 의논할 일이 있어서 보자고 한 겁니다.”
“보편적기본소득제는 아직.”
“그거 아닙니다. 자, 앉으세요.”
보편적기본소득제가 아니라고?
대통령이 자리를 권하자 후, 하고 한숨을 쉬며 앉았다.
비서가 차를 내오고 대통령이 세르게이에게 권했다.
“향이 좋은 차입니다.”
“아, 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구글은 아마존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네? 어떤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 구글에게 아마존은 어떤 존재냐는 말입니다. 아, 내가 너무 추상적으로 물었나요? 그럼 간단히 말해보죠. 적입니까 친구입니까?”
“구글과 아마존은 다른 기업입니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닙니다.”
대통령은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그럼, 아마존이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는 겁니까?”
뭐라고요?
“대통령님, 아마존은 미국 경제에 영향력이 큰 기업입니다.”
하하하.
“영향력이 있다고 불법을 저지른 기업을 봐 줄 수는 없습니다.”
“불법이라니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야.
“비서실장.”
대통령의 손짓에 비서실장이 두툼한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표지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존 거래처, 노동 환경 현황]
“꽤 두꺼워 보이죠?”
세르게이는 대통령의 표정에서 여유를 읽었다.
그리고 문득 왜? 하고 의문을 떠올렸다.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비서실장.”
이번에도 대통령이 손짓하자 서류 하나가 탁자에 놓였다.
[구글의 시장 독점 현황]
꽉.
세르게이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우리가 나름 분석해 봤는데 아마존의 일을 구글이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구글이 이커머스와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어받으라는 겁니까?”
“맞습니다.”
단순한 딜이 아닌 것 같은데.
아마존 같은 거대 기업을 넘기면서 원하는 게 없을 리는 없고.
“정부에서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
“결정하신 겁니까?”
“아직입니다.”
“그래요? 저희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가 보군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음.
톡톡톡.
대통령이 의자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지금 스태그플레이션을 벗어나려면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아주 큰 양이. 그래서 4대 IT 기업 중 하나를 지울 생각입니다.”
“기업 하나 없앤다고 스태그플레이션이 나아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이번 경제 위기의 원흉은 ‘기억의 길’입니다. 그리고 아마존은 ‘기억의 길’을 뒤에서 후원하고 있었고요. 전국 물류 체인을 이용하면 사이비 종교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기억의 길’을 지우는 데 아마존을 희생한다?
“왜 하필 구글입니까?”
“하필 구글이 아닙니다. 이 제안은 아서와 빌에게도 할 겁니다. 조만간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뭐라고?
난 들어 본 적도 없는 일인데.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너무 뻔한 거짓말.
근데 왜?
이렇게 대놓고.
“아서와 빌은 승낙을 할까요?”
“글쎄요. 거절할 수도 있겠죠.”
“그럼, 저도 거절해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죠. 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됩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세르게이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모두 거절한다면 아마존은 투마로우에 넘어갈 겁니다.”
“네?”
대통령이란 사람이 싸움을 붙여?
“왜 먼저 투마로우에게 제안하지 않고 저희에게 하신 겁니까?”
“저희에게라…….”
대통령이 세르게이의 말에서 한 단어를 뱉었다.
“그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4대 IT 기업이라고 해서 단합이 좋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다른 곳보다는 그 안에서 해결하는 게 보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정부가 보기엔 좋아도 우리에겐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같이 미국의 IT를 선도해 왔는데 한 곳이 강제로 무너지는 걸 즐기는 사람은 우리 중에 없습니다.”
하하하.
“그럼, 무너지지 않게 만들면 되겠군요.”
갑자기 또 왜?
“또 다른 선택이 있는 겁니까?”
“그럼요. 우리도 아마존이 꼭 무너지는 걸 원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선택이 뭐지요?”
“정부와 협조해서 ‘기억의 길’을 해체하는 걸 도와주세요.”
“‘기억의 길’…….”
데미안이 만든 종교.
지금은 우군인지 적군인지 구분이 안 되지만.
언젠가는 쓸데가 많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데미안의 반응인데.
아니, 데미안보다도 ‘기억의 길’이 정면으로 도전해 오면 꽤 힘든 싸움이 된다.
‘기억의 길’은 종교다.
종교의 신도들이 힘을 합치면 한곳으로 집중할 수 있다.
그게 자신들의 기업에게 향하면 타격이 꽤 크다.
‘기억의 길’이 미국에만 존재한다면 다른 시장을 개척해서 손실을 만회하겠지만 이미 전 세계에 퍼져있다.
“정부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그럼요. 방법도 없이 당신과 대화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방법이 뭐죠?”
“방법은 이미 말했습니다. 아마존을 내주고 ‘기억의 길’을 해체하는 겁니다.”
“꼭 아마존이어야 합니까?”
“그럼 구글이 나서겠습니까?”
“네?”
하하하하.
대통령의 웃음에 세르게이가 움찔했다.
“농담입니다. 농담.”
“…….”
정색하는 세르게이를 보며 대통령이 재밌다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아마존이어야 합니다. 중국에서 알리바바 인수도 있고 ‘기억의 길’과 겹치는 동선이 여럿 보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범죄자의 입에서 아마존이 튀어나왔습니다. FBI에서도 그냥 묻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법정에서 시끄럽기도 할 것이고.”
끙.
세르게이는 다이로가 기자들을 향해 자신들을 드러 내던 순간의 떠올라 침음성을 흘렸다.
“알겠습니다. 우리도 대비를 하겠습니다.”
후.
다이로 그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엮이게 생겼다.
< 제418화 자, 그럼 이제 회사 가져와야지(24)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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