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11화 자, 그럼 이제 회사 가져와야지(17) >
캘리포니아.
“빌,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세르게이가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빌에게 물었다.
한 달 전 중국에서 돌아온 빌은 자택에서 한 달 가까이 두문불출하며 그 누구하고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제 모두에게 미팅을 제안했다.
세르게이 눈에 비친 빌은 살짝 살이 빠졌지만, 얼굴엔 평온이 번져 있었다.
“세르게이, 아서, 제프.”
모두의 이름을 한 번씩 부르고는 피식 웃었다.
“‘기억의 길’의 앤서니와 ‘커뮤니티 서밋’에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진짜 가상현실에 들어간 겁니까?”
응.
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큰 미궁 속에 살아가는 게 확실합니다.”
나 참.
한창 알리바바와 인수 합의에 몰두하는 제프가 어이가 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뭐 ‘기억의 길’ 신도라도 된 겁니까?”
피식.
빌이 제프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제프는 못 알아차렸겠지만.
“‘기억의 길’ 사제 앤서니가 지금 엄청난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를 이길 수가 없을 겁니다.”
“알아듣게 말씀을 하세요. 빌이 없는 동안 투마로우가 미국 이커머스 사업에 진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럼, 최초로 투마로우가 실패하는 걸 볼 수 있겠군요.”
빌은 자신의 말에 어폐가 있는 걸 깨달았다.
아닌가?
‘블랙’이 있는 한 아마존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건가?
빌은 제프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앤서니는 ‘기억의 길’ 모든 신도들에게 소비 활동의 최소화를 명했습니다.”
“그럼 지금 구매력이 하락하고 있는 원인이 ‘기억이 길’ 때문입니까?”
“네, 전 한 달간 전 세계에 있는 ‘기억의 길’의 ‘커뮤니트 서밋’을 돌아다녔습니다. ‘기억의 길’ 신도들은 최소한의 활동 외에는 ‘커뮤니티 서밋’에 접속하여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소비 활동을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앤서니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계속 방치할 겁니다.”
뭐라고요?
“그런 미친놈을 봤나! 당장 FBI에 연락해서 ‘기억의 길’ 자체를 해체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무슨 죄목을 붙일 수 있습니까?”
“빌, 왜 이러십니까? 진짜 신도라도 된 겁니까?”
“그들을 변호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두려워서 그러는 겁니다.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자그마치 스태그플레이션입니다. 전 세계 화폐는 휴지 조각이 될 겁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만약 원화가 1달러에 2,000원 3,000원 5,000원으로 가치가 떨어지면 한국인은 어떻게 행동할까?
정부의 방침을 기다릴까? 설마.
모든 건 순식간이다.
너도나도 원화를 버리고 달러를 사려고 할 것이다.
원화의 가치가 10배 폭락하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2018년 베네수엘라에서 어떻게 일 년 만에 인플레이션이 30,000%가 오를 수 있었을까?
이건 물가로 따지면 300배가 오른 것과 같아.
대한민국이라면 3천 원짜리 소주가 일 년 후에 90만 원이란 소리다.
이걸 정부가 몰라서 못 막았을까?
이걸 국민이 몰라서 저 값을 주고 사 먹었을까?
방법이 없는 것이다. 방법이.
물론 미국이나 중국, 한국이 인플레이션이 30,000%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 경제위기를 몇 번씩이나 겪으며 체력을 기른 국가들인데.
그래도 딱 물가 100배만 되면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이라면 촛불 집회를 한다고 광화문에 모일까?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촛불이 아니라 화염병을 들고 청와대로 쳐들어갈 것이다.
경찰? 군대? 그게 무서울 것 같은가?
스태그플레이션.
정말 무서운 놈이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고요! 이미 저는 중국에 많은 걸 투자했습니다.”
제프가 답답한 듯 소리 질렀다.
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모든 걸 인공지능에 맡겨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기억의 길’ 뒤에 투마로우가 있다고 말하면…….
이들을 이미 너무 많은 걸 가졌다.
자신의 모든 걸 걸고 투마로우와 싸우겠지.
‘블랙’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미안합니다. 전 여기서 그만두겠습니다.”
뭐?
빌은 미련 없이 일어나 미팅 룸 밖으로 향했다.
모두 이 어이없는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세르게이가 빌의 뒤를 따라붙었다.
“빌, 저에게 잠시 시간을 주세요.”
빌을 데리고 세르게이가 나갔다.
아서는 제프를 보며 말했다.
“제프, 빌과 싸웠습니까?”
“저도 오늘 처음 만난 겁니다. 아시잖아요. 지금 인수 때문에 정신없다는 거. 그리고 빌은 한 달간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그 ‘기억의 길’ 사제인가 하는 놈을 만나러 다녔다고 했잖아요.”
“혹시…….”
아서가 하려던 말을 급하게 닫았다.
하지만 이대로 말을 아꼈다가는 더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나노봇이 빌의 머리를 이상하게 만든 거 아닐까요?”
아, 나노봇.
“맞아요. 나노봇, 분명 빌이 나노봇을 머리에 집어넣고 이상하게 변했습니다. 아무래도 FBI에 도움을 청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후.
아서는 한숨을 쉬었다.
빌이 누군가?
한때는 적으로 한때는 친구로 20년 이상의 세월을 같이 미국의 경제를 세계 최고로 만든 동반자였다.
세르게이와 제프가 파트너라면 빌은 친구였다.
그런 빌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변했다.
그렇다고 FBI에 의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사실 알고는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뿐이다.
‘기억의 길’.
빌을 한 달간 앤서니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기억의 길’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이상한 점은 천하의 빌이 앤서니에게 설득을 당했다는 것인데.
도무지 그 점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서,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예요?”
“듣고 있어요. 하지만 FBI는 아닙니다. 빌이 곤란을 겪을 겁니다.”
“아니, 지금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빌을 두둔하는 겁니까?”
“우리가 왜 죽습니까? 빌이 떠난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답답한 말을 하네요. 빌이 중국 주석과 엮여 있습니다. 빌이 떠났다고 하면 중국 내에서 우리 뒤를 봐주던 주석이 등을 돌릴지도 모릅니다. 지금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이 오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강달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 말고 다 죽는 다고요. 중국 위안화와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서가 제프를 노려봤다.
“이 상황에서도 오직 아마존이 알리바바를 인수하는 것만 생각하는군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 일에 몇 명의 목숨이 달린 줄 아십니까? 실패하면 몇 명이 잘려나가는지 아시냐고요.”
“안 자르면 되는 거 아닙니까? 꼭 누군가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알리바바 인수 못 한다고 아마존이 망하는 것도 아니면서.”
“아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핸드폰 시장에 진입하고 왜 접었는지 잊으신 겁니까?”
제프는 2014년에 전방 다섯 개의 카메라를 이용한 3D 디스플레이 기술을 이용한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그리고 바로 접었다.
3D 디스플레이 기술은 아서가 가져갔다.
물론 애플의 전자책 아이템은 아마존의 킨들이 되었다.
“우리도 충분한 보상을 한 거로 아는데요. 그렇게 정 미더우면 직접 주석을 만나보면 되는 일 아닙니까?”
제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좋습니다. 다들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세요.”
제프가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닫히고,
후.
아서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어.
***
중난하이.
“아이고, 진짜 난리네. 난리야.”
시앙핑은 경제 보고서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양적 완화를 아무리 펼쳐도 물가가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더 강력한 수단을 써야 합니다.”
중국도 인플레이션이 진행돼야 하는데 물가가 도무지 오르지 않았다.
물가라는 것이 1년에 5% 정도는 올라줘야 경제가 돌아간다.
왜? 매년 전 세계 정부가 그 정도의 돈을 찍어 내니까.
찍어 낸 만큼 소비가 발생하고 그 돈은 기업으로 흘러 들어가고 다시 세금이 걷히고 그렇게 기업도 정부도 점점 규모가 커져야 한다.
이게 세계 경제가 돌아가는 이치이다.
그런데 기업으로 돈이 흘러가지 않으면 성장은 멈추고 투자자들은 돈을 빼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중국은 도태되고 지금까지 쌓아 올린 위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딩쉐이의 말에 시앙핑이 고개만 까닥 움직여 바라봤다.
“무슨 수단?”
“미국이 하던 것처럼 인민에게 돈을 주는 겁니다.”
“아니, 딩쉐이, 지금 인민이 돈이 없어서 소비를 안 하는 거야? 로봇이 노동하고 인민이 받아가서 쌓여 있는 돈이 얼만 줄 알아? 네가 보고한 거잖아.”
“그러니까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소비를 진작시켜야 합니다.”
“그게 안 먹히면 어떡할 건데?”
“네?”
“그게 안 먹히면 돈만 또 시중에 쌓이는 거 아냐? 또 대규모 국책 사업을 진행할까? 아니면 다시 아파트를 지을까? 안 되잖아. 아, 이것도 네가 보고한 거야.”
“그게…….”
아휴.
“임재준은 언제 오는 거야?”
“곧 도착할 겁니다.”
“제발 좀 해결책 좀 알려주면 좋겠다. 제발 좀.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돈은 있는데 돈을 안 쓰는 놈들은 뭐냐고?”
“‘기억의 길’이라는 종교가 워낙 단단해서…….”
“그 종교 당장 쫓아낼 수……. 없지. 없어. 뭐 실체가 있어야 쫓아내든지 말든지 하지. ‘기억의 길’에 세금을 매기는 건 어때?”
“‘기억의 길’이 헌금도 받지 않아서 수입이 아예 없습니다. 매길 세금이 없습니다.”
“아이 쌍, 진짜.”
“그리고 종교에 세금을 매겼다가는 전 세계 종교인들의 비난을 받을 겁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을 겁니다.”
후, 후, 후.
시앙핑은 심호흡을 하는 중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딩쉐이, 캡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 어떨까?”
“네? 그럼 진짜 폭동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가뜩이나 경제가 엉망이어도 인민들이 가만히 참고 있는 게 다 캡슐 때문인데……. 요”
“폭동이라도 났으면 좋겠어. 이거 사는 게 사는 게 아냐. 긴장감이 전혀 없는데 매일 죽어라 죽어라 하는 거잖아.”
“그럼, 캡슐을 중지하시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일부러라도 한번 사고를 쳐야겠지?”
“네, 그리고 임재준을 만나겠죠.”
“뭐?”
임재준!
진짜 한번 들이받고 몽골 자치구를 줄까?
똑똑.
시앙핑과 딩쉐이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분명 비서가 손님이 왔다는 신호를 보낸 게 분명했다.
“임재준 온 것 같은데.”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딩쉐이가 종종걸음으로 문 앞으로 달려갔다.
어?
제프 베조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제가 워낙 급해서 주석님이 계신다는 소릴 듣고 실례를 무릅쓰고 무작정 찾아왔습니다.”
“지금 주석님께 선약이 있습니다. 비서에게 일러둘 테니 귀빈실에서 기다리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네.”
제프가 일단 돌아서려던 그때.
“이게 누구야?”
재준이 제프를 알아보고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임재준?
선약이라는 게 임재준을 말한 거야?
“제프, 여긴 어쩐 일입니까?”
너야말로 미국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여기 있는 거야?
< 제411화 자, 그럼 이제 회사 가져와야지(17)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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