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90화 다시 석유 쓰면 안 될까(10) >
‘기억의 길’ 본당.
“이야, 이제야 어엿한 쉼터도 있고 제대로 활동하는 것 같네.”
다이로는 ‘기억의 길’ 본당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지어진 단층 짜리 건물에 들어서며 아주 흡족했다.
“진작에 이런 건물 하나는 줬어야지. 허름한 창고에서 고생 엄청 했잖아.”
“너무 좋아하지 마. 이런 호의는 우리를 계속 굴리겠다는 뜻이니까.”
제이콥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꼭 초를 쳐요. 초를 쳐. 어차피 갈 데도 없으면서. 지낼 만한 곳이 생기면 좋은 거지. 난 쭉 일했으면 좋겠구만. 돈도 많이 주고.”
“난 아니야. 난 얻을 것만 얻으면 떠날 거야.”
“얻을 게 뭔데?”
“몰라도 돼.”
음.
“혹시 그 잃어버린 눈 한 짝을 다시 찾는 건 아니지?”
“말조심해.”
제이콥이 눈을 부릅뜨며 다이로를 노려봤다.
풉.
“폼 잡기는. 총도 제대로 못 쏘는 주제에. 어디 이 기회에 서열 정리나 해볼까?”
에휴.
“그래, 내가 네놈이랑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 저 무지한 놈이랑 무슨 말을 하겠어.”
“그럼 내가 위다.”
“미친놈.”
다이로가 제이콥을 놀리는 데 성공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벌컥.
문이 열리고.
“행복하십니까, 형제들이여.”
위쉬안이 들어서며 앤서니 흉내를 내며 인사했다.
“너도 ‘기억의 길’ 환자로 입원한 거냐?”
fuck dub.
위쉬안이 입 모양으로 욕을 했다.
“아직입니다.”
뒤따라 들어오며 앤서니가 말했다.
“앤서니는 뭐 한 거야? 저놈 환자 기질이 다분한 놈인데.”
“넌 그 입 좀 닫아.”
“닫게 만들어 보던가.”
“그만두자.”
넷이 모두 모였다.
“앤서니, TV에서 활약이 대단했어. 그 정도면 신도가 배는 늘었을 것 같은데. 얼마나 늘었어?”
“사무장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저는 그런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우, 좀 있어 보이는데. 그렇지, 이제 거물이 되셨는데 좀스럽게 애들 몇 명 늘었나 세 보는 것도 우습지.”
“다이로, 좀 조용히 해.”
제이콥이 다이로에게 뭐라 하며 앤서니를 바라봤다.
“여기로 모이라는 이유가 뭐지?”
“저도 모릅니다. 고객님께서 말씀하실 겁니다.”
이때.
치직, 치지지지직.
변함없는 화면에 데미안이 등장했다.
“전부 모이셨군요.”
“이미 CCTV로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봐. 서론은 빼고 본론만 이야기하자. 네 목소리 오래 듣고 있으면 귀가 아파서 말이야.”
“잠시 후 각자의 스마트폰에 자신이 할 일을 전송하겠습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치직, 치지지지직.
픽.
모니터가 꺼지고 바로.
띠링.
네 명의 스마트폰에 문자 알림이 울렸다.
앤서니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지만, 동공이 커지는 걸 숨기지는 못했다.
눈치 빠른 위쉬안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앤서니는 말없이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저벅저벅.
드르륵.
저벅, 저벅, 저벅.
우뚝.
강 건너, 핵융합 발전소 건설 현장을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해야 하는 일이겠지.
위쉬안이 앤서니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앤서니, 무슨 일이야? 그놈이 힘든 일이라도 시킨 거야?”
“아닙니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이 도착했을 뿐입니다.”
“근데 왜 표정이 굳은 거야?”
“하기 싫지만 해야 할 일이거든요.”
“뭔데? 말해줄 수 있어?”
음.
앤서니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시게 될 거니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제가 할 일은 저기 핵융합 발전소를 폭발시키는 겁니다. 드디어 ‘블랙’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전소 폭발이라……. 나는 투마로우 본사를 해킹해야 하는 일이야. 어차피 ‘블랙’을 만나는 건 마찬가지네.”
“그렇게 되는 겁니까?”
하하하하하.
건물 안에서 다이로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쟤네들. 둘이 사귀는 거야?”
“넌 생각하는 게 어쩜 콜롬비아에서 벗어나질 않냐.”
“너 그거 콜롬비아를 비하하는 거다.”
“거기 있던 너를 말하는 거야. 너 말이야. 너.”
“근데 넌 해야 할 일이 뭐야?”
제이콥이 다이로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투마로우 본사 정문 앞에서 널 기다리는 거야.”
다이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줄 아는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기다리다가 너를 태우고 추격 차량을 따돌리라는 메시지만 받았어.”
“정말? 몇 시에?”
다이로가 제이콥에게 말했다.
“6시.”
“나랑 같이 움직이는 거 맞네.”
“넌 투마로우 빌딩에서 뭐 할 건데?”
으차.
다이로가 기지개를 심하게 켜고 목을 우두둑 돌렸다.
“임재준 저격.”
“또? 저격 맞아? 이번에도 대충 시늉만 하다 오는 건가?”
“아니야, 이번엔 죽일 거야.”
진짜 죽인다고?
제이콥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너, 그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큭큭.
“그러게, 조금 걱정이 되긴 해. 그래도 어차피 만나야 할 놈이면 한 번쯤 겪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 한 번으로 죽는 거야.”
“괜찮아. 난 편하게 죽을 수 있거든.”
“뭔 개소리야?”
다이로는 주머니에서 하얀색 스위치를 꺼내 흔들었다.
“나는 천국의 열쇠를 항상 가지고 다닌단 말이지.”
“뭐야? 그건.”
“천국의 열쇠라니까.”
“미친놈.”
제이콥은 머리를 흔들며 문으로 향했다.
다이로는 제이콥을 보며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데미안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임재준을 죽여도 됩니다. 장소는…….’
어떤 놈인지 나만큼 미친놈이라니까.
근데 임재준이 죽으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해주는 거지?
이 정도 사건을 처리하려면 정치인 중에서도 거물급이어야 할 텐데.
***
민주당 원내대표실.
척 슈머 원내대표는 초선의원들을 소집했다.
“대표님,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어떻게 의장님이 이런 결정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초선의원 한 명이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불을 뿜었다.
해리슨 상원 의장이 미래당과 손을 잡았다는 소식에 긴가민가했는데 척 슈머 원내대표가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의장님도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요.”
“그 깊은 뜻이 잘못하면 민주당의 존재를 위협한다면 마땅히 막아야 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후.
척 슈머는 살짝 말끝을 흐리며 한숨까지 쉬었다.
자신의 뜻은 절대 아니라는 듯.
역시 초선의원들의 의기는 남다르다니까.
이거 물불 안 가리던 내 옛날 생각이 다 나네.
“지금 몇 개의 주에서는 총성이 오가는 곳도 있습니다. 정부를 성토하는 분위기가 날로 위험 수위를 더하고 있는데. 지금 이 시기에 민주당 지지자들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을 하시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또 다른 초선의원이 답답한 속을 내보였다.
“진정들 하세요. 아직 민주주의는 살아 있습니다. 표결에서 우리의 힘을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척 슈머는 슬쩍 초선의원들의 속마음을 떠봤다.
표결이라면 미래당에 무조건 반대하겠다는 뜻이다.
“공화당과 손을 잡는 한이 있어도 미래당은 절대 안 됩니다. 도날드가 하원 의장이 된 뒤로는 말도 안 되는 법안만 상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허, 이 사람들.”
그렇지, 공동의 적을 위해서는 공화당과 잠시 손을 잡아도 되지.
“공화당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더 있어야지.
“공화당만으로는 승부가 안 날 수도 있습니다. 언론에서 뭐라도 떠들어 줘야 할 텐데…….”
“그럼…….”
초선의원들은 서로 바라보며 표정을 읽었다.
언론에서 떠들게 뭐가 있겠나.
선거를 치러본 의원이면 누구나 아는 것.
상대의 흠집.
“대통령부터 미래당 의원들, 이번에 미래당과 손잡은 민주당까지 다 뒤져보겠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우리 당까지 할 필요는 없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너무 많이 떠들어 대면 시끄럽기만 하지 국민에게 크게 어필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리 미워도 돌아올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야 돌아올 거 아니겠습니까?”
“음, 역시 대표님은 견식이 남다르시군요. 민주당은 제외하겠습니다.”
“하하하, 뭐 남다르기까지야. 여러분도 2선만 되면 다 알게 되는 건데요.”
“이번 기회에 당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겠습니다. 위기가 닥쳤다고 소신을 바꾸는 행위는 정치에서 얼마나 위험한 결정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그렇지.
민주당은 영원한 민주당이야.
도날드도 아니고 당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바꾸는 짓거리는 하수나 하는 거지.
“이거 내가 3선 의원들만 챙겼는데 진짜 민주당을 위하는 의원은 여러분들이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이라도 저희를 인정해 주시니 민주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하.
자조 섞인 한숨에 초선의원들의 눈빛에 어둠이 드리웠다.
“아마 미래당이 상정한 UBI 법안이 통과될 것 같습니다.”
UBI?
이런 날강도 같은 놈들.
역시 초선의원들의 분노 게이지가 폭발 직전이었다.
민주당은 진보를 내세우는 정당이다.
진보는 평등이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다.
평등의 핵심인 보편적기본소득제(UBI)는 코로나 시대에 민주당이 먼저 제의했었다.
“대표님, 거기 미래당이 왜 끼어 있습니까?”
“우리와 조금 다른 내용이라고 자기들이 먼저 주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뭐, 힘이 없으면 이렇게 되는 거죠.”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우리가 상정은 아니어도 제의했던 내용이 의회 회의록에 남아 있는데 그걸 중간에 가로채 가는 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안 됩니다.
당장 멈춰야 합니다.
우리와 상의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런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초선의원들의 날 선 비판은 의원실 공간을 가득 메웠다.
척 슈머는 표정을 굳혔지만, 속으론 활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흥분하는데.
“여러분, 진정하세요. 이럴 때일수록 냉정을 찾아야 합니다. 흥분은 미래당이 하게 만들어야지요.”
척 슈머의 말에 초선의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아, 이래서 초선이구나.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고개들 드세요. 중요한 건 결과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그림만 만들어지면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국민이 원하는 삶을 위해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중간에 하나 정도 실수했다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면목없습니다.”
“자, 중요한 건 서로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겁니다. 보편적기본소득제 통과를 막아야 우리가 이기는 겁니다.”
“막아 보겠습니다.”
“찬성하는 의원들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래도 막을 겁니다.”
초선들의 눈빛이 불타오르자 척 슈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나를 무시했다 이거지.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최소한 우리는 경상이지만 당신들은 중상이 될 테니까.
임재준, 이번엔 정말 기대할 만할 거야.
이번엔 다 같이 죽을 거거든.
널 죽이지 못하면 나도 같이 죽어 줄게.
< 제390화 다시 석유 쓰면 안 될까(10)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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