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86화 다시 석유 쓰면 안 될까(6) >
앤서니는 다이로의 말에 화내기는커녕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누구나 자신이 신봉하는 건 있으니까요.”
앤서니는 다이로를 지긋이 바라보고는,
“형제님의 신은 그 총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총?”
다이로가 자신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총이 나의 신이지. 언제나 의지가 되거든.”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큭큭.
다이로는 앤서니를 보며 웃었다.
“역시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네. 앤서니,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보시지요.”
“임재준을 어떻게 생각하지?”
앤서니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소멸시켜야 할 인간입니다.”
“‘블랙’ 때문에?”
“‘블랙’은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블랙’은 우리를 피안의 휴식처로 안내할 신입니다. 그런 신에게 의지를 박탈한 건 옳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나에게 메시지를 전달한 분이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데미안을?”
“데미안?”
뒤에 있던 제이콥이 다이로의 말에 꼬리를 달았다.
“그래, 맞아. 임재준이 우리 뒤에 데미안이 있다고 했어. 네가 모니터라고 부르는 놈. 그놈 이름이 데미안이야.”
“데미안…….”
제이콥은 자신의 머릿속 인물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데미안이란 인물을 알 수가 없었다.
“찾아야겠어.”
“정말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시는군요.”
제이콥의 결심에 앤서니가 찬물을 확 끼얹었다.
“네가 뭘 안다고 나서는 거지?”
“데미안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분이라면 의료보험 시스템을 해킹하면 알아내는 건 쉬울 겁니다. 하지만 신분을 일부러 숨긴 분을 찾아서 그분의 노여움을 산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지 묻고 싶군요.”
“맞아. 여기 똑똑한 인간이 하나 더 있네. 제이콥, 찾지 마. 자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싶을 때 나타나겠지. 뭐, 돈만 확실하면 되잖아.”
쩝.
제이콥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근데 다이로, 임재준이 어떻게 데미안을 알고 있는 거지? 우리도 모르는 사람을?”
“‘블랙’ 덕분입니다.”
다이로에게 물었는데 이번에도 앤서니가 대답했다.
“‘블랙‘은 모르는 게 없으시니까요.”
“거 인공지능한테 존대는 하지 마. 기분이 이상해지려고 해.”
“후후, 인간의 뇌도 인공지능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알고리즘으로 작동합니다. 오히려 ’블랙‘이 더 빠르고 더 정확하십니다. 우린 미래에 ’블랙‘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아이고 머리야. 넌 위쉬안하고 잘 맞겠다. 그 인공지능 신봉자가 하나 더 있거든.”
“알고 있습니다. 중국인 천재 해커 위쉬안.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그쪽으로 가고 있어.”
“다행이군요.”
앤서니는 빙그레 웃었다.
***
AAG 빌딩 66층.
[정부가 투마로우에 핵융합 발전소 건립을 정식으로 요청했습니다. 장소는 사우스다코타주의 미주리강 유역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핵융합 발전소가 완공된다면 더는 화석 연료에 에너지 생산을 의존하지 않게 되어 탄소 중립을 더 빠르게 실현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밝혔습니다.]
“보스, 진짜 정부가 1,800억 달러를 내겠다고 했어요?”
퀴니코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법안이고 나발이고 공원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오금이 저려서라도 의장이 난리를 쳤겠지.
“그런데 이번에 리버티 공원 테러에 대해서는 기사가 한 줄도 없네요.”
“거참, 아직도 정보를 통제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증거지. 뭐 숨길 게 있다고 저러는지 원. 이참에 카터리포트에 요청해서 빌리 맥케이 기자랑 같이 다닐까?”
“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보스가 하는 일이 언론에 매일 올라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아세요?
이 세상에 너도나도 임재준이 되겠다는 인간들이 늘어나면 진짜 혼란해지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띠링.
“보스.”
윌켄이 들어서며 활짝 웃었다.
“사우디에 발전소 건설 시작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렇지, 당장 시작해야지. ‘블랙’.”
【네.】
“사우디에 핵융합 발전소 시작하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1년입니다.】
“로봇이 투입되는 데도 굉장히 늦네. 로봇이 투입되지 않으면 얼마나 걸리는데?”
【30년입니다.】
“헉, 그래, 로봇을 투입하자. 30년 동안 만들고 30년 후에 원금이 회복되면 내 나이가 얼마라는 거야?”
【현재의 나이에 60년을 더하면.】
“말하지 마. 나도 알아. 어디 감히 내 개인정보를 유출하려고 해. 하지 마.”
재준이 ‘블랙’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쿡.
윌켄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눈매를 가늘게 떴다.
“우리의 모토가 정보의 원활한 흐름 아닌가요?”
“뭐? 맞지. 하지만 내 앞에서 할 필요는 없잖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로 물어보라고.”
쿡쿡쿡.
“참, 보스, 핵융합 발전소를 왜 민주당이 제안하게 만든 겁니까?”
“아닌데. 발전소는 민주당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게 맞아요.”
“그래요? 의외인데요? 대통령도 갈아 치울 기세더니 갑자기 왜 태세를 전환한 걸까요?”
“글쎄요. ‘블랙’, 해리슨 상원 의장이 최근에 만나 인물들이 누가 있을까?”
【그레이 도트, 척 슈머…….】
‘블랙’은 최근부터 해리슨 의원이 만난 사람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재준은 나열되는 이름을 한창 듣고 있는데.
【세리르게이 브린, 아서 래빈슨, 빌 게이츠, 제프 베조스, 알렉산더 맥콜.】
“잠깐, ‘블랙’. 세리르게이 브린, 아서 래빈슨, 빌 게이츠, 제프 베조스? 이 사람들이 동시에 만난 건가?”
【네.】
“어떤 이야기를 나눈 거지?”
【투마로우와 손을 잡고 시간을 버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시간을 왜 벌어?”
【이유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무슨 작당을 한 거지?”
“보스, 순수한 의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뭐, 상관없지 않나.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가 본데. 그 말은 아직은 위협적인 무언가가 없다는 뜻이고.”
“그래도 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건 미래당이 추진하려는 입법안도 통과가 된다는 뜻이잖아요.”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거겠지.”
미래당은 도날드가 대통령 재직 시 통과시키지 못한 팜봇 도입을 추진하기 위해 법안을 준비 중이었다.
기업에서 생산과 행정에 로봇을 투입하면서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저항이 거의 없었지만, 팜봇은 거센 저항이 예상되었다.
약사와 의사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미래당이 준비한 법안이 꽤 많던데요.”
로봇, 인공지능, 생명 공학, 정보 기술 등 줄줄이 법안이 통과되면 투마로우가 하는 일에 날개를 달게 된다.
음.
“근데 그게 우리에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윌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겁니까?”
“도날드의 밑바닥에 깔린 허무주의가 언젠간 문제가 될 거예요.”
“허무주의요?”
재준은 그레이 상원 의원이 걱정하는 자유주의의 붕괴를 넘어선 세계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인류는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해, 공산주의를 몰아내기 위해서 싸워 왔다.
하지만 도날드가 자유주의를 붕괴시키는 이유가 딱히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저 자유주의가 쓸모없다는 인지만 있을 뿐 더 나은 계획이 없었다.
그저 ‘투마로우를 위해’라는 다소 위험한 발상으로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논리였다.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자유주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글로벌화를 도려내려 하는 것이다.
미국에 첨단 과학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다른 나라보다 더 빨리 평화로운 나라로 만들기를 원하는 맘.
미국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는데 중국의 시앙핑이나 러시아의 푸차르가 좌파가 아닌 골수 우파의 정치 세력에게 인기가 높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이 왜 벌어지는 것일까?
자유주의 이념이 세계화를 버리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뭘 해도 자유인데 남들의 자유가 우리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논리로 변질되었다.
이 저변에는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날드의 행보도 처음에는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겠지만 근본적인 두려움을 해소해주지 않으면 점점 관심 밖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도날드를 말릴 생각은 없어요. 그것도 아직은 시간이 넉넉하니까요.”
진짜 시간이 널널한 거 많나?
***
데미안 연구실.
“역시 나노봇이 뉴런만큼 퍼져 있었어.”
데미안은 Soft-X-Ray 현미경으로 해부된 시체의 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며칠 전 제이콥에 의해 캡슐 사용자의 시신을 한 구 받았다.
그리고 혈액과 뇌를 채취해서 Soft-X-Ray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결과 운반이 가능하며 기초 동작이 가능한 팔을 단 나노봇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굳이 내가 나노봇의 팔을 만들 필요가 없겠는데. 지금쯤 진이라면 완벽한 팔을 가진 나노봇을 개발하지 않았을까?”
지금 현미경에 보이는 나노봇은 아무 일도 안 하는 탄소 결정체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명령을 기다리는.
이 나노봇과 통신이 가능한 알고리즘을 만드는 게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것 같아.
내 나노봇을 이용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가만.
이번에 발표된 논문 중에…….
데미안은 움직이지도 않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1시간이 흘렀다.
왼쪽 뺨으로 땀방울 하나가 흘러 내려와 목을 타고 사라졌다.
나만의 캡슐을 만들면 되겠구나.
또 다른 방향으로.
기억을 지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데이안이 떠 올린 논문의 내용은 이렇다.
CPEB3란 단백질이 뉴런의 신경 가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면서 뉴런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들을 저장할 수 있다.
우리가 스쳐 지나간 모든 기억들도 뉴런에서 뻗어 나온 축삭돌기라는 작은 가지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만들어진다.
시냅스는 이 연결점들을 강하게 또는 약할 수도 만들 수 있다.
연결이 약하면 기억은 사라지고 반대로 강하다면 오래 지속할 수 있다.
해마의 뉴런 중심체에서 생성된 CPEB3 단백질이 축삭돌기를 따라 이동해 시냅스에서 방출됨으로써 기억 생성과 유지를 돕는다.
CPEB3 단백질이 없으면 기억이 사라진다…….
CPEB3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하면 기존 기억을 떠올리거나 유지하지는 못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억 상실을 인위적으로 유도할 수 있겠는데.
데미안은 뉴욕 창고와 연결된 컴퓨터 전원을 켰다.
치직, 치치치직.
모니터에 새로운 인물이 보였다.
“앤서니, 반갑습니다.”
-하하하, 생각하던 대로군요.
“앤서니, 일 하나 같이 해야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인간의 기억을 지우는 종교 어떠십니까?”
< 제386화 다시 석유 쓰면 안 될까(6)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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