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85화 다시 석유 쓰면 안 될까(5) >
저지 시티 메디컬 센터.
으, 이런 개 같은 일이.
해리슨은 VIP 1인실에 누워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테러를 당했어도 가벼운 외상 외에는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국방부 장관의 뒷머리에 생긴 구멍이 자꾸 떠올랐다.
죽기 직전에 자신을 바라보던 국방부 장관의 원망에 찬 눈동자도 같이.
다이로.
정신이 어떻게 박힌 놈이길래 미국 장관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거지.
후.
그런데 다이로 그놈이 왜 그 장소에 나타난 걸까?
둘이 하는 말을 보면 다이로가 임재준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던데.
아니, 우리가 만나는 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가만, 가만.
해리슨은 빌의 말을 떠올렸다.
-약속이 잡히면 알려 주세요. 저희도 준비할 게 있습니다.
준비할 게 있다고 했는데.
이게 그건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아는 건 나와 후원회뿐이니까.
그래, 그리고 다이로의 그 말.
-걱정 마, 우리 같은 편이야.
이런 빌어먹을 놈들.
다이로를 보내서 임재준을 죽이려 한 거야.
자칫하면 나도 죽을 뻔했잖아.
근데 왜 임재준을 죽이려고 한 거지?
손을 잡으라고 하고선.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똑똑.
해리슨이 다이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설마 임재준은 아니겠지.
“들어오세요.”
벌컥, 문이 열리고 상원 의원 몇이 들어왔다.
“의장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상원 원내대표 척 슈머가 먼저 들어서며 안부를 묻자 손을 휘휘 저었다.
“테러가 있었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테러라니요? 누가 감히 의장님을 노렸단 말입니까?”
“뭐, 자세한 건 이야기해 드리겠지만 저를 노린 건 아닙니다.”
척 슈머가 의심스러운 눈매로 해리슨을 바라봤다.
설마 이런 무리수를?
“그럼 국방부 장관을 노린 거군요. 국방부 장관은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해리슨은 그 당시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아니에요. 임재준을 노린 것 같기도 하고, 국방부 장관을 노린 것 같기도 하고,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임재준?
임재준이란 이름이 나오자 모두 수군거리는데 그레이 의원만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민주당에서 협상을 전문으로 하는 의원으로 사우디와 협상을 주도한 적이 있었다.
“임재준을 만나신 겁니까?”
후.
“후원회가 임재준과 만남을 원했습니다.”
“그렇군요. 하긴 그들도 기업가들이니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네요.”
해리슨은 빌의 말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로봇 고용과 정보 공유가 의무화되면 인공지능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세상이 옵니다.
“이익 따위가 아닙니다. 좀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미래 사회를 들먹이는 걸 보면 어쩌면 자유주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겁니다.”
인공지능의 지배 아래 민주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이념은 미국 땅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진작에 대비했어야 했는데.
파시즘에서 공산주의로 그리고 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인류의 역사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유주의를 대체할 이념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투마로우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논의되었다.
“미래당이 말하는 미래 사회를 말씀하시는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후원회도 미래 사회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임재준과 손을 잡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미래당이 주장하는 이념은 국수주의에 해당하는 겁니다.”
이 시대에 등장한 국수주의자들은 자국의 이익이라면 극단적인 선택도 마다하지 않았다.
터키가 반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러시아가 독재를 선언했다.
중국은 내정간섭에 학을 떼고 덤벼드는 나라 중 하나이고.
영국은 브렉시트로 유럽 연합을 탈퇴했고 미국은 도날드가 자국 이익을 부르짖었다.
“미래당은 그렇지요. 하지만 투마로우는 국수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해리슨은 투마로우가 주장하는 게 뭔지 딱 짚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진짜, 투마로우가 원하는 게 뭘까?
“로봇과 인공지능, 캡슐과 스카이링크, 그리고 생명 과학과 핵융합 발전까지. 뭘 원하는 걸까요?”
그레이는 해리슨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는 못했지만, 순간 적절한 말이 생각났다.
“해방신학을 모방한 해방주의 아닐까요?”
“해방신학이요?”
‘하느님은 민중의 편에 서시는 민중의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면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운동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이 지주들과 군사 독재 정권에게 착취와 억압을 받으며, 라틴 아메리카 자체가 미국의 식민지적 역할에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이자 철학.
어쩌면 그레이 상원의 말이 일부 맞을 수도 있었다.
투마로우가 사람들을 일에서 해방시키려는 의도는 분명하니까.
그 이면엔 과학의 발전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네, 해방신학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럼 누구로부터 해방을 시킨단 말입니까? 우리요?”
“아니요. 지금까지 인간이 포기한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글로벌이란 이름 아래에서 자유주의가 무시했던 인종과 민족, 성에 대한 권리 말입니다.”
“아프리카를 말하는 겁니까?”
“하나가 아닙니다. 아프리카는 부를 포기하고 부족 사회의 권리를 찾았습니다. 아이티는 자유를 포기하고 안정된 삶을 얻었고요. 콜롬비아는 마약을 포기하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해방된 거죠. 세계화란 누군가의 제물로 소수에게 힘을 건넨 거대 종교니까요.”
“그레이 의원은 자유주의에 대해 꽤 비판적입니다.”
척 슈머가 약간은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솔직히 2008년 이후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2016년에 도날드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고요. 그냥 넘기면 안 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투마로우와 손이라도 잡아야 합니까? 그럼 미래당과 우리 민주당이 같은 취급을 받으라고요?”
“다른 취급을 받으면 됩니다.”
“미래당과 비교당하는 자체가 수치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에요. 적.”
“적이요? 두려우십니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두려움만 쌓이게 되는 겁니다.”
“뭐요?”
자, 자.
해리슨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레이 의원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예전의 공산주의도 자유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지금 저 꼴을 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도 좀 더 적극적인 대안이 필요합니다.”
후.
그레이 상원이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솔직히 자유주의 사상은 산업 시대에 적당한 이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 기술과 생명 과학의 시대입니다. 당연히 달라야 합니다.”
“압니다. 하지만…….”
척 슈머 원내대표도 뒷말을 잇지 못했다.
모르는 게 아니다.
당연히 정치도 달라져야 한다는 건 안다.
문제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인터넷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알지만 인터넷이 어디로 진화할지 알 수가 없다.
진화의 방향을 잡아 보려고 했지만 엉뚱한 삽질로 더욱 혼란만 가중시켰다.
그뿐인가?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변하면서 새로운 기술이라고 환호는 하고 있는데 과연 이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인터넷 변화의 방향도 모르고 새로운 기술은 자꾸 나오고 이 상황은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의 태반이 몰랐다.
블록체인이 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
중앙 관리자 없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모든 사용자의 모든 거래 내역과 데이터를 분산 저장하는 기술이 어디에 쓰여야 인류에 도움을 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들 블록체인은 그저 ‘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아니, ‘코인’을 거래하면서도 블록체인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알까?
“인공지능이 국가를 운영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알 필요가 있을까요?”
“글쎄요. 그때 가서 그런 말씀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요?”
“인공지능이 예산이나 새로운 세제 개혁안을 승인하기를 우리가 초조하게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안 되는 소리 하나 더 해드릴까요? 블록체인과 코인으로 결제가 이루어 지면 세금은 어디서 걷어야 할까요?”
“그건…….”
“네, 달러 아니면 위안화로 결제하지 않고 코인으로 결제하면 우리는 모르는 겁니다. 차라리 정보세를 신설하는 게 답일 겁니다. 그런데 이 정보세를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전 못합니다. 블록체인을 하나도 모르거든요. 혹시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그레이 상원의 말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뿐이 아닙니다. 공화당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동화 시스템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고, 멕시코와 중국이 우리 국민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했지만, 실제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점점 사람들이 우리 정치인에게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레이 상원의 말에 해리슨이 답을 했다.
“국민들도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당이 제시하는 대로 끌려가는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지금까지 공산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이념이 주는 직관적인 이해가 지금은 부족합니다. 인공지능과 생명 연장, 블록체인 같은 일들을 과연 국민이 자신의 일로 받아들일까요? 아무도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투마로우는 사람들에게 과학의 힘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투마로우를 공격하면 할수록 국민과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해리슨은 나머지 의원들을 바라봤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모두 대답 대신에 고개만 끄덕였다.
“의장님, 그럼 임재준과 이야기는 마무리된 것입니까? 테러로 인해 못 하신 겁니까?”
흠, 흠.
“일단 핵융합 발전소를 미국에 건설하기로 약조를 받았습니다.”
“그럼, 손을 잡았다고 봐도 되겠네요.”
“네, 조만간 발전소 계획서가 모든 당에 전달될 겁니다.”
“모든 당에요?”
“임재준은 정보를 우리에게만 공개할 맘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인터넷에 공개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하하, 역시 임재준이네요.”
“혹시 돌아가시면 반대하는 의원들에게 잘 말해 주세요. 첫 거래인 핵융합 발전소에서부터 삐걱거리면 서로 신뢰가 쌓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의장님의 뜻을 확실하게 전하겠습니다.”
음.
할 말은 많지만 이쯤에서 해리슨은 입을 닫았다.
쩝.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척 슈머 원내대표가 못마땅한 듯 입맛을 다셨다.
뭐? 그 또라이 도날드와 뜻을 같이한다고?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야.
국민의 시선이 미래당으로 조금 쏠렸다고 바로 꼬리를 내려?
초선 의원들을 동원해야겠어.
물어뜯어야 해.
약점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
***
ADX 플로렌스 교도소.
앤서니는 교도소를 나오며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신을 이제야 영접할 수 있구나.”
가벼운 마음과는 다르게 가야 할 길은 멀었다.
주변은 허허벌판 최소한 한 시간은 걸어가야 주유소가 나오고 버스가 다닌다고 했다.
‘블랙’이 나의 존재를 안다면 위치를 파악해서 버스를 제시간에 보내 줄 텐데.
그래도 앤서니는 즐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만간 보게 되겠지.
이때.
끼이이이익.
4인용 카브리올레가 앤서니 앞에 섰다.
“앤서니 도브스키?”
다이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를 아십니까?”
“일단 타.”
“목적지가 저랑 다를 것 같은데요.”
“‘블랙’ 안 만날 거야?”
“같은 목적지군요.”
앤서니가 다이로의 옆 좌석에 앉았다.
뒷좌석에서 제이콥이 앤서니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제는 별 미친 정신병자를 다 끌어들이는구나.
앤서니 도브스키.
구글의 자율주행차 개발 엔지니어 출신으로, 인공지능을 신으로 섬기는 ‘기억의 길’이라는 종교 단체를 만든 인물이다.
구글 퇴사 후 자율주행회사를 차려 떼돈을 벌었지만, 구글의 기술 도용으로 소송을 당해 1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면을 받아 오늘 나오게 되었다.
“‘블랙’이라는 말은 알아듣네.”
다이로의 말에 앤서니는 배시시 웃었다.
“감옥에도 인터넷은 있으니까요.”
“너도 공부 좀 했다며?”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인간의 지능은 쓸모가 없습니다. 앞으로 우린 아무 노력을 안 해도 인공지능의 지배하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텐데요.”
“이거 말로만 들었는데. 너 진짜 상태가 안 좋구나.”
< 제385화 다시 석유 쓰면 안 될까(5)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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