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84화 다시 석유 쓰면 안 될까(4) >
의아한 표정의 재준에게 해리슨이 설명을 덧붙였다.
“유가로 인해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핵융합 발전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뭐, 대기업 몇은 파산을 면치 못하겠지만, 죽어가는 대기업을 살리려다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진 경험이 어디 한두 번이었습니까.”
“음, 여러 번이죠.”
그렇지, 어차피 회생할 수 없는 분야는 일찌감치 정리하는 게 낫다.
“그럼 발전소 건립에 필요한 자금이 꽤 되는데 다른 의원들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하원은 미래당이 있으니 문제없고 상원에서 반대하는 의원을 설득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특별히 살은 안 붙이고 1,800억 달러에 핵융합 발전소를 건설해 드리죠.”
“네? 얼마요?”
“1,800억 달러요.”
“900억 달러로 알고 있는데요.”
“누가 그래요?”
“연일 언론에서 사우디에 900억 달러에 건설한다고 하던데, 아닙니까?”
“그건 사우디죠. 우리가 네옴 시티 건설에 참여하고 있잖아요. 거기 공사 비용만 1조 달러가 넘어요. 사우디 핵융합 발전소는 투마로우 소유입니다. 900억 달러는 원가라고요 원가. 깎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핵융합 발전소 건설을 다른 나라에 맡길 수는 없다.
지금 Q값 5를 달성한 곳은 진코퍼레이션이 유일하니까.
진코퍼레이션 이외에는 가장 높은 값을 달성한 나라는 일본의 1.25가 최고다.
하지만 1.25로는 발전소를 120배 늘려 지어야 가능한데 그럼 1,800억 달러가 아니라 3,600억 달러가 들어갈 것이다.
“그래도 너무 비싼 거 같은데요?”
“에헤, 거, 나중에 전문가와 계산을 해 보세요. 화력 발전이나 원자력 발전은 상승하는 화석 연료 비용도 그렇고 원자력 폐기물 쌓이면 쌓일수록 처리 비용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잖아요.”
“그렇긴 해도…….”
“그리고 기후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금, 미국이 큰소리칠 기회잖아요. 갈수록 미국 입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던데.”
흠, 흠.
뭐라고 반박을 할 수 없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아주 시기적절하게 얘기를 한 거예요. 만약 미래당이 먼저 저에게 핵융합 발전소 건립을 건의했다면 민주당으로서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당이 되는 거 아닌가요? 국민들한테 외면받기 딱 좋겠네.”
미래당! 여기서 더 밀리면 안 된다.
“아, 알겠습니다. 설립 자금 계획서를 주시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그건 아셔야 합니다. 계획안은 모든 당에 보내질 겁니다. 민주당에만 주는 게 아니란 말이죠. 아예 인터넷에 공개할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그건 위험한 생각입니다.”
“허허, 또 또, 그러시네. 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는 거 아직도 모르시네. 자꾸 뭔가를 소수의 사람이 조물딱거리고 넘어갈 생각을 하면 안 된다니까요.”
후.
적응이 안 되네.
국가적 차원의 일을 인터넷에 공유하겠다니.
해리슨은 빌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일단 투마로우와 손을 잡는 시늉이라도 하세요.
그래, 일단 시간을 벌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이때,
다다다다닥.
급한 발소리와 동시에 우렁찬 고함이 들렸다.
“상원 의장.”
재준이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국방부 장관?
얼굴을 보니 열 받았나 보네.
그렇겠지. 순순히 자리에서 내려올 인간이 아니지.
시키는 대로 사우디와 전쟁까지 벌였는데.
책임을 져야 할 윗선은 그대로고 자신만 당하게 생겼으니 당장이라도 해리슨을 보고 따지러 왔나 본데.
훅, 훅.
거친 숨을 몰아쉰 국방부 장관이 눈을 부라리며 해리슨과 재준을 번갈아 봤다.
“이럴 줄 몰랐습니다. 저희 몰래 임재준을 만나서 거래를 하다니요.”
어허, 이 사람이.
“말조심하세요. 거래라니요. 위기에 빠진 미국을 위해 국정을 의논하는 겁니다.”
“그게 거래지 뭡니까? 둘이 작당하고 나와 부통령에게 사우디 전쟁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내쫓으려는 거 아닙니까?”
“뒤집어씌우다니요. 말이면 다 내뱉어도 되는 줄 아십니까?”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못할 말이 어딨습니까?”
상원 의장과 국방부 장관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에이, 거참, 싸우려면 전 갑니다.”
재준의 말에 국방부 장관이 돌아봤다.
“임재준, 당신이 어째서 상원 의장과 만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누굴? 내가 누굴 조심해야 하는데요? 여기 상원 의장입니까? 아니면 끈 떨어진 당신입니까?”
“흐흐흐, 상원 의장을 진짜 믿는 겁니까?”
“이제 갈 곳 없는 당신보다야 훨씬 믿음직스러운데.”
“우리 뒤에 누가 있는 줄 압니까?”
“국방부 장관!”
해리슨의 목소리가 거의 괴성에 가까웠다.
국방부 장관을 노려보는 눈에서 이글이글 불이 타올랐다.
다 죽일 작정인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밀려나면 난 전범이 되는 겁니다. 다시 이쪽으로 발도 못 들여놓죠. 아니, 나를 받아주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 당신 진짜 죽어요.”
“상관없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진짜 그들이 내린 결정인지 당신 독단으로 내린 결정인지.”
국방부 장관이 스마트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휘이이이이잉.
소형비행기 한 대가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재준은 비행기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저거 요즘 자주 보네.
비행기 아래가 개폐되더니 무언가 묵직한 것이 떨어졌다.
폭탄?
“도련님!”
천 실장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재준을 덮쳤다.
상원 의장의 경호원들도 약간 늦게 상원 의장을 쓰러뜨려 보호했다.
쾅, 묵직한 것이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잠깐 찌릿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에고, 에고, 천 실장님 난 괜찮아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네, 그런데 뭐가 떨어진 겁니까?”
“EMP 폭탄 같습니다.”
“EMP?”
재준은 앞에 있는 국방부 장관이 작동이 멈춘 스마트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계속 터치하는 게 보였다.
“이거 왜 이래? 왜 핸드폰이 먹통이 된 거야?”
재준은 눈을 들어 소형비행기를 찾았다.
이제 EMP까지 쓰는 거야?
이때.
“와, 임재준, 진짜 오랜만이네.”
재준이 앞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이로,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근데 그쪽에 붙은 거예요?”
“이쪽이 어딘데?”
“제이콥은 어디 있습니까?”
“오, 알고 있었어?”
“모르는 게 이상한 거 같은데요. 둘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왔잖아요. 이미 유명인사가 된 것 같은데.”
“난 어딜 가나 사람들이 주목하더라고.”
“그래, EMP까지 써가며 나를 만나러 온 이유가 뭡니까?”
“그거야, 임재준이 죽어 줬으면 해서.”
“데미안이 시킨 겁니까?”
“데미안? 데미안이 누구야?”
“뭐야, 자기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일을 하는 거예요? 이거 많이 실망인데.”
“내가 그렇지 뭐.”
철컥.
다이로가 총을 꺼내 슬라이드를 잡아당기자,
“여기가 어디라고.”
총 버려!
국방부 장관과 상원 의원 경호원들이 다이로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큭큭큭큭.
다이로가 모두를 비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위험한 건 내가 아닌데.”
이때.
휘이이이잉.
아까 그 소형비행기가 그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도련님.”
천 실장은 재준의 팔을 잡아당기며 비행기 추락 예측 지점의 뒤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잔해는 대부분 전방을 향해 날아간다.
재준과 천 실장의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며 뒤쪽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추락했다.
쾅.
사방에 비행기 잔해가 튀면서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소형비행기라 그리 큰 폭발은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연기 너머에 다이로와 이쪽의 재준이 서로 마주 보았다.
비행기의 파편 조각이 스치고 지나간 재준의 빰에 한 줄기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다이로가 총을 까딱거리며 움직였다.
저 정도면 충분하겠네.
상원 의장의 경호원들은 의장을 덮친 상태였고 국방부 장관은 머리를 땅에 박고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탕, 탕, 탕, 탕.
몸을 일으키는 경호원들의 머리를 박살 낸 다이로는 상원 의장 해리슨을 보았다.
콧잔등을 찡그린 다이로가 말했다.
“걱정 마, 우리 같은 편이야.”
상원 의장은 멍하니 다이로를 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같은 편이라니.
다이로는 국방부 장관에게 다가가서 장관을 상태를 살폈다.
장관이 머리를 들고 다이로를 보는 순간.
“나, 국방부 장관…….”
탕.
장관의 머리에 조그만 구멍이 뚫리며 쿵, 바닥에 쓰러졌다.
“다이로!”
허드슨강에서 모터보트에 시동을 건 제이콥이 다이로의 이름을 외쳤다.
“다이로, 빨리!”
다이로가 재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봅시다.”
“그러지.”
재준이 빙글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까딱였다.
천 실장이 재준 앞으로 나섰다.
“저놈이 다이로입니까?”
“네, 콜롬비아에서 꽤 잘 나가던 인물이에요.”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폭발 상황에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요. 총을 다루는데 망설임도 없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놈입니다.”
“괜찮아요. 우린 꽤 친하거든요. 서로 죽일 생각은 없을 겁니다. 서로 주고받을 게 있거든요.”
천 실장은 모터보트를 타고 멀어지는 다이로를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놈 다시 만나면 반드시 죽인다.
“보스.”
이제야 블랙워터가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EMP가 터지는 바람에 저희 장비가 전부 먹통이 돼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좋은 경험을 했으니까요.”
재준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어 액정을 봤다.
까맣게 죽은 스마트폰.
좀 위험하긴 했어.
당장 EMP에 대비해야겠는걸.
재준도 다이로가 사라진 곳을 보며 빙글 웃었다.
다이로, 약속은 아직 남아 있는 거야.
***
부아아아아앙.
모터보트가 최대 출력을 내며 강 위를 달렸다.
“다이로, 왜 그런 거야?”
“뭘?”
“임재준을 죽일 수도 있었잖아.”
“죽여?”
“그래.”
다이로가 제이콥을 보며 양쪽 입꼬리를 내리며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미친놈.”
“뭐? 나보고 한 소리야?”
“그래, 너.”
“이게 진짜.”
“임재준 옆에 네 눈을 파먹은 놈이 있었는데 봤어?”
“뭐? 진짜?”
“넌 눈 하나 잃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해. 멀리서 보는데도 바지에 오줌이라도 지릴 뻔했어. 진짜 악마 같은 놈이야. 으휴, 꿈에 나올까 두렵다.”
“그래서 총도 한 방 못 쏘고 빠진 거야?”
“총?”
다이로는 제이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이콥, 넌 어디 가서 총 쏘지 마라. 총을 당길 때는 내가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 때 당기는 거야. 망설임 없이. 하지만 죽이지 못하면 내가 당할 것 같은 상황에서는 절대 당기면 안 돼. 이 멍청아. 나한테 무식하다고 하더니 넌 진짜 멍청하다. 멍청해. 총을 쏘라고? 허, 죽으려고 환장하지 않고서야. 아유.”
다이로는 아까 재준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천 실장의 눈매를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소한 외인부대 출신으로 10년은 사람 잡아먹은 새끼가 분명해.
그 먼 거리에서 내가 다리에 힘이 풀리기는 처음이네.
다이로는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하얀색 스위치를 만지작거렸다.
빠드드득.
목을 좌로 꺾었다.
“속도 좀 내 봐.”
바닥에 있는 위스키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대고는 한 번에 반병 이상을 마신 뒤 입을 뗐다.
카~아.
빨리 가서 스위치 위로 좀 받아야겠다.
< 제384화 다시 석유 쓰면 안 될까(4)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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