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83화 다시 석유 쓰면 안 될까(3) >
빌은 해리슨의 질문에 미소를 지었다.
“핵융합 발전소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반대할 명분이 거의 없을 텐데요. 친환경적이고 고갈될 염려도 없고 에너지 효율도 좋지 않나요?”
수소 1g의 핵융합 에너지는 석탄 21t, 석유 약 60드럼의 화학 에너지와 맞먹는다.
단지 수소 1g으로.
그리고 연료로 쓰이는 중수소만 따져도 바다에 약 22조 6500억 톤이나 매장되어 있다.
이 정도 수소에서 얻어지는 에너지의 양은 인류가 200억 년 동안이나 소진해야 전부 감당할 수 있는 양이다.
에너지 효율을 따질 사항이 아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여기서 핵융합 발전소까지 반대하고 나서면 다음 선거에서 패하고 지금의 상원 의장 자리도 내주어야 할 겁니다.”
후.
한숨이 깊어졌다.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정치란 상대 정당이 지지하는 사안은 무조건 반대해야 한다.
미국의 밖에서 미국을 위협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분명 미래당이 핵융합 발전소를 지지하고 나서면 민주당은 당연히 반대해야 하는데 명분이 아예 없다.
혹시 핵융합 발전소에서 연료가 유출되면 어떡하나 걱정하겠지만, 핵융합 발전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사고는 중소수-삼중수고 반응로가 망가져서 삼중수소가 유출되는 사태이다.
그런데 원자로 운영에 필요한 삼중수소는 수백 g에 불과하기 때문에 누출되더라도 순식간에 무해한 수준 미만으로 희석되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게다가 플루토늄처럼 24,000년에 달하는 긴 반감기를 갖고 강력한 방사선을 뿜어대는 위험한 방사성 동위원소들과 비교하면 삼중수소의 반감기는 12.3년에 불과하며 투과력이 약한 베타선만을 방출하기 때문에 위험성은 극히 낮다.
그럼 혹시 핵융합 발전소가 폭발하면 어떻게 되나?
러시아의 체르노빌이나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처럼 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핵융합 발전은 극소량의 수소를 필요할 때마다 융합로에 조금씩 투입해서 연료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반응로 안에서 핵반응 제어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폭발이 일어날 만큼의 연료가 없다.
핵융합 발전에 사용되는 수소 플라즈마는 고체와는 달리 밀도가 매우 낮아서 부피 당 열에너지 수용량이 지극히 낮다.
이 때문에 제어에 실패해서 플라즈마가 반응로 내벽에 부딪히더라도 반응로가 녹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고, 오히려 플라즈마가 식어서 핵반응이 중단되는 것에 그친다.
간단히 말해 핵융합 반응 제어에 실패해도 자기가 알아서 식어버리기 때문에 대형 참사가 발생할 일은 전혀 없다.
차라리 저장하던 수소에 불이 붙어 폭발하는 게 더 현실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핵융합 발전소를 반대할 명분을 굳이 찾아서 들이대 봐야 이슈가 되어 투마로우 인기만 치솟을 게 뻔했다.
“그러니까 일단 투마로우와 손을 잡는 시늉이라도 하세요.”
후.
결국, 이렇게 결론이 나는 건가?
해리슨 상원 의장은 앞으로 겪을 다른 의원과의 충돌을 그려보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에 세르게이가 덧붙였다.
“투마로우와 손을 잡으려면 선물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도 하나의 관례인데요.”
“이번에 대통령이 알게 된 부통령과 국방부 장관이 적당하지 않을까요?”
아서가 누굴 잡아다 바치라고 콕 찍어서 말했다.
해리슨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제 손으로 두 명을 내치라는 겁니까?”
“그 정도는 해야 상대도 믿는 겁니다. 임재준은 말로 하는 약속은 믿질 않아요. 잘 알면서 그러십니다.”
후.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
“해리슨, 당신만 힘든 게 아닙니다. 우리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러나 이런 일에는 사정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나중에 따로 챙겨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을 처리하겠습니다.”
“임재준은 언제 만날 겁니까?”
끙.
해리슨의 신음이 방안에 울렸다.
“바로 약속을 잡겠습니다.”
“약속이 잡히면 알려주세요. 저희도 준비할 게 있습니다.”
“네.”
후.
오늘은 술이나 왕창 먹어야 잠을 잘 수 있겠다.
***
뉴욕항 허름한 창고.
철컥, 철컥.
권총을 점검하는 다이로의 손이 분주했다.
손에 익은 총을 부탁했더니 제이콥이 구해서 가져왔다.
아주 많이 흡족해하는 다이로에게 제이콥이 물었다.
“정말 모니터가 임재준을 죽이라고 한 거야?”
아직 데미안의 실체를 모르는 제이콥은 데미안을 모니터라 불렀다.
“글쎄, 임재준 주위에 하도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죽이는 건 쉽지 않아. 그냥 병원 신세를 질 정도의 위협이면 돼.”
“그게 그거 아냐? 병원에 입원할 정도면 치명적인 부상인데.”
“위협이라고, 위협. 그냥 바닥에 넘어져도 병원에 입원할 수 있어.”
“도대체 모니터의 의도를 모르겠어.”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 뭐. 돈도 많이 주는데.”
“하긴 1,000만 달러면 적은 돈은 아니지.”
이때.
벌컥 문이 열리고 위쉬안이 무언가 무거운 물건을 들고 들어섰다.
“그게 뭐야?”
“코일.”
“그걸로 뭐하게?”
“몰라, 저놈이 EMP 폭탄을 만들라고 하니까 만든 거지.”
위쉬안은 고개를 까닥이며 모니터를 가리켰다.
다이로가 모니터 한 번 위쉬안 한 번을 바라본 후 물었다.
“EMP가 뭔데?”
“electromagnetic pulse. 그것도 몰라?”
“설명을 해야지, 누가 영어를 알고 싶대?”
어이구, 정말.
“짧은 시간에 주변으로 확 번져나가는 파장을 EMP라고 하는 거야. 됐지?”
“EMP를 터뜨리면 어떻게 되는데?”
“주변 전자제품 회로가 타서 고장 나.”
다이로가 불편하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가 이리 복잡하게 처리하지? 그냥 저격수 불러서 한 5km 밖에서 저격하면 편하지 않나?”
끌끌거리며 위쉬안이 혀를 찼다.
“‘블랙’이 있어서 안 돼. 5km가 아니라 100km에서 저격할 수 있다 해도 다 들통나.”
제이콥이 ‘쩝’ 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지. ‘블랙’이 CCTV를 통해 임재준 주변을 살피는 것 같은데. 저격은 방법이 아니야.”
“CCTV면 사각지대를 찾을 수 있지만 ‘블랙’한테는 사각지대란 없어. 음, 이건 내 추측인데. 아무래도 차량용 카메라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카메라도 점령한 것 같아.”
“스마트폰은 좀 무리 아닌가?”
“‘카리브’ 있잖아. 이미 ‘카리브’에 모든 권한을 허용했으면 ‘블랙’이 이용하는 건 일도 아니지.”
“잠깐만.”
다이로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블랙’이 뭐야?”
제이콥과 위쉬안이 뭐 이런 멍청한 놈이 우리 팀이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쪽에 관심이 없으니 모를 수도 있지. 투마로우가 보유하고 있는 인공지능 이름이야.”
“인공지능? 그 아이티의 ‘오시리스’인가 하는 것 말이지?”
“정확하게 말하면 ‘오시리스’를 만든 인공지능이 ‘블랙’이야.”
“인공지능이 또 다른 인공지능을 만든다고?”
“다이로, 시간 있을 때 투마로우에 대해 공부 좀 해라. 모르는 게 너무 많잖아.”
“아니, 아니. 그럼 인공지능 근처에 EMP를 터뜨리면 ‘블랙’인지 뭔지가 망가지는 거 아냐?”
위쉬안이 쩝쩝 입맛을 다시며 다이로를 쳐다봤다.
“투마로우가 바보도 아니고 인공지능이 있는 곳에 EMP 차폐 방어막을 안 해놨겠어? 요즘 자동차도 다 되어 있는데?”
“그래? 자동차에도 EMP가 안 먹혀? 이야, 요즘 기술 많이 좋아졌구나. 그럼, EMP로 피해를 줄 수 있는 건 뭐야?”
어유, 정말, 이런 놈을 팀이라고.
“됐어. 알아서 찾아봐.”
위쉬안이 다이로의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툴툴거렸다.
“만나는 날이 언제야?”
“이틀 뒤. 해리슨이 임재준을 만나면 바로 시작하라고 했어. 장소는 리버티 주립공원.”
철컥, 철컥.
다이로는 다시 총을 점검하며 재준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보겠네.
***
이틀 뒤.
리버티 주립공원.
미국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정면은 당연히 바다로 나가서 봐야 하고.
재준은 천 실장과 공원의 서쪽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 공원의 서쪽은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다.
시위가 이뤄지는 장소로 리버티 공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공원 동쪽 맨하튼의 정경이 보이는 곳에서는 시위대가 구호를 외쳐대고 있었다.
정부는 책임지고 물가를 안정시켜라.
정부는 책임지고 물가를 안정시켜라.
천 실장은 멀리서 들리는 구호를 배경 삼아 지난 과거를 돌이켜 봤다.
강산이 한 번은 바뀔 시간인데.
어째 도련님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앞장서고 언제나 먼저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도련님,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무슨 상원 의장 하나 만나는데 위험합니까?”
“도련님으로 인해 저쪽이 지금 상당히 곤란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람을 고용할 수도 있습니다.”
“에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그리고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머리가 똑똑하다고 믿기 때문에 먼저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들어요. 이번에 대통령 협박하는 거 봐요. 폭력은 마지막 선택지일 뿐이에요.”
저벅, 저벅, 저벅.
천 실장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박자를 세는 듯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신사 한 명이 느긋하게 재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임재준, 오랜만입니다.”
“해리슨, 오랜만입니다.”
해리슨이 다가오더니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만남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할 말이 있는데 피하면 안 되죠.”
“맞습니다.”
“좀 걸을까요?”
재준과 해리슨이 허드슨강 변을 따라 이어져 있는 다리인 ‘리버티 워크’를 따라 걸었다.
“먼저 이번 사우디 전쟁의 책임을 물어 부통령과 국방부 장관을 경질할 겁니다.”
재준이 해리슨을 심술 맞게 바라봤다.
“의장님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의장을 그만둔다면 의회는 더 혼란해지니 이번 일을 마치고 정국이 안정되면 저도 의장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오, 그래요? 정국을 어떻게 안정시킬 겁니까?”
“미래당과 정정당당하게 정책 대결로 승부를 보겠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요?”
점심으로 무얼 잘못 먹었나?
아니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하하하, 물론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사우디 전쟁을 통해 많은 걸 배웠습니다. 로봇도 인공지능도 무조건 배척하는 건 우리 스스로 구태의연한 집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더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네, 저희도 변화에 적극 대처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투마로우가 진행하는 변화가 있으니 다른 분야의 변화에는 저희가 나설 겁니다.”
“오호, 진심이신가 보네요.”
“그래서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그게…….”
흠, 흠.
부탁에 서투른 듯 해리슨이 헛기침을 했다.
“핵융합 발전소를 미국에도 지어주세요.”
“정말입니까?”
이게 웬 떡이냐?
어떻게든 여론을 형성해서 의회를 밀어붙이려고 했는데 제발 걸어들어오다니.
< 제383화 다시 석유 쓰면 안 될까(3) > 끝
ⓒ 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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