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69화 이제 너희들 석유 못 팔아먹어(3) >
뉴욕항 버려진 창고.
끼이이익.
억지로 여는 힘에 의해 문에 달린 녹슨 롤러가 비명을 질러댔다.
위쉬안은 안으로 들어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창고 내부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코를 찌르는 메케한 냄새로 보아 썩어가는 철제 기계들뿐인 게 분명했다.
“뭐야?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취미 한번 더러운 놈이네.”
그때.
확, 하고 천장에 달려 있던 전등 몇 개에 불이 들어오고 밝기를 유지하는 게 버겁다는 듯 깜빡였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모니터 한 개에 전원이 들어오더니 치직치직 노이즈가 잔뜩 낀 화면에 사람 형상을 한 실루엣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위쉬안 씨, 잘 오셨습니다.
하울링을 포함한 묵직하게 내뱉은 목소리는 마치 로봇의 그것과 같았다.
“넌 뭐 하는 놈이길래, 사람을 이런 식으로 만나자고 한 거야?”
-한 가지 일만 처리해 주면 됩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아직 허락하지 않았어. 확신이 없단 말이지.”
-해야 할 일은 이것입니다.
“야, 내 말 안 들은 거야? 아직 너를 믿을 수 없다니까?”
-CIA CCTV를 10분 동안 꺼 주십시오.
“뭐? CIA?”
이런 싸이코 새끼.
“야, CIA가 무슨 동네 빵집인 줄 알아? 거기 보안이 끈다고 꺼지는 줄 아냐고!”
-날짜는 앞으로 일주일 후. 앞에 자세한 일정과 CIA 보안 시스템에 대한 자료가 있을 겁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야, 내 말이 안 들려? 그리고 필리핀 1억 달러는 확실한 거야?”
치지지지직.
팟.
화면이 꺼졌다.
“이런 개새끼를 봤나. 자기 할 말 만하고 사라져? 내가 미쳤냐 CIA를 뚫게? 내 인생 두 번 종 칠 일 있냐?”
위쉬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곧장 창고를 나가려 했다.
나 원,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괜히 시간만 낭비했잖아.
그런데,
CIA?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예전에 홍커에서 활약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화려했던 나날.
에이, 워차오(X발)!
위쉬안이 저벅저벅 걸어가 모니터 앞의 서류를 휙 집어 들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하지만, 궁금증은 참을 수 없었다.
사락, 사락.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미간도 같이 찌그러졌다.
이런 미친놈.
이건 그냥 평범한 CIA 자료잖아.
이게 무슨 CIA 보안 시스템이라고…….
툭.
종이 사이에 있던 사진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위쉬안의 시선도 같이 떨어졌다.
뭐야?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안에서는 재준과 어떤 인물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이거 뭐야? 이 새끼, 이 새끼는 그 새끼잖아.
재준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인물.
위쉬안의 기억에서 한 시도 떠나간 적이 없는 그 눈동자.
당시에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섬뜩한 눈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임재준이었다고?
나를 이렇게 만든 게 임재준이야?
위쉬안은 모니터 화면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팡, 팡.
“야, 다시 나와봐.”
팡, 팡.
“야 다시 나와 보라고. 이게 무슨 소리야? 이건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냐? 이 개새끼야. 그 새끼가 임재준과 한패인 거냐고. 말을 해. 말을.”
이…….
위쉬안은 이를 꽉 깨물고 주변에 굴러다니던 녹슨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향해 사정없이 휘둘렀다.
“말을 하라고 이 새끼야!”
쾅, 쾅, 쾅.
“말을 해!”
쾅, 쾅, 쾅.
씩씩대면서 박살 난 모니터를 보고 다시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필리핀에서 당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저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해킹은 순조롭게 끝났고 자신들은 카지노에서 환전을 하다가 들킨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는데.
필리핀 사건을 다시 파고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아니었단 말이야? 왜?”
왜…… 왜…… 왜……
위쉬안의 분노가 창고 안에서 메아리가 되어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필리핀 사건 이후 홍커는 뿔뿔히 흩어졌다.
가장 서러운 건 중국 공산당의 모르쇠였다.
단 한 마디의 논평도 없이 홍커를 외면해 버렸다.
필리핀 감옥에서 3년을 썩고 나왔을 때는 이미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뒤였다.
천재적인 해킹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을 일으킨 해커는 금융권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고 스카웃 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상하게 자신에게는 아무도 접근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중국 기업에서도.
이게 다 임재준, 이 개새끼가 나를 철저히 짓밟았기 때문이었어.
내가 불법 도박 사이트나 개설하는 허접한 일이나 하고 살게 만든 건 바로 임재준, 바로 너였다고.
털썩.
위쉬안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임재준.
그리고 CIA?
10분간 CCTV를 정지하고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야?
1억 달러.
다 때려치우고 어디를 가서든 편하게 살 수 있는 돈이다.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열 손가락.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손가락을 풀어 봤다.
할 수 있을까?
CCTV를 통제하려면 보안 시스템을 뚫어야 한다.
하라면 못 할 것도 없다.
문제는 추적을 따돌리는 것이다.
흥, CIA가 아니라 투마로우 퀀트가 와도 나는 못 잡지.
지금 하는 불법 도박 사이트만 해도 복잡한 경로를 만들어 추적이 불가능하게끔 처리했으니까.
하지만 의심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 새끼가 진짜로 1억 달러를 빼낼 방법을 알고 있다고?
나를 엮으려는 수작이면?
뭘 생각하는 거야, 위쉬안.
임재준에게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이미 지난 일에 나머지 생을 태울 수는 없어.
때려치워.
위쉬안은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터덜터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위쉬안이 바깥으로 나오자 중절모를 멋들어지게 쓴 남자 한 명이 차에 기대어 위쉬안을 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위쉬안.”
누구?
남자가 모자를 벗자 왼쪽 눈에 검은 가죽 안대를 차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놈인데.
“아, 설마, 제이콥?”
“알아보니 다행이네.”
모자를 다시 쓴 제이콥은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후.
“타지. 가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 좀 들어 보게.”
“이 계획, 당신이 세운 거야?”
후.
담배 연기를 뿜으며 제이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고용된 사람일 뿐이야.”
“너를 고용한다고? 큭큭,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을 진짜처럼 이야기하네.”
“그렇지, 나도 처음엔 그렇게 반응했어. 지금은 한물갔지만 그래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나인데 말이야. 근데 이게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고. 빚이 있는데 그걸 남기고 사는 것도 참 찜찜하잖아?”
“임재준을 말하는 거야?”
“뭐, 그렇지.”
“그래서 얼굴도 모르는 놈의 말을 믿는다고?”
“흐흐, 얼굴은 모르지만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좀 궁금증이 생기더라고. 어떤 놈이 이런 대담한 계획을 세웠는지도 궁금하고.”
“대담한 계획?”
후.
제이콤이 마지막 연기를 뿜고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비벼 끄며 말했다.
“대담하지. 너무 단순해서 과연 될까 싶을 정도로. 뭐랄까…….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계획이거든.”
“단순하다고?”
“그래, 단순해. 일단 타. 존 브레넌이 기다리고 있으니 같이 만나보면 답이 나오겠지.”
“존 브레넌? 전 CIA 국장?”
“알고 있네. 그래 그 존 브레넌이야.”
위쉬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누구지?
도대체 이 사람들을 모아서 무얼 하겠다는 거야?
***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 김정은 집무실.
“임재준 동지, 어서 오시오.”
하하하하하.
“아, 네.”
너무 인위적인 웃음 아냐?
그런데 호칭이 동무에서 동지로 바뀌었네.
북한에서 동무와 동지의 의미는 아주 크다.
동무가 누구누구 ‘씨’ 정도라면 동지는 자신과 동급의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사용한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김정은 입에서 동지가 나온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재준의 이번 러시아 원유 사재기에 김정은이 얼마나 놀랐는지 재준이 지도자 동지와 동급이 되었다.
김정은은 재준에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허공을 찔러대며 말했다.
“근데 러시아 원유가 오자마자 배에 실어 다시 유럽으로 갈 거면 왜 우리 북조선을 거치는 겁니까? 운임만 비싸지는데.”
“운임이요? 우리가 내는 것도 아닌데 뭔 걱정이세요?”
“너무 돈을 쉽게 벌어서 그럽니다.”
“아. 돈.”
하하하하하하.
러시아는 헤이룽장성 위에 있는 스코보로디노까지 파이프라인으로 원유를 보내고 거기서 석유 트레일러로 북한까지 원유를 실어 날랐다.
트레일러는 바로 청진항을 향하고 바로 유조선에 실려 유럽으로 향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번거롭게 일을 하는 걸까?
“임재준 동지, 언제까지 이 짓을 할 겁니까?”
“며칠만 하면 됩니다.”
“그 후에는요?”
“돈만 거래하면 되죠.”
“그럼 원유는요?”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가야죠.”
“그럼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거 아닙니까?”
“아뇨, 수출국은 러시아가 아니라 북조선입니다. 엄연히 김정은 지도자 동지가 수출하는 거라고요. 유럽은 돈을 러시아가 아니라 북조선으로 송금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가요?”
“그럼요. 우리가 물건을 사는데 북조선에서 받든 프랑스에서 받든 뭔 상관입니까?”
엥?
“그럼 지금은 왜 북조선에서 받는 겁니까?”
“지금은 보여주는 거죠. 내가 러시아 원유를 수입하니까 잘 봐둬라. 원유의 주인은 북조선이다. 뭐 이런 거죠.”
“누구한테요?”
“미국이요.”
“미 제국주의 놈들한테요?”
“네.”
김정은은 재준은 아리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임재준 동지는 미 제국주의랑 친한 거 아니었습니까?”
“난 사람하고 친한 거지 국가랑 친하지는 않습니다. 근데 꼭 저를 싫어하는 정치인들이 어디에든 있거든요. 그러면 이렇게 본보기를 보여줘야, 아, 그렇구나. 내가 국가를 위험에 빠뜨렸구나, 하거든요.”
“맞아, 그렇지, 그런 동무들은 정신을 차리게 해줄 필요가 있지.”
“그렇다니까요.”
하하하하하하.
김정은과 재준이 서로 호탕하게 웃는 그때,
띠리리리링.
재준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푸차르?
“네, 원유가 잘 도착했나 안 했나 걱정이 돼서 전화하신 겁니까?”
-파이프라인으로 가는데 별문제야 있겠습니까?
“그럼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하신 겁니까?”
-음, 그게, 그러니까…….
웬일로 이 강단이 있는 사람이 말을 더듬어?
“선택에 대해 후회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아, 답답해. 그냥 말하세요. 러시아 대통령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에이, 원유 대금으로 로봇을 주세요.
“네?”
로봇으로 달라고?
“로봇으로 전쟁 무기 만들려고요?”
“아니요. 정확히는 캡슐이 필요합니다.”
아하, 지금 러시아 국민이 시끌시끌하니까 잠재우려고?
사회주의는 이런 이유로 캡슐이 필요하구나.
그럼, 중국도 찔러 봐야겠는데.
“원유 대금으로 로봇과 캡슐을 주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지금 러시아는 돈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러시아를 너무 하찮게 보는 거 아닙니까?
“아닌가요?”
푸차르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 제369화 이제 너희들 석유 못 팔아먹어(3) > 끝
ⓒ 번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