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4화 왜 자꾸 일하는데? 쉬라니까(11)
AAG 빌딩 66층.
“보스, 나노봇이 인간의 뇌를 지배하게 되는 겁니까?”
윌켄의 말에 재준이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그저 데이터만 수집할 거예요. 지배하다뇨. 무섭게.”
이때, 퀴니코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언제든 지배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재준이 고개를 슬쩍 퀴니코 쪽으로 향했는데 블록도 같은 눈매를 하고 있었다.
저거 물들었네. 물들었어.
“지배는 내가 명령을 내리는 거고 우린 사람들이 스스로 답을 찾는 걸 도와주는 거라니까.”
“사람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답을 찾지 않나요?”
경험?
재준은 그동안 진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인간은 경험이 쌓여서 진화했으며 그 경험이 지식이 되었다고. 그래서 경험을 쌓으려고 남의 경험이 담긴 책도 읽고 뉴스도 챙겨봤어. 한때는 그게 힘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쏟아지는 정보 때문에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경험만으로 대처하기는 힘들어.”
“경험만으로 처리하는 게 어렵다고요?”
“이제 어려워진 거지.”
“그전엔 가능했는데 지금은 어려워졌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세상이 변한 겁니까? 난 모르겠는데.”
피식.
신뢰는 달라질 수 없다고 믿으니까 그렇지.
“자, 그럼 들어 봐. 내가 1,000조 달러 투자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어. 아주 큰 돈이지. 그래서 난 빌딩 옥상에 올라 밤하늘의 별자리 움직임으로 미래를 확신했어. 그리고 내가 투자를 한다면 넌 어떻게 할래?”
“1,000억도 아니고 1,000조 달러요?”
“그래 1,000조 달러.”
“미쳤어요. 그런 일을 별자리를 보고 투자하게요?”
“예전 고대 바빌론 사람들은 별자리를 보고 전쟁을 결정했어. 죽느냐 마느냐 하는 일을.”
“그건 그때잖아요.”
그렇지, 그때는 그랬지.
“그럼, 성경을 읽고 투자하는 건 어때?”
“아니 왜 자꾸 이상한 걸 보고 투자를 해요. 기업 정보를 봐야죠.”
“그렇지, 좋아. 1,000조 달러를 애널리스트가 작성한 기업 정보를 보고 투자하라는 거지? 1,000조 달러를.”
“네?”
“왜 기업 정보를 보고 투자하라며?”
“아니, 생각해 보니 그것도 좀 그러네요. 1,000조 달러면 좀 더 신중하게…….”
“신중하게 뭐? 믿을 게 없잖아.”
“믿을 게……. 없나?”
“그럼, ‘블랙’이 투자하라고 하면.”
어? ‘블랙’이라면…….
“하하, 가능하겠네요.”
“거봐, 과거의 돈의 크기와 현재의 돈의 크기가 차이가 나잖아. 그만큼 신뢰의 크기도 달라졌지. 이제 신뢰하려면 경험보다는 정보를 봐야 하는 거야. 인간의 경험은 의미가 없어졌어.”
“그런가요?”
“너무 돈의 크기가 커서 감이 잘 안 오지? 그럼 결혼 정도로 해볼까? 넌 결혼하려고 별자리에게 물어볼 거야?”
“여전히 별자리는 아니네요.”
“그럼, 뭐, 성경이나 불경, 코란을 보고 결정할 거야?”
“그걸 왜 거기다 물어요?”
“그럼 신부님이나 목사님, 아니면 스님은 어때?”
“그 사람들이 제 결혼 상대를 모르는데 묻는 게 이상하네요.”
“그럼, 네 친구나 아니면 아주 똑똑한 교수님이나 공학자는 어때?”
음.
“역시 이번에도 ‘블랙’이 제일 나은 선택이네요.”
“이제 세상이 그렇다니까. 생각이 복잡해졌다고 해야겠지. 처음엔 자연을 숭배하다 신을 만들고, 신을 만든 인간 자신을 믿다가 이제 다음으로 나아가는 시기가 온 거야.”
“그래서 인공지능을 믿으라고요?”
“정확히는 데이터지. 사물과 인간에게 수집되고 처리된 데이터. 너, 가끔 아침에 뭘 입을지 점심을 뭘 먹을지 ‘카리브’에게 물어보잖아.”
“그렇죠. 생각하기 귀찮을 때는요.”
“근데 아예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카리브’가 알아서 조언하라고 해 봐. 이걸 드세요. 이걸 입으세요. 몇 시에 출발하세요. 이런 자잘한 일 모두. 엄청 편해져.”
“편해진다고요?”
“그렇다니까. 저기 뉴욕항을 바라보면서 오늘 날씨는 흐리니까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해봐. 당장 생각이 안 나고 고민하게 되잖아. 이런 감정 낭비가 얼마나 피곤한데. 차라리 ‘블랙’, 저녁은 뭘 먹을까? 하면. 재준, 오늘 날씨는 흐리니까, 뜨거운 국물이 일품인 소고기 샤브샤브에 2011년산 로마네 콩티를 곁들이세요. 음, 좋은 추천이야. 이게 낫지 않아?”
좀, 아니, 많이 편한데.
“음……. 그러네요.”
“그러니까, 이제 권한을 데이터에게 넘겨야 한다는 거야.”
“그렇군요.”
그만.
윌켄이 퀴니코에게 쓸데없는 질문은 그만하라고 손짓을 했다.
당장 급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보스, 지금 미국과 대치 중인 니카라과는 어떻게, 나서실 겁니까?”
“아니요. 지금 누가 해결하러 가는 것 같은데. 우린 그 후에 나서야죠.”
윌켄은 주변을 둘러봤다.
퀴니코와 블록은 여기 있고, 설마, 베네수엘라에 있던 워서스틴과 페렐라를 보내려는 건가?
“워서스틴과 페렐라 가지고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당연히 안 되죠. 총도 못 쏘는 친구들을 거기 왜 보내요.”
“그럼 누구요?”
“있어요. 다이로라고 쌈 좀 하는 친구.”
“콜롬비아 갱단, 다이로요?”
“네.”
“아니 그 친구가 니카라과는 왜 가요?”
“그야 뻔하죠. 자신이 저지른 행적을 지우려고 가는 거예요. 그 친구야말로 데이터가 지배하는 시대에서 감정에 휘둘려 사는 몇 안 되는 인간이잖아요.”
다이로의 행적은 ‘블랙’이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 머리에 들어있는 칩이 있는 한.
하지만 역시 인간의 감정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
“다이로, 여깁니다.”
마나과 갱단 일행이 다이로를 보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다들 잘 지냈어?”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알고 있잖아요. 저 해안의 미국 함대. 저게 버티고 있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참.”
갱단 한 명이 다이로에게 다가왔다.
“정말 미군 함대를 돌아가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니까. 내가 하는 일에 협조나 잘하라고.”
“갱단을 배신하는 일입니다.”
“죽어도 네놈들 이름은 불지 않아. 내가 잡힐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란 놈은 잡히느니 차라리 머리에 총알을 박고 죽을 거야.”
“알겠습니다. 부탁하신 정보는 여기 있습니다.”
갱단이 다이로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건네는 손이 다소 떨렸지만, 뒤로 물리지는 않았다.
다이로가 쪽지를 받아 펼치자, 엉성한 지도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났네.
그렇다면 이미 시작됐다 이거지.
고개를 끄덕인 다이로는 쪽지를 건네주며,
삼켜.
갱단은 알겠다는 듯 쪽지를 받아 입안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이제 나 혼자 갈 테니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이나 해.”
다이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도를 따라 걸어갔다.
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스위치를 만지작거리며.
난 뭐든지 할 수 있다.
얼마를 걸었을까,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앞에 있는 3층 건물을 바라보았다.
여기라 이거지.
3층 창가 밑에 트럭이 보였다.
준비는 잘해 놨네.
뚜벅뚜벅.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며 날카롭게 버려진 신경을 곤두세웠다.
1층과 2층엔 갱단의 일원들이 탁자에 앉아 카드를 하든가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3층에 다다르자 다이로의 발이 멈췄다.
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놈이 있어야 한다.
속닥속닥.
희미하게 들린다.
놈의 목소리가.
더욱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미국 함대에 이 정보를 전달하란 말이죠.”
“그래, 니카라과는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는 증거야. 미국은 니카라과가 아니라 콜롬비아로 가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제가……”
놈의 목소리가 맞다.
콜롬비아 장교이며 컨테이너 선박에 일어난 일을 아는 놈이 갱단과 미국에 전달할 자료를 건네주고 있었다.
이거나 먹어.
벌컥.
휙.
떼구르르르르.
뭐야?
수류탄?
쾅!
폭발음과 함께 안에 있던 인간들이 피떡이 되어 나뒹굴었다.
그리고 뿌연 연기 속으로 다이로가 다가가서 살아 꿈틀대는 놈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탕, 탕, 탕, 탕, 탕.
무슨 일이야?
3층이다.
다다다다닥.
밖에서 1층과 2층에 있던 갱단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놈들이 몰려들기 전에.
두리번거리며 장교를 찾았다.
저기 있다.
이미 죽었다.
하지만.
탕.
놈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확인 사살했다.
그리고 창가를 향해 달렸다.
빠직.
나무로 된 창살을 거세게 몸으로 들이받고 아래로 떨어졌다.
쾅.
윽.
미리 준비된 트럭 위로 떨어졌지만, 온몸이 욱신거렸다.
움직여야 한다.
다이로는 재빠르게 트럭 지붕에서 내려와 운전석 문을 열었다.
자리에 앉아 미리 꽂혀 있는 키를 돌렸다.
부릉.
시동이 걸리고 차가 출발했다.
저놈 잡아.
쫓아가란 말이야.
중무장한 갱단들이 빌딩에서 쏟아져 나와 여러 대의 차에 올라타고 다이로의 트럭을 쫓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다다.
탕탕탕탕탕탕.
놈들의 차에서 연사된 총알이 다이로의 트럭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바퀴에 안 맞은 게 다행이었다.
부아아아아앙.
다이로는 최대한 속도를 내어 달렸다.
도로 주변에 있던 상인들의 가판을 들이받고 앞으로 몰았다.
갑자기 달려오는 차량을 사람들이 몸을 날리며 피했다.
핑핑핑핑핑.
빠각.
빗발치는 총알 중 하나가 운전석 옆으로 날아들어 사이드 미러를 날렸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더.
항구까지만 가면 된다.
하지만 다이로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핑,
펑,
총알이 트럭의 바퀴를 펑크냈다.
차가 기우뚱 찌그덕거리며 방향을 잃고 회전했다.
끼익.
차에선 내린 다이로가 가장 먼저 달려오는 차의 운전자를 향해,
탕탕탕탕.
총알을 난사하고 주택가를 향해 달렸다.
쾅.
뒤쪽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아마 운전자가 즉사하면서 차가 무언가를 들이받은 듯했다.
다다다다다닥.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데.
부아아아아앙.
뒤에서 오토바이 엔진음이 들렸다.
빌어먹을.
저건 생각 못 했는데.
총을 꺼내 오토바이에 탄 놈을 향해 자세를 잡으려는데.
“대장, 뒤에 타.”
마누엘이다.
킥킥킥.
의심스러운 새끼가 맞다니까.
속도를 늦춘 오토바이 뒤로 뛰어들어 올라타자 마누엘이 속도를 내었다.
“어디로 가요.”
“항구. 미군 함대가 있는 곳으로.”
“거긴 왜 가요?”
“그럼, 여기서 계속 쫓길래?”
미친.
부아아아앙.
오토바이 뒤로 차량 여러 대가 붙었다.
죽여!
탕탕탕탕.
마누엘이 좌우로 오토바이를 흔들자,
파파파파파팍.
바닥에 총알이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부아아아아앙.
주택가를 벗어나자 항구가 보였다.
뒤쫓던 차들이 일제히 다이로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탕탕탕탕탕.
퍽.
털썩.
마누엘이 맞았다.
마누엘!
다이로는 핸들을 잡아 옆으로 돌려 오토바이를 바닥으로 미끄러뜨렸다.
꽈당,
끼이이이익.
바닥으로 미끄러지자 오토바이가 회전하며 다이로와 마누엘을 내팽개쳤다.
“마누엘!”
다이로가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한 마누엘을 끌어안았다.
이 개새끼들이 진짜.
다이로가 허리춤에서 총을 꺼냈지만.
이런,
총알이 다 떨어졌다.
“그럼 다 같이 죽는 거지.”
고개를 좌우로 까닥이며 품 안에 하나 남아 있던 수류탄을 꺼냈다.
끼이이이익.
뒤따라 오던 갱단의 차들이 일제히 섰다.
차 문이 급하게 열리고 무장을 한 갱단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다이로는 한 손에 수류탄을 높이 들어 보였다.
“죽기 전에 거기까지는 던질 수 있어. 딱 한 놈만 같이 가자.”
갱단이 총구를 겨누고 다이로를 포위한 사이.
두타타타타타타.
다이로 뒤로 아파치 헬기가 세 대가 등장했다.
“우린 미합중국 DEA다. 총을 버려라. 다시 한번 말한다. 총을 버려라.”
다이로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헬기를 향해 돌아섰다.
“나 다이로다. 자수한다. 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