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화 왜 자꾸 일하는데? 쉬라니까(3)
파나마.
파나마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상선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상선의 경우 꼭 소유주의 국가에 등록할 필요가 없다.
어디서, 누가 배를 사용하건 상관없이 세금이 싼 나라에 등록해 두기 때문에 서류상의 선적을 파나마로 등록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파나마에 약 8천여 척의 상선이 등록되어 있다.
그래서 동쪽으로 콜롬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마약과 전혀 상관없이 잘 사는 나라가 파나마다.
서쪽으로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멕시코까지 쭉 마약으로 먹고 사는 나라들이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파나마에 8천여 척의 배가 드나드니 배에서 뭔 짓을 해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파나마 해역에 컨테이너 선박이 컨테이너 한 개를 싣고 카리브해로 출항했다.
갑판에 하얀 코트를 휘날리며 남자 하나가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누엘, 시가 하나만 줘.”
“네.”
치익.
시가에 불이 붙고 남자는 쭉 빨아들인 다음,
후.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가 연기를 내뿜었다.
시가 한 대를 다 피울 무렵 배는 망망대해에 떠 있었다.
“컨테이너 열어.”
남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네.”
컨테이너 열어!
마누엘의 명령에 무장한 단원들이 컨테이너 문을 일제히 열었다.
우루루.
벌거벗겨진 십여 명의 남자들이 컨테이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가 빠르게 기어서 남자에게 다가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다이로, 살려 줘. 내가 뭐든 할게.”
치익.
아아아아악.
다이로는 다 핀 시가를 자신을 붙잡은 남자의 손등에 대고 지졌다.
“페르난도, 내가 경고했잖아. 임재준에 관해서는 입을 닫으라고. 왜 말을 하면 들어 처먹질 않는 거지? 왜 나를 자꾸 나쁜 사람으로 만드냔 말이야? 멍청하기는.”
“잘못했어. 제발 살려줘.”
다이로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마누엘이 페르난도의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
“아악, 이거 놔! 다이로. 제발, 제발 살려 줘. 제발!”
페르난도가 끌려가자 다른 남자 하나가 다이로에게 기어왔다.
“다이로, 난 콜롬비아 사람도 아니잖아. 국제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내가 입을 닫으면 아무도 몰라.”
“뭐? 국제적인 문제?”
큭큭큭.
다이로가 너무 재밌다는 듯 몸까지 흔들며 웃었다.
“디에고, 디에고. 왜 그래? 네가 없어야 니카라과가 잘 돌아가는 거야. 네가 없어야. 큭큭큭. 난 지금 네 나라에 애국을 하는 거라니까. 큭큭큭.”
디에고가 벌떡 일어났다.
“다이로!”
뻑.
마누엘의 개머리판이 디에고의 옆구리를 가격하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악!
디에고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갑판으로 쓰러지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다이로가 디에고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지그시 밟았다.
으으으으으. 살려 줘.
“디에고, 그만해. 안 되는 거 알면서 왜 자꾸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거야?”
그, 그, 그만. 흑흑흑.
다이로는 디에고의 머리에서 발을 떼고 벌거벗은 무리로 향했다.
터벅, 터벅, 터벅.
뚝.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저기 쓰러져 개 거품을 물고 있는 페르난도, 재무공신부 장관 알베르토, 국방부 장관 카를로스, 나머지도 물론 장관들과 그 조력자들.
다이로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마누엘이 상자 한 개를 가지고 다이로에게 다가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딸깍.
상자가 열리자 그 안에는 한 자루의 총과 한 알의 총알이 놓여 있었다.
“자, 여러분. 모두들 건투를 빕니다.”
단지 그 말만 남기고 다이로는 돌아섰다.
선박은 어느덧 카리브해 항로를 벗어나 어떤 선박도 지나가지 않는 외딴 바다에 도달하더니 서서히 엔진이 멈췄다.
그리고 뒤따라온 대형 요트로 컨테이너 선박에 있던 사람들이 옮겨 타기 시작했다.
“우리보고 어쩌라고?”
카를로스가 다이로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다이로는 마치 소리를 못 들은 사람처럼 요트로 옮겨탔다.
모든 사람의 이동이 끝나자 요트는 지체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불현듯 디에고가 조타실을 향해 달렸다.
벌컥.
조타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급하게 계기판을 살폈다.
이런 빌어먹을.
연료가 바닥이다.
이 배는 더 움직일 수 없다.
뒤따라온 사람들이 캐비닛을 열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여기서 굶어 죽으라는 거야.”
“아니면…….”
뒷말을 잇지 못했다.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사람은 먹지 않아. 벌써부터 그런 거지 같은 생각은 하지 마.”
아무도 그 말에 꼬리를 달지 못했다.
또 한 남자가 조타실로 뛰어 들어왔다.
“저기, 저기를 봐.”
그 남자가 가리키는 곳에는 요트 한 척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개자식들.”
“우리가 다 죽는 걸 확인하려는 거야.”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갑판 위에 놓인 한 자루의 총에는 한 발의 총알이 장전되어 있었다.
한 명은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
이때 갑판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다이로, 이 개새끼야.
***
진코퍼레이션.
[콜롬비아 구스타보 대통령이 대대적인 내각을 단행했습니다. 충격적이게도 모든 장관의 자리를 없애고 단 하나의 인공지능을 내정했습니다. 아이티의 경우를 모방했다고 하는데 세계 각국에서는 우려를 표방하는 발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콜롬비아 국민들은 찬성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미국 연준이 단기간의 양적 완화로 채권 금리를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후 양적 긴축으로 전환하여 인플레이션을 잡는다는 입장입니다. 세계 금융계는 찬반으로 나뉘어 이번 연준 조치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미국 내 ‘사이진’의 열풍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벌써 ‘카리브’의 다운로드 수가 2억을 넘어서고 있고 생체 칩을 이식하기 위해 콜롬비아로 향하는 여행객이 하루 10만 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미국 내 모든 항공사들이 콜롬비아 항공편을 증설하고 있지만, 예약을 해도 여전히 몇 달씩 기다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진은 뉴스를 보며 머리를 주먹으로 통통 두드렸다.
요즘 들어서 머리가 자주 어지럽다.
어제 뱅가모에서 새로운 변형 프라이온 배양에 성공했다고 알려 왔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혹시라도 머릿속의 뉴런을 줄이지 못할 걸 대비해 차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진.”
“어, 콰미.”
“여기, 릴로랑 같이 왔어.”
릴로, 멕시코 출신으로 생명화학공학을 맡고 있다.
그리고 투덜거리는 예브게니야와 항상 웃고 있는 주디가 뒤따라 들어왔다.
콰미가 진을 보며 릴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릴로가 우리가 원하는 나노 봇을 거의 완성 단계까지 끌어 올렸어.”
“그래?”
“정말? 벌써?”
예브게니야는 신기한 동물을 보는 표정으로 릴로를 바라봤다.
아니, 얘네들은 말하면 뚝딱 만들어 내네.
무슨 나노 봇이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
릴로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나 혼자 한 게 아냐. 생명과학을 담당하는 애들과 전자전산, 기계공학, 화학, 그리고 여기 신소재를 담당하는 콰미랑 같이 한 거야. 200명은 달라붙어서 겨우 해낸 거야.”
아, 200명.
예브게니야는 그제야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궁금한 게 떠올랐다.
“진, 그럼 이제 뇌 속에 나노 봇이 돌아다니는 거야?”
“그렇지, 정확히는 핏속으로.”
“아, 핏속. 핏속을 돌아다니면서 병도 치료하겠네.”
“그렇지. 박테리아, 바이러스, 암세포 같은 병원체들을 없애주고 자가 면역 반응처럼 생물적 면역계가 지닌 단점들을 없애 주겠지.”
“멍청하게 일을 못 하는 나노 봇도 있지 않아?”
“새로운 지시를 내릴 수 있어.”
“그래? 무슨 이메일이라도 주고받는 거야?”
“이메일도 가능하지.”
“정말?”
“그럼, 그리고 서로 교신도 할 수 있고 인터넷과 통신을 할 수도 있어. 파킨슨병 환자들에게 이식된 나노 봇들은 매번 신규 소프트웨어를 다운 받잖아.”
소프트웨어?
예브니게야의 눈빛에 불길함이 깃들었다.
“혹시 바이러스에 걸릴 수도 있겠네. 컴퓨터야 바이러스에 걸리면 치료 프로그램을 돌리면 되지만 핏속에 있는 나노 봇이 바이러스에 걸리면 엉뚱한 혈구들을 마구 죽이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만, 방화벽은 나름 튼튼해. 지금도 병원 응급실 관리나 핵발전소 통제, 비행기 이착륙, 크루즈 미사일 관리처럼 특수 임무용 소프트웨어에는 바이러스가 침투하기 힘들어. 특히 여기 투마로우는 안전하지.”
“그래도 불안한데.”
“VPN을 사용하면 더 안전한 방화벽을 구축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VPN은 가상 사설 통신망을 뜻한다.
VPN은 공중 네트워크를 통해 한 회사나 몇몇 단체가 내용을 바깥사람에게 드러내지 않고 통신할 목적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해커들은 그리 만만한 놈들이 아닌데.”
“한국에는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느냐는 속담이 있지. 해커들이 진화하는 만큼 우리도 더 빠르게 진화하면 돼. 그리고 나노 봇의 혜택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데.”
“그런가?”
“그럼. 나노 봇은 병원체를 이기고, 독소를 제거하고, DMA 오류를 바로잡고, 노화를 역전시킬 수도 있잖아.”
“노화를 역전하다니?”
“나노 봇이 들어가서 RNA 간섭으로 파괴적 유전자를 억제하고, 유전자 치료를 통해 유전 암호를 교체할 수도 있고, 치료용 복제를 통해 세포와 조직을 재생하거나, 지능형 약물들로 대사 과정을 재편하면 되지.”
멍.
예브니게야는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나 분자생물학 담당하는 거 맞나?
뭐가 이렇게 생소한 이야기들뿐이지?
분명 분자 수순에서 행해지는 일인데.
“노화를 멈추는 건 시작일 뿐이야. 우리가 사고하는 과정에 나노 봇이 개입하면 나노 봇과 뉴런이 소통을 할 수도 있어.”
“뭐야 그건, 그럼 이 느려 터진 뇌가 빨라진다는 거잖아.”
“그렇게만 생각하면 실망인데.”
“왜? 그럼 뭐가 또 있어?”
“뇌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에 세포라는 생물학적 요소와 나노 봇이라는 비생물학적 요소가 공존하면 로봇과 인간으로 번갈아 전환할 수도 있어.”
뭐?
이 말에 진 빼고는 모두 놀랐다.
이건 나도 몰랐다는 듯.
“그, 그, 그럼, 힘이 세졌다가 약해졌다가 할 수 있다는 말이지?”
후후.
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 그러니까, 고난도의 수학 문제를 컴퓨터로 변해서 후루룩 풀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 기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거? 맞어?”
“아직 놀라기엔 이른데.”
뭐?
“앞으로 얼마나 빠른 처리 속도의 컴퓨터가 나오냐에 달렸지만, 가상현실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알고리즘을 만들 거야. 굳이 물리적 상태를 고집할 이유가 없게.”
“그건 전에도 말했잖아. 가상현실.”
“내 말은 가상현실이라는 말조차 필요 없는 걸 말하는 거야.”
모두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야?
“우리 몸을 봐. 우리 몸도 시시각각 바뀌고 있잖아. 똑같은 나는 존재하지 않아. 오로지 변하지 않는 건 정보의 패턴일 뿐이야.”
“정보의 패턴이라면 기억, 기술, 경험, 성격을 조정하는 걸 말하는 거지?”
“응, 그렇다면 지금의 삶에 불만이 있다면 또 다른 삶을 살면 되잖아? 새로운 세상에서.”
예브니게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이 망상은?
하지만 그냥 허황된 생각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진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