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1화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13)
-농림부 장관? 페르난도?
“여기 있는데 한마디 하시죠.”
-페르난도 거기 있나? 있다면 내 말을 잘 들어. 임재준이 뭐라고 하든 그냥 입 닫아. 당신 따위가 상대할 분이 아니야. 알았어?
분?
다이로 민망하게 왜 이래?
재준은 머쓱해서 양쪽 입꼬리를 내렸다.
뭐, 어쨌든.
“페르난도 장관님. 다이로와 친분이 아주 두터우시네요. 자, 이제 우린 같은 범죄자가 된 건가요? 또 확인하실 분.”
벌떡.
내무부 장관이 눈을 부라리며 일어섰다.
“더는 못 봐주겠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급발진한 장관을 보며 놀랄 만도 한데 대통령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네, 그러세요.”
흠, 흠.
그럼 우리도.
기회는 이때다 싶은 장관들이 내무부 장관의 뒤를 따라 전부 일어서서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장관들이 다 나가자.
큭큭큭큭큭.
대통령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억누르며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
결국,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재준은 또 머쓱했다.
이럴 분이 아닌데 엄청 당황스럽네.
“당신 말대로 전부, 전부 다 한통속이었군요.”
“에이, 대통령님도 알고 계셨잖아요.”
“알고 있었죠. 알고는 있었는데…….”
후.
대통령의 긴 한숨 후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저들은 저의 정치 인생에 있어 고난을 함께 겪어 온 동지들입니다. 알고 계시죠? 제가 콜롬비아의 첫 좌파 대통령이라 거.”
“알고 있어요.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것도.”
“맞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들 고생이 많았습니다.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고 부정선거에 당하고 밤새 눈물 섞인 술잔을 기울인 적도 많았습니다. 동지들이 카르텔에게 암살당했을 때는 이 짓을 때려치우자고 울부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거밖에 안 되다니…….”
대통령은 허탈한 듯 말끝을 흐렸다.
“내각을 구성한 지 1년이 안 됐는데……. 어떻게 동지를 죽인 카르텔의 돈을 받았단 말입니까?”
그동안 오죽 돈에 굶주렸으면 그랬겠어요.
“어떻게 단 한 사람도 국민을 생각한 사람이 없다니…….”
“대통령님 있잖습니까. 그거면 충분한 거예요.”
큭큭큭큭.
대통령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새로운 사람을 뽑아도 마찬가지겠죠?”
“인간이니까요. 만져보지도 못하는 돈을 들이밀면 어쩔 수 없는 게 인간이니까요. 남들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쩔쩔매는 꼴을 보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인간이니까요. 인간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재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질 수 없는 위치에서는 가진 자를 향해 거침없이 항의했지만 정작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자 가졌던 자들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했다.
마치 과거의 고난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정치인 당사자는 정직하게 정치를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정치인 주변도 모두 정직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리고 정치인을 등에 업으려는 사업가들도 있고요. 결코, 정치인은 부정부패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겠죠. 저도 많이 당한 일이라 잘 압니다.”
구스타보 대통령은 당선이 되고 마약상으로부터 과일 바구니가 집으로 배달되어왔다.
대통령 가족은 너무 기뻐하며 선물을 받으려 했지만, 대통령은 모든 선물에 대해 수령을 거부하고 되돌려 보냈다.
선물? 받았으면 큰일이 터졌을 것이다.
과일 바구니 밑에 고액의 지폐가 있는 것부터 커다란 과일 안에 금괴를 채워 보낸 것도 있었을 테니까.
처음 이 금품은 청탁을 위한 게 아니다.
협박용으로 사용된다.
선물을 개봉하는 순간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대가성 금품을 받았다고 언론에 대서특필로 실릴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주는 돈을 받으며 조용히 뒤를 봐줄 것인지.
제안을 거절한다면 언론에 실리는 건 물론이요, 야당의 집중포화도 맞게 된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제안을 수락하지만, 그 이후 지속적인 거액이 자신의 집으로 배달된다.
돈을 받는 데 익숙해지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한다.
대통령은 자신이 야당으로 있을 때 여당의 인간들이 어떻게 부패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동지들도 그대로 당했을 것이고.
대통령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이 아저씨 왜 이래? 정신 차려!
재준이 대통령을 향해 강한 톤으로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부정부패를 저지른 자들을 전부 감옥으로 보내야겠지요?”
“아니요. 그런 수고스러움을 왜 하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어차피 이제 마약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카르텔은 없는데.”
“관료들에게 들어가는 자금원이 전부 사라졌다고 죄가 덮어지는 건 아닙니다.”
“네. 알아요. 하지만 저들이 이대로 물러나진 않을 거예요. 스스로 길을 찾으려고 하겠죠.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게 파멸의 길인 줄도 모르고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 거니까.
“아니, 자신들이 직접 나선단 말입니까? 정부 관리가요?”
“이미 찾았을지도 모르죠. 엔비가도가 사라진 순간부터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 놓고 있었을 테니까요.”
“이 사람들을 당장…….”
재준이 손을 들어 대통령을 제지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통령님이 나서면 저들은 일을 키울 겁니다. 대통령님을 엮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려고 할 거예요. 나서면 안 됩니다.”
“이대로 지켜만 보란 말입니까?”
“네, 일단 지켜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요?”
“내가 본격적으로 남미 전체의 미국 마약 판매 루트를 차단할 겁니다.”
“임재준 당신이 남미 전체를요?”
뭐 이렇게 놀라는 거야?
“아이티를 잊으셨어요?”
“아이티요? 설마 인공지능이요?”
“아마 대통령님이 상상하는 이상일 겁니다.”
‘블랙’이 콜롬비아 전역의 스마트폰을 장악했다.
곧 남미 전체의 스마트폰도 장악되고 실시간으로 DEA에게 이동의 경로가 전송된다.
마약이 미국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점점 희박해질 것이다.
이러면 카르텔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지.
그럴수록 수렁의 크기는 점점 커지기만 할 뿐이지만.
“마약 루트가 차단되면 에레라가 가만히 있을까요?”
“뭐, 처음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겠지만 결국은 미국으로 마약 밀매하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미국이 막히면 콜롬비아 마약은 브라질이나 다른 국가로 이동할 겁니다.”
“그렇겠죠. 그렇지만 다른 나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예요. 미국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걸 확인만 시켜주는 꼴이죠. 그리고 여기서 ‘드럭리걸 존’은 점점 더 커질 거라는 거예요.”
“네?”
“미국에서 마약을 구할 수 없다면 콜롬비아로 몰릴 수밖에 없잖아요. 저들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건 그때 대통령님이 하실 일입니다.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하세요.”
“어떻게 준비를 한단 말입니까?”
아니. 내가 일일이 다 알려줘야 해?
“이제 미국과 ‘드럭리걸 존’을 놓고 한판 붙으셔야죠. 아주 격렬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미국 중상류층에는 마약 없이는 살 수 없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 것 같습니까?”
“그야 많겠죠.”
“그들이 본격적으로 콜롬비아로 몰려들면 미국 정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콜롬비아로 엄청난 돈이 빠져나갈 테니까요. 아마 미국이 ‘드럭리걸 존’을 폐지하라고 압박을 할 수도 있고 뒤에서 몰래 콜롬비아 카르텔이 다시 살아나게 루트를 제공할 수도 있어요. 그때 자칫 느슨하게 대응하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아.
대통령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 정도가 아니다.
현실이 될 가능성은 100%다.
“미국 정부와 손을 잡아야 하는군요.”
“그렇죠. ‘드럭리걸 존’을 살리고 카르텔의 숨통을 더욱 조여야 합니다.”
“카르텔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 칼은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이로.
다이로도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
페르난도 농림부 장관은 대통령궁을 나오자마자 자신의 리무진에 올라타 스마트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니카라과 국방부 장관.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왜 이렇게 안 받는 거야?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딸깍.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요.
“디에고, 아무래도 앞으로 당분간 사업을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예 못 하는 게 아니라요?
“네?”
-메데인 농장이 불타서 없어졌단 소리는 들었습니다.
“다른 농장을…….”
페르난도의 말이 잘렸다.
-됐어요. 이미 클란 델 골포에서 연락도 왔습니다.
“디에고, 지금 클란 델 골포는 위험합니다.”
-그건 그쪽이고 우린 상관없습니다.
“디에고…….”
툭.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감히 내 전화를.
니카라과 장관 주제에 먹고 살게 해줬더니 자기 주제를 모르고.
근데 에레라는 왜 니카라과에 손을 내민 거지?
독자적인 판매 라인을 구축하고 있는 클란 델 골포가 수입이 적은 니카라과 루트를 이용하는 게 영 이상했다.
설마 우리를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페르난도는 알베르토 재무공신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페르난도, 어디야?
“집으로 가고 있지. 근데 디에고가 에레라와 손잡았어. 알고 있었어?”
-뭐라고?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뭐가 어떻게 돼? 디에고한테서 오는 돈도 끊긴 거지. 이거 우리도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은데.”
-카를로스를 불러들일게.
“내가 연락할 테니까. 일단 자네 집에서 보자고.”
-알았어.
페르난도는 카를로스 국방부 장관과 대책을 세우러 알베르토의 집으로 향했다.
자신의 스마트폰의 속 알고리즘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
클란 델 골포.
우라베는 믿을 만한 자신의 심복 일곱을 자신의 거처로 불렀다.
“너희들 나 믿지.”
갑자기 호출해서 왔더니 다짜고짜 믿음을 테스트받는 심복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당연하죠.”
“우리가 지금 아주 곤란에 처했어.”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알고 있습니다.”
“이게 다 미국으로 마약이 못 들어가서 생기는 문제거든. 후안과 연락도 끊기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어.”
DEA에 심어 놓은 스파이 후안이 얼마 전 사라졌다.
모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희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전부 쉬쉬하고 있지만, 창고만 봐도 상황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도무지 마약이 쌓이기만 할 뿐 나갈 생각을 안 했다.
“미국에서 마약 가격이 폭등하고 있는데 물건이 없다는 연락만 오고 있어.”
“다른 나라 물건도 못 들어갑니까?”
“그런 것 같아. 판매상들이 난리야. 어떻게 안 되겠냐고. 하지만 우리도 해볼 건 다 해봤는데 도무지 미국 땅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그래서 저희가 뭘 해야 하는 겁니까?”
뭐야? 이 불편한 표정은.
“너희가 마약을 가지고 미국에 들어가라는 소린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