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9화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11)
진이 ‘블랙’에게 명령한 통제란 인간을 통제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사물을 통제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은 왜 인간이 풍요롭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걸까?
“그건 좋은 기억이 필요해서야.”
예브게니야의 ‘왜 인간에게 집착하냐’는 질문에 대한 진의 대답이었다.
“굳이 왜 인간에게 좋은 기억이 필요한데?”
“가상 현실을 시작하는 데 안 좋은 기억은 도움이 되지 않거든. 새로운 세상을 오염시킬 수 있어.”
“가상 현실? 게임을 만들 거야?”
“음, 게임은 아냐, 영원한 삶이지.”
“영원한 삶? 죽지 않는 인간?”
“지금도 죽음의 정의가 모호하잖아.”
“풋, 그렇지. 임모탈로 인해 죽음을 뒤로 미룰 수 있는 시대니까. 앞으로 인간의 기억을 컴퓨터에 업로드하거나 아니면 안드로이드처럼 인간 로봇으로 재탄생할 수도 있고.”
“맞아. 그리고 기억을 업로드 하는 시대가 얼마 안 남았어.”
“진짜?”
“뜻하지 않은 인류 멸망만 막으면 돼.”
“멸망?”
별걸 다 걱정하네.
심각한 걸 질색하는 예브게니야가 대충 화제를 돌렸다.
“하하하. 난 멸망 전에 기억을 컴퓨터에 보관하든가 아니면 기억을 가지고 가상 현실에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안드로이드로 살아가는 건 끔찍해.”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가진 안드로이드도 있어.”
“하하, 알아. 그러나 늙지도 않는 이상한 생명체는 사양이야.”
“하긴 늙지 않는 외모는 인간미가 없지.”
진이 예브게니야의 말을 잠시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우린 이미 이상한 생명체잖아.
예브게니야는 웃는 진을 보며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근데, 진,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천천히 해도 되잖아. 우린 이제 7살인데.”
“내 머리로도 계산이 안 되는 인류 멸종 시나리오가 있어서.”
“그런 게 있어? 뭔데?”
“생태학적 대재앙으로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고 소행성과 충돌해서 충격으로 멸종할 수도 있잖아. 아니면 지능이 뛰어난 유인원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고.”
예브게니야의 눈이 껌뻑거렸다.
진은 정말 걱정이 많구나.
아니, 누가 저런 걸 걱정해?
근데 유인원의 습격이라니.
어? 혹시 우리 몰래 카이사르를 만들기라도 한 건가?
카이사르는 영화 혹성탈출에 나오는 지능이 높은 고릴라다.
인간을 제외한 유인원들을 규합해 인간에 반기를 들고 결국 인간을 유인원의 노예로 만들었다.
아니,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그래. 무슨 뜻인지는 아, 알겠어.”
예브게니야는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진은 진지했다.
“멸망 전에 호모 섬싱엘시우스(homo somethingelsius)를 만들어야 해.”
somethingelsius. 어디에든 존재하는 인류.
인간의 기억이 데이터화 되어 전산망을 통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인류를 말한다.
“아, 그거, 그래. 알아, 당연히 알지.”
“그래서 지금 인간의 기억을 데이터로 변환해서 컴퓨터에 업그레이드하는 알고리즘을 주디와 같이 개발 중이야.”
“그래,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너도 같이해야지.”
“그래, 알았……. 뭐? 내가 왜?”
그 어려운 일은 본인이나 하세요.
“방금 나랑 같이 알고리즘을 만들면서 못 느꼈어?”
“그거야, 알고리즘에 분자 수준의 생명 현상이 필요하다고 해서 같이 한 거잖아.”
“그러니까 같이 만들면서 못 느꼈냐고. 이건 생물학자가 있어야 해. 처음에 유기체가 기계적 알고리즘과 같은 원리라고 말한 건 생물학자야.”
“어? 정말?”
“그래, 가만히 있는 컴퓨터 공학자와 뇌과학자들을 꼬드겨서 인공지능 분야에 뛰어들게 만든 게 너희 생물학자라고.”
이건 맞는 이야기다.
컴퓨터 공학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생물학에서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란 결론을 내린 순간 유기물과 무기물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말이 어려운가?
유기물은 인간이고 무기물은 컴퓨터로 보면 된다.
즉 컴퓨터를 인간처럼 작동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더 나아가 기계적 사고에서 생물학적 사고로 전환되며 개인 혼자가 아닌 다수를 네트워크로 연결해서 다 함께 정보를 공유하며 협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뇌의 세포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듯이 인간 하나하나를 세포로 여기고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 이러다 삼천포로 빠진다.
돌아와서.
진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예브게니야는 울상이 되었다.
“알았어, 나도 그 연구에 동참할게.”
인간의 뇌, 즉 기억을 컴퓨터에 이식하는 연구에 예브게니아도 동참했다.
***
콜롬비아.
“다이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남서쪽 산티아고 데칼리를 장악하며 마약을 밀매하던 FARC(콜롬비아 무장 혁명군)의 잔여 세력 중 하나가 다이로의 손에 괴멸되었다.
“그동안 서로 잘 지냈는데 왜? 제발 살려줘.”
세력의 수장 카노는 다이로에게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고 있었다.
다이노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총을 카노의 머리에 대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카노의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바닥에 흩어졌다.
털썩.
목 위로 형체가 사라진 육체가 힘없이 쓰러졌다.
말 더럽게 많아.
직속 수하, 마누엘이 다가왔다.
“대장, 바로 포파얀으로 향할까요?”
다이로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열었다.
아직 재준의 문자가 도착하지 않았다.
“아니, 잠시 휴식을 갖지.”
“네.”
으챠.
다이로는 카노가 앉았던 의자에 몸을 날렸다.
기분이 개운하다.
마약을 하지 않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
목을 꺾으며 상쾌한 자신의 몸을 즐기는데 카노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한심한 새끼.
돈만 밝히는 놈이 무슨 혁명군이야.
카노는 FARC의 장교 출신이었다.
한때 콜롬비아를 주름잡던 FARC.
공산주의 무장단체이자 국가 전복이 목표였다.
주로 부유한 지주, 외국 관광객, 저명한 국내외 관리들을 납치 살해로 명성을 얻었다.
1970년부터 마약 카르텔과 손을 잡고 마약에 손을 댔다.
마약에 손을 댔으니 미국의 타깃이 되어 개박살 나고 여러 조직으로 조각났다.
그 후 정부와 손을 잡아 미국의 공격은 피할 수 있었지만, 조직은 다시 뭉치지 못하고 콜롬비아에 전역에 흩어져 마약 유통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이로는 그동안 FARC를 쓸어 버리고 싶어도 정부가 뒤에 버티고 있어서 입맛만 다셨다.
그런데 정부가 재준과 손을 잡으면서 FARC를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
기회가 찾아왔다.
다이로는 FARC의 잔여 세력들을 각개격파 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갔다.
마우스 범이 있는 한 너희들은 나를 막지 못해.
재준이 알려준 시간에 도착하면 상대 세력의 본거지는 이미 쑥대밭이 된 후였다.
천천히 둘러보며 남아 있는 놈들의 머리에 구멍만 내주면 손쉽게 세력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정도 화력이면 콜롬비아가 아니라 남미 전체를 정리해도 될 것 같은데.
다이로는 사방을 죽 둘러봤다.
최소 수십 아니, 수백의 시체들.
그런데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카노를 치기 위해 움직일 때도 그렇고 그전에도 그랬다.
사람. 일반인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의례 이런 기습작전을 하면 민간이 몇이 죽거나 다쳐야 하는데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질 않았다.
누가 여기서 전투가 벌어질 예정이니 다들 피하시오.
라고 방송을 한 것도 아닐 텐데.
아니, 임재준이 미리 대피를 시켰을 수도 있지.
이때,
띠링.
문자가 도착했다.
‘포파얀, 내일 오전 6시.’
마우스 범이 포파얀을 처리한다는 시간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게 생겼네.
“마누엘, 맥주 몇 개만 가져와.”
내일 새벽에 일어나려면 일찍 자는 게 답이다.
마누엘이 차가운 맥주를 가져왔다.
“마누엘, 내일 새벽 6시에 포파얀을 친다. 알아서들 챙겨.”
“네.”
마누엘이 떠나자 다이로는 주머니에서 파란색 스위치를 꺼냈다.
내일, 포파얀만 치면 된다.
포파얀만 치면.
***
클란 델 골포.
“산티아고 데칼리를 정리했다고 합니다.”
우라베의 보고에 에레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폭주하는 걸까?
정말 콜롬비아 마약 조직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걸까?
에레라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보스.”
에레라가 우라베를 노려봤다.
보스라고 하지 말라고.
그렇게 당해놓고 아직도.
우라베가 에레라의 시선을 읽었다.
“죄송합니다.”
“뭔데?”
“다이로를 저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그럼, 뜯어말리기라도 하란 말이야?”
“중소 세력들이 뭉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메데인 쪽은 가볍게 볼 세력이 아닙니다.”
보고타에서 북서쪽 파나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도시 메데인에는 니카라과를 이용하여 마약 밀매를 하는 또 다른 FARC 잔당 세력이 존재했다.
물론 세력 크기로 따지면 클란 델 골포에 비교도 안 되지만 메데인 세력은 여차하면 니카라과 정부군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세력이다.
“그래도 안 돼. 그리고 니카라과가 그렇게 쉽게 군대를 움직일 것 같아?”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너는 참 분석은 잘하는데 상황을 바꿀 줄 몰라.”
“네?”
“우리가 크냐? 메데인이 크냐?”
“그야 우리가 훨씬 크죠.”
“그럼 다이로가 메데인을 때리면 우린 니카라과에 연락만 하면 돼. 우리가 더 많은 물건을 공급할 테니, 잠시 구경만 하라고. 어차피 돈 때문에 움직이는 놈들 아냐?”
“......”
우라베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쯧쯧.
에레라가 혀를 찼다.
“난 그게 걱정이 아냐.”
우라베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설마 저희를 치겠습니까?”
에레라가 다시 우라베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오직 머릿속에 클란 델 골포 밖에 없구나.
“다이로가 왜 우리를 쳐?”
“그럼?”
“미국 유통라인이 붕괴되고 있잖아.”
“아.”
“이번에 잠수함으로 실어 나르고 잠시 숨 좀 고르자. 미국이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겠어.”
“네.”
이때,
다다다다다닥.
다급한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설마 잠수함과 관련해서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보스.”
에휴, 이 머저리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
“보스.”
“왜?”
“자, 자, 잠수함이 격추되었습니다.”
“뭐?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잠수함이 격추되었다?
잠수함은 탐지 자체가 불가능한 사기적인 무기다.
잠수함 여럿이 모여 훈련을 하면서, 좌표를 서로 불러줘도 탐지를 못 해 충돌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날 정도다.
육지에서 탐지하는 것은 물론 비행기로도 찾지 못한다.
당연히 공기가 없는 바닷속은 아예 불가능에 가깝다.
중국 핵잠수함이 미 항공모함 전단의 대잠수함 경계망을 무시하고 한 번도 아니고 수시로 드나들며 정보를 입수하고 있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고.
이런 잠수함이 격추되었다.
콜롬비아 마약상의 자존심인 잠수함이.
이런 빌어먹을.
에레라가 등줄기가 뻐근하게 느껴졌다.
육로도 막히고 해로도, 아니 잠수로도 막혔다.
“fuck the Bitch! 마약을 만들면 뭐 해? 팔아먹을 수가 없는데.”
허공에 에레라의 넋두리가 울려 퍼졌다.
“보스, 아직 니카라과가 남았습니다.”
마약 제조는 못 하지만 운반에선 나름 명성이 자자한 나라가 니카라과다.
미국에 직접 운반이 불가능한 나라들이 찾아와 부탁할 정도로 나름 노하우도 가지고 있었다.
우라베의 말에 에레라가 인상을 콱 구겼다.
이 새끼가 정말.
“남의 밥에 숟가락 얹겠다는 거야? 다이로가 가만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