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7화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9)
자르딘 식물원.
저벅, 저벅, 저벅.
재준이 또렷한 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왔다.
“왔어?”
다이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친근한 존재를 반기듯 활짝 웃었다.
하지만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굉하게 들어가 눈 주위와 흐리멍덩한 눈동자, 축 늘어진 어깨와 팔 그리고 흔들리는 다리에다 거칠게 몰아 쉬는 숨까지.
재준은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쯧쯧쯧.
“안 된다니까요. 마약으로는 내가 주는 쾌락을 대체할 수 없어요.”
“알아. 하지만 견딜 수가 없는걸. 다시 느끼고 싶어 미치겠어.”
재준이 타이르듯 말했다.
“다이로, 다이로. 그럼 나와 같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 몸으로 뭘 하겠다는 겁니까?”
“미안, 하지만.”
“잠깐, 잠깐, 기다려요.”
재준은 하얀색 스위치를 꺼내 꾹 눌렀다.
하.
다이로의 표정이 온화하게 바뀌었다.
소량의 도파민이 다이로의 얼굴을 환하게 바꾸어 주었다.
으……. 학, 학, 학.
휴.
역시 최고다.
재준은 다이로의 표정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렸다.
“자, 통증이 좀 가라앉았나요?”
“살 것 같아.”
“그럼 우리 일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보도록 합시다. 우선 부탁이자 명령을 하나 하죠.”
“부탁? 명령? 어떤 거지?”
재준이 다이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시는 마약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 하찮은 쾌락 때문에 진정한 쾌락을 즐기지 못할 수 있어요. 알겠어요?”
“알겠어. 다신 안 하지.”
“명심해야 합니다. 당신 옆에는 내 친구가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거 알죠?”
“쥐?”
“맞아요. 그 아이도 당신과 같이 쾌락을 즐길 준비가 되어있어요.”
“쥐가 쾌락을? 그래서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였어.”
“당연하죠. 나를 보세요.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난 신도 두렵지 않아요. 물론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너도 쾌락을 즐기는 거야?”
“그럼요. 그 좋은 걸 어떻게 마다할 수 있나요. 내가 최상의 쾌락을 위해 모든 걸 자제하고 있는 게 느껴지나요?”
다이로는 재준의 눈을 보았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어쩐지 남미 갱단을 아레파 반죽 주무르듯 하는 걸 보고 심장이 강철로 된 놈이라 생각은 했어.”
아레파는 남미의 옥수수빵이다.
하하하.
“칭찬으로 듣죠. 자.”
재준이 파란색 스위치를 꺼냈다.
“이번엔 2분. 당연히 일회용이에요.”
꿀꺽.
다이로의 목젖이 선명하게 꿀렁였다.
“다음엔 4분. 일을 잘 마무리하면 시간을 두 배로 늘려줄 수 있어요.”
두 배.
다이로는 파란색 스위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뭔가 결심을 한 듯.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말해 보세요.”
“너의 목표는 클란 델 골포의 파멸인가?”
재준이 다이로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겨우?”
“뭐?”
큭큭큭.
“내 목표가 전 세계 마약을 장악한 집단도 아니고 겨우 콜롬비아에 빌붙어 먹는 카르텔 하나를 지우는 거라고요? 큭큭큭,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네요.”
“아닌가? 나를 이용해서 콜롬비아 카르텔을 다 지우는 거 아니야?”
“당연히 아니죠. 클란 델 골포를 없애서 나한테 이득이 뭔데요? 뭐 돈이라도 나보다 많아요?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고대 제국의 유품이라도 가지고 있나요? 내가 알기론 그런 건 없을 텐데.”
“그럼 이러는 이유가 뭐지?”
“정말 알고 싶어요?”
“알고 싶어.”
저벅, 저벅, 저벅.
재준이 다이로 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얘기해줄까 말까를 무척 고민하는 척.
딱.
손가락을 튕겼다.
“얘기해 주죠. 그래야 다이로도 명분이 생길 테니까.”
다이로는 재준의 말에 집중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싶은 것은.
조용한 속삭임이 들렸다.
“마약을 없애고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 칩을 심는 거예요.”
“뭐?”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요? 여기 이거 파란색 스위치를 파는 거죠. 그것도 편의점에서, 누구나, 언제든지. 싸게.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곳에서 말이에요.”
“그…… 게 가능할까?”
“가능하죠. 마약만 없다면.”
“그래서 마약을 없애겠다고?”
“그렇지요, 걸리적거리는 건 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어때요, 이제 해볼 맘이 마구 샘솟지 않아요?”
다이로는 재준을 바라봤다.
이놈은 진짜 악마다.
돈이 목적이 아니다.
전 세계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려고 한다.
근데,
이놈이 하는 일이라면 불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지금까지 모두 할 수 없다는 일만 골라서 이루어 냈다.
만약 콜롬비아에 마약이 없어진다면 머리에 생체칩을 넣을 놈들은 넘쳐날 것이다.
그리고 한 번 경험하면? 헤어 나올 수 없지.
더 중요한 건 칩은 공장에서 찍어 낸다는 것이다.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아주 빠르게.
“콜롬비아 다음은?”
“다음이 어딨어요? 남미의 모든 나라가 마약에 연류되어 있는데 다 쓸어버려야죠.”
“그래서 ‘드럭리걸 존’을?”
“그렇죠. 모든 걸 힘으로 누를 수는 없잖아요. 수요를 최대한 줄여서 자연 도태되게 만들기도 해야 하니까.”
“철저하군.”
“근데 그거 알아요?”
“뭘?”
“이건 전부 내가 한 게 아니라 인공지능이 계획하고 진행하고 있어요. 좀 더 정확하고, 좀 더 세부적이죠. 인간은 절대 이길 수 없는 녀석. 신기하죠?”
“인공지능…….”
“그 인공지능은 내 명령을 따르죠. 난 한마디만 했을 뿐이에요. ‘마약을 없애라’. 그랬더니 알아서 ‘드럭리걸 존’도 만들고, 도시도 세우고, 로봇도 생산하고, 척척. 하하하하.”
“그럼, 이 칩은 뭐지?”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죠. ‘일은 제가 할 테니 인간은 삶을 즐기세요.’ 뭐 이런 거?”
다이론은 두 눈을 감았다.
선물…….
인공지능에게서 벗어나질 못하겠네.
그 누구라도.
“자, 다이론.”
재준의 손에 파란색 스위치가 들려 있었다.
“이번에 우리가 할 일은…….”
***
다음 날.
클란 델 골포.
아침 8시.
거대한 철창문에 하얀색 리무진이 다가오자 무장한 경비들이 깜짝 놀란 모습으로 튀어나와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리무진 안에서 들리지 않는 걸 뻔히 알지만, 목소리는 성실했다.
스릉.
리무진 창이 내려가고 다이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 와봐.”
다이로의 손짓에 경비들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호르헤, 가족은 잘 있지?”
“아, 그럼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여기, 업무 끝나면 다 같이 술이나 한잔해.”
다이로의 손에 두툼한 돈뭉치가 들려 있었다.
어.
경비, 호르헤는 우물쭈물 물러났다.
다이로가 미쳤나?
지금까지 다이로는 절대 아랫것들하고는 말을 섞는 일이 없었다.
“받아. 부탁할 것도 있고.”
“아, 네.”
부탁이란 말에 호르헤가 다가가서 돈뭉치를 받았다.
“부탁이라 하시면.”
“응, 간단한 거야. 우라베가 들어오면 잠시 정문에서 대기하라 그래. 내가 따로 할 말이 있거든.”
“네.”
“내 말을 안 듣고 들어가면 갈겨 버려.”
“네, 네?”
“죽여 버리라고. 말 안 듣는 놈은 필요 없잖아.”
“네.”
“명심해. 말 안 듣는 놈은 필요 없어. 너를 포함해서.”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수고.”
리무진이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가자 다이로는 백미러로 호르헤를 살폈다.
호르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총을 들어 장전했다.
다이로는 지금 에레라와 단독으로 말을 나누고 싶었다.
리무진이 멈추고 다이로가 내리며 자신을 경호하는 놈들을 향해 손을 멈춰 보였다.
“너희도 여기 있어. 둘이 할 말이 있으니까.”
“네.”
경호원을 밖에 두고 다이로가 안으로 혼자 들어갔다.
긴 복도를 지나 에레라의 집무실 문을 거침없이 열었다.
“에레라, 나의 친구. 오랜만이야.”
에레라도 예의도 없이 들어오는 다이로를 향해 억지로 큰 소리로 말했다.
“오, 나의 친구 다이로.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침 일찍 출근을 한 거야?”
“아침형 인간이 오래 산다고 해서.”
갑자기 아침형 인간?
에레라가 신기한 듯 다이로를 위에서 아래로 쭉 흩었다.
근데 왜 멀쩡하지?
분명 우라베의 보고에 의하면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온갖 마약에 찌들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다이로의 모습은 깔끔한 신사를 연상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잘 빠진 새하얀 양복에 검은 중절모, 선글라스가 잘 어울렸다.
다이로는 가죽 쇼파에 앉아 앞에 놓인 시가를 하나 들고 커터로 자르고 불을 붙였다.
후.
시가의 연기가 다이로의 얼굴을 지나 공중으로 퍼졌다.
“친구, 나 이제 약 안 하려고.”
“…….”
에레라는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 그거 반가운 소식이네’는 어색하고 ‘너, 미쳤어? 그 좋은 걸 왜 끊어?’라고 하기에도 자신의 속을 들킬 것 같았다.
다이로가 에레라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걱정 마, 이번에 엔비가도 건으로 좀 자중하려고 그런 거야. 감시하는 눈도 많아지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제 머리에 총알이 박힐지 모르잖아.”
후.
다이로가 뿜어내는 시가 연기 사이로 에레라의 웃는 얼굴이 스쳤다.
“엔비가도는 내가 잘 마무리했어.”
“알아, 자네가 다 알아서 하는 거.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다이로, 그러지 말고 당분간 본사에 있는 건 어때?”
본사란 지금 여기 이 대저택을 말하는 것이다.
수백 명이 주위를 경비하고 수천 명이 외곽에 기거하고 있는 요새.
“하하하, 날 겁쟁이로 만들 작정이야? 나 다이로라고, 다이로. 집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못나진 않았어.”
“걱정돼서 그렇지.”
“걱정할 필요 없어. 몇 놈 본보기로 세워 놓으면 돼. 뭐, 알면서.”
에레라도 소파로 다가와 시가를 하나 꺼냈다.
“우라베가 오면 진행 중인 사업에 대해.”
“우라베를 믿어?”
다이로가 에레라의 말허리를 잘랐다.
“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에레라가 미간을 좁혔다 펴졌다.
에레라의 표정을 읽었는지 다이로가 피식 웃었다.
“장난이야. 장난.”
“다이로, 우라베는 지금까지 잘해 왔어.”
“안다니까. 지금 미국 밀매도 우라베가 여러 루트를 만들어 놓은 거잖아. 덕분에 잠수함까지 사고.”
미국이 육로와 항로에 대한 단속이 심할 때 클란 델 골포는 잠수함을 동원하여 마약을 운반하기도 했다.
그 덕에 미국에 안정적인 운반 루트가 확보되었다.
“안다면 다행이고.”
“근데 말이야. 너무 똑똑한 놈들은 가끔 생각이 복잡하더라고. 그게 답답할 때가 있어서 말이야.”
“다이로.”
“아, 걱정은 하지 마. 그냥 하는 말이니까.”
후.
다이로는 에레라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시가 연기를 뿜었다.
양쪽 입꼬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나저나 엔비가도 농장 물량이 있으니 당분간 미국 물량 확보는 걱정 안 해도 되지?”
피식.
이번엔 에레라가 실없이 웃었다.
“고마워. 사실 당시에는 친구의 단독 행동에 화가 나긴 했어. 하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라, 물량 확보가 원활하게 되니. 솔직히 머쓱해져.”
“그러니까 날 믿으라고. 나도 잘 모르겠지만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생존의 본능이 있거든.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뭐, 이런 거지.”
“큭큭큭. 알지. 내가 너무 이성적이었나 봐. 자꾸 과거를 잊어버리는 거 같아. 배가 부른 거지. 배가 불렀어.”
하하하하.
서로 웃었다.
그리고,
“그래, 이번 미국 물량은 어떻게 전달하지?”
“큭큭큭, 놀라지 마. 아주 기발한 방법을 찾았거든.”
“그래?”
“멕시코의 아미스타드 저수지에서 잠수부를 이용해 실어 나를 거야.”
“오호, 괜찮은 방법이네.”
아미스타드 저수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