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8화 참 변하지 않는 것도 능력이야(13)
베네수엘라.
“보스, 근데 클로프가 뒤발리에 비자금을 가지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재준은 페렐라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너무 뻔하니까. 뒤발리에 비자금은 원래부터 아이티에 있었어.”
“그래요? 아는 것과 다르네요.”
뒤발리에는 1957년에 쿠데타 이후에 당선된 대통령이다.
친위대를 이용한 공포 정치와 부두교를 이용한 우상화,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한 것은 물론이고 직접 정적들을 고문하는 광경을 보면서 흐뭇해할 정도로 잔혹한 인물이었다.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은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는 아이티의 국가 부채보다도 많은 돈을 스위스에 비자금으로 보관할 정도로 부패했다.
이런 일들이 미국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나라에서 벌어졌는데 미국은 왜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당연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쿠바와 손을 잡지 않게 하려고 적극적으로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를 방치했다.
결국, 뒤발리에는 분노한 국민에 의해 쫓겨났다.
이번에 미국은 쓸모가 없는 뒤발리에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근데.
1986년 9억 달러를 가지고 프랑스로 망명했던 뒤발리에가 2010년에 아이티로 돌아왔다.
이유는 500만 달러 비자금을 찾을 수 있는 스위스 은행의 금고 열쇠를 찾기 위해서.
그런데 멍청하게 체포되어 재판에 부쳐졌고 이상하게 재판도 받기 전에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왜 다시 와서 죽은 것일까?
설마 그때까지도 아이티 국민이 자신을 두려워할 것으로 생각한 것일까?
참 변하지 않는 것도 능력이다.
재준은 알폰소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알려지기론 500만 달러라고 했는데 갑자기 알폰소가 뒤발리에 비자금 중 1억 달러를 가지고 있다는 거야. 그때 알았지. 아, 뒤발리에가 9억 달러를 못 가지고 나갔구나.”
페렐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9억 달러를 가지고 나간 사람이 겨우 500만 달러를 찾겠다고 아이티에 기어들어 온 것부터가 이상하네요.”
“그리고 클로프와 알폰소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실제론 싸우질 않잖아. 이것도 이상하게 생각했어.”
“왜요?”
“이미 1억 달러 비자금 계좌가 알폰소 손에 넘어갔다면 클로프가 가만히 있질 않았을 텐데. 오히려 알폰소가 더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잖아. 우리도 만나러 미행 비슷한 것도 하고.”
“클로프가 무언가 가지고 있었군요.”
“맞아. 1억 달러 이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어.”
페렐라가 이해한 듯 흐흐 웃었다.
“스위스의 비자금 계좌가 하나가 아니었나 보네요.”
“그렇지. 클로프가 스위스의 계좌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거야. 아마 사망한 즈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비자금을 다 찾은 것 같아. 그래서 암살당했고. 처음엔 난 그게 둘의 작품인 줄 알았어. 전에 전용기에서 알폰소가 느닷없이 즈브넬 모이즈 대통령을 클로프가 죽였다고 하잖아. 그때 알폰소부터 의심했지. 이런, 이런, 알폰소가 죽였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럼 알폰소가 죽인 건가요?”
“그건 나도 모르지. 원래는 클로프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알폰소는 국외로 내쫓는 게 내 계획이었어. 둘의 반응을 지켜보고 범인을 가려내려 했는데. 알폰소가 자기 무덤을 팠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지 뭐.”
“그런데 클로프가 8억 달러를 가지고 올까요?”
“안 가져오면 어떡할 거야, 이미 봤잖아. 알폰소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오시리스가 이미 아이티 비자금을 동결시키라고 스위스 정부로 공문을 보냈을 거야. 클로프가 찾을 수가 없는 돈이 되어 버린 거지. 차라리 8억 달러의 비자금을 찾아 국고에 환원시켜서 국민의 지지라도 얻는 게 낫지 않을까?”
“큭큭, 8억 달러가 꼼짝없이 눈앞에서 사라지게 생겼네요.”
“자업자득이지.”
클로프는 투마로우를 끌어들인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좀 더 투마로우, 아니, 재준에 대해 알아봤어야 했다.
“사람들 반응은 어때?”
“직접 보세요.”
페렐라가 대형 스크린을 가리켰다.
초대형 스크린은 50여 개의 작은 화면으로 꽉 차 있었고 각각의 화면에 아이티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었다.
모두 희망에 찬 얼굴을 하고 움직임도 가벼웠다.
마음의 짐을 덜었으니 몸도 한결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괜찮네. 이제 본격적인 우리 일을 할 때가 됐네.”
“우리 일이라뇨?”
“은행. 우리 본연의 업무. 돈을 집중시키고 관리하는 일.”
“아이티에 투마로우 지점을 세우려고요?”
“일단 우리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손등에 생체칩을 이식했잖아.”
“그렇죠, 처음에 신체검사 할 때 전부 손등에 이식했죠.”
페렐라가 자신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생체칩은 미국 한 기업이 2004년 FDA의 승인을 받았다.
16자리로 구성된 메모리와 무선 송수신 장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기장에 의해 칩 안의 전력이 흐르는 Passive RFID 장비라 배터리는 필요 없다.
장점은 유괴된 아이들이나 치매로 방황하는 노인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고, 범죄 전과자들을 관리하고 추적할 수 있다.
또한, 각종 결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제 그 칩을 이용해서 신용카드처럼 사용하게 하는 거야.”
신용카드?
페렐라가 갸우뚱하다가 뭔가 생각난 듯,
“아, 본 적이 있어요. 네덜란드 사람이 카드리더기에 손등을 대고 결제하는 장면이었는데.”
“맞아, NFC.”
이게 바로 ‘NFC 기술(근거리 무선 통신)’이다.
스마트폰의 설정 웹에 들어가면 NFC란 아이콘을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도 이 기술로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핸드폰을 내밀어서 결제하고 있다.
또 ‘RFID 기술(무선 주파수 인식)’이란 다른 비접촉식 결제 방식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직불카드와 신용카드에 이 기술이 사용된다.
“아이티 신용카드 회사 중 하나를 인수하고 나머지 회사를 합병해서 전국에 있는 카드회사를 하나로 통합해.”
“인수, 합병이요? 거기다 통합?”
워서스틴의 눈빛이 반짝이다 못해 요정이라도 본 것처럼 초롱초롱해졌다.
“드디어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게 된 겁니까?”
왜 이렇게 좋아해?
“그, 그래. 인수, 합병이야 너희들이 최고잖아.”
크하하하하하.
재준은 갑자기 웃는 워서스틴을 보며 두렵기까지 했다.
이러다 일내는 거 아냐?
어쨌든.
아이티에서 유통되는 모든 돈은 투마로우를 통한다.
이때,
보고 있던 화면이 바뀌며 ‘블랙’의 음성이 들렸다.
【도날드가 패배했습니다.】
재준은 불현듯 나타난 ‘블랙’을 향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알아.”
그걸 꼭 확인 사살을 해야겠니?
이미 선거 전부터 진 게임이었는데.
도날드. 희대의 가식을 벗은 최초의 미국 대통령.
하지만 이번엔 도가 지나쳤다.
미국 국민이 생각하는 대통령은 좀 근엄한 면이 있어야 하는데.
블러드 패니는 뭐야?
누가 보더라도 국가를 삶아 먹을 이미지가 됐잖아.
그리고,
【도날드의 패배로 인해 콜롬비아가 보스에게 접근할 것 같습니다. 실시간 뉴스를 시청하시겠습니다.】
아니, 그게 왜 그렇게 이어져?
도날드가 패배한 후 콜롬비아 대통령이 나에게 온다고?
재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은 콜롬비아 구스타보 대통령이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뭐라고 떠드는 장면이었다.
[오늘 콜롬비아 구스타보 대통령이 마약의 합법화를 부르짖으며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마약 카르텔을 근절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마약의 합법적인 유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공식적인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마약을 합법화하겠다고? 마약을?
저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재준은 급하게 ‘블랙’에게 물었다.
“이게 도날드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콜롬비아 정부와 도날드 대통령이 구두로 약속한 내용입니다.】
도날드가 마약을 합법화하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지?
그래서 콜롬비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TV에 등장해서 지랄 발광을 하는 거구나.
“블랙, 콜롬비아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접근했지?”
【콜롬비아 정부가 아이티 정부에 보스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아이티 정부는 거절하는 대신 워서스틴의 연락처를 알려줬습니다.】
“알아서 하라고 발을 빼버린 거네.”
큭큭큭.
워서스틴이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클로프가 보스 얼굴을 다시 보긴 힘들지.”
그때,
워서스틴의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띠리리리링.
모르는 번호?
빨리도 연락하네.
급하긴 급했나 봐.
“네, 투마로우 워서스틴입니다.”
-네, 저는 콜롬비아 대통령 비서실장 곤잘레스라고 합니다.
“콜롬비아요?”
콜롬비아란 말에 재준과 페렐라가 미간을 찡그렸다.
안 봐도 비디오네.
갱단 처리겠지 뭐.
-다름이 아니라, 아이티 소식을 듣고 대통령님이 뵙고 싶어하십니다.
“혹시 갱단 처리 때문에 전화하신 건가요?”
워서스틴이 먼저 선수를 쳤다.
재준의 표정을 보아 별로 달가워하는 표정이 아니어서 되도록 자신의 손에서 처리하려고 했는데.
-관련은 있습니다만 갱단을 직접 처리해 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래요?”
-일단 임재준과 대통령님이 만났으면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재준이 워서스틴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나 보자.
“날짜와 장소를 알려 주세요. 우리가 움직이겠습니다.”
-네, 그럼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툭.
띠링.
통화를 끊자 바로 문자가 왔고 워서스틴은 재준에게 문자를 보여줬다.
“내일? 뭐가 이렇게 급해? 현재 콜롬비아 상황은 좀 평화롭지 않나?”
“맞아요. 지금은 콜롬비아가 마약 카르텔과 전쟁을 하는 정도는 아닌데요. 갱단도 자중하고 있고.”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하지? 이거 또 미국이 끼어든 거 아냐?”
콜롬비아는 정부, 좌파 게릴라, 우파 무장 세력, 마약 카르텔이 한 대 뒤섞여서 손을 잡았다가 뒤통수를 쳤다가 다시 손을 잡았다가 다시 앞통수를 쳤다가 하면서 아주 복잡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사실 콜롬비아 대통령은 마약 갱단 외에도 좌파 게릴라와 우파 무장 세력도 때려잡아야 하는 극한 직업이 맞다.
그리고 미국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미국은 꼭 제일 힘이 없어 빌빌거리는 놈에게 자금을 대주면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왜? 그런 놈들을 살려줘야 미국을 큰 형님으로 받들어 모실 거니까.
어쨌든,
아이티도 그렇고 콜롬비아도 그렇고, 남미 전체, 아니 세계 전체가 미국이 끼어들어서 어느 한 조직을 밀어주는 탓에 잘하면 해결될 것 같은 상황도 아주 개판으로 만들었다.
남미,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까지 뭐, 조금만 이념 분쟁이 있을 것 같은 지역엔 어느새 나타나서 분란을 조장했다.
결과로 봐서 이게 잘한 것인지 못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미국은 나름 열일을 해서 세계를 혼돈의 상황으로 만들었다.
쩝.
페렐라가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도날드가 떨어져서 미국의 도움을 받기는 틀렸네요.”
“아니야, 오히려 잘된 일이야.”
“왜요?”
“미국에 아이티 상황이 알려지면 못 참고 나대는 단체들이 나타날 거 아냐? 한두 개가 아닐 거야. 아마 지금쯤 그 단체들이 정부 관계자와 공화당, 민주당 의원들에게 엄청나게 로비 중일 텐데, 도날드가 견딜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