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화 참 변하지 않는 것도 능력이야(6)
맞네, 페렐라가 말한 그 사람.
근데 과격한 것 같진 않은데.
“야권 대표시군요.”
“저를 아십니까?”
“좀 과격하다고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페렐라가 알려준 정보는 여기까지.
“그건 정부가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과격한 방법을 사용한 것뿐입니다.”
“뭐,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한 일이니 내가 간섭할 문제는 아닌 듯하고. 일단 왔으니 들어갑시다. 손님을 밖에 세워두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요.”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재준과 알폰소가 비행기에 오르고 나머지 일행들이 그 뒤를 따라 올랐다.
비행기에 올라탄 알폰소 일행은 기내를 보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비행기야, 호텔이야?
재준은 피식 웃었다.
놀라기는, 이게 에어포스 원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들어갔어.
“자, 술이라도 한잔하겠습니까? 맥주도 있고 위스키도 있는데.”
알폰소는 입술을 꽉 깨물고 푼 후,
“위스키로 하겠습니다.”
“좋은 선택이네요. 역시 남자는 술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속마음을 다 꺼낸다니까.”
재준이 위스키를 꺼내자 기내에 있던 비서가 미리 포장된 요리를 내왔다.
쫄쫄쫄쫄쫄쫄쫄.
재준이 알폰소의 잔에 술이 천천히 차올랐다.
알폰소의 시선이 위스키를 쫓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해보세요.”
“아, 네. 클로프를 만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이티를 재건해 주신다는 것도요.”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뭐 문제 있나요?”
“아니요, 투마로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고맙죠. 하지만 투마로우가 미국과 밀착 관계에 있다는 게 저희들 걱정입니다.”
“미국과 무슨 원수라도 졌습니까? 미국이 아이티의 최대 원조국으로 알고 있는데.”
“흥, 그깟 식량 몇 포대 주는 거로 아이티를 좌지우지하면서 이 꼴로 만든 게 미국입니다. 하나도 고맙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꼬이신 겁니까? 주는 미국 무안하게.”
“미국은 우리가 쿠바에 붙을까 봐 이 꼴로 만든 겁니다.”
“그래요?”
아하, 미국이 아이티를 도와주는 이유가 그거야?
공산국가가 될까 봐?
하긴, 쿠바 다음은 중국이겠지.
그럴듯하네.
위에서 쿠바를 내려다보는 것과 쿠바, 중국이 미국을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건 완전히 다르지.
미국 입장에서는 꿈에 나올까 무섭겠어.
알폰소는 말에 힘을 실었다.
“지금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 야권이 승리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현 정부를 밀어주고 있습니다. 지진을 핑계로 선거를 미루고 있는 겁니다. 저희의 흠집을 잡은 후에 선거를 치를 계획이니까요.”
“그래서 미국과 사이가 안 좋은 거예요?”
“지금은 안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티는 자립해야 합니다. 망하든 흥하든 우리 손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미국의 원조로 국민은 일도 하지 않고 마음만 피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걸 미국이 노리고 계속 식량 원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는 건 나도 지지하고 싶네요. 근데 당장 식량 원조가 끊기면 인구 절반이 굶어 죽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래도 자신 있는 겁니까?”
끙.
알폰소는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말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 한잔하세요. 가슴이 뜨거워지면 입도 뜨거워지는 거니까?”
쫄쫄쫄쫄쫄쫄쫄.
알폰소는 결심을 한 듯 위스키를 단번에 들이켰다.
크.
“해안가에 있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되찾을 겁니다. 그 농장만 있으면 아이티는 식량 자급을 80%까지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이건 맞다. 아이티는 식량 자급률이 80%였다.
식량 원조가 들어오면서 곡물 가격이 하락하고 국민들이 농사에서 손을 떼면서 자급률이 40%로 떨어졌다.
그 이후로 20%대로 더 추락했다.
그래도 그렇지.
“남의 것을 빼앗는다고요?”
“처음부터 우리를 속여서 빼앗아간 겁니다.”
“허, 그러면 국제 사회에서 고립될 텐데요.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 농장은 관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미국이 관리를 못 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아이티는 절대 돈을 벌면 안 되니까요.”
“좋아요. 뭐 그건 그쪽에서 알아서 하세요. 빼앗든 빼앗기든 책임질 각오가 되어있다면 나는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그건 그거고. 나에게 원하는 게 있을 것 같은데. 뭡니까?”
알폰소는 위스키 한 잔을 다시 들이켰다.
그리고 힘 있게 말했다.
“미국을 설득해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도와주십시오.”
“대통령 선거요?”
“네.”
선거야 하긴 하는 건데.
이 사람은 생각이 있는 건가?
내 입장에서 보면 남의 나라 대통령 선거를 남의 나라에게 부탁해야 하는 꼴이잖아.
나랑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을.
그럼, 먼저 조건을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무조건 나보고 미국 가서 협박이라도 하란 이야기잖아.
그리고.
“선거를 했는데 지면 어떡할 겁니까? 그다음은 답이 없는 것 같은데.”
“그때는…….”
알폰소가 말끝을 흐렸다.
뭐야? 진짜 대책이 없는 거야?
이러면서 나보고 미국에 말을 해달라고?
“역시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네요. 국민을 위한다는 건 핑계에 불과한 거 같은데.”
“아닙니다. 선거에 패한다면 깨끗하게 승복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할 겁니다.”
어째 그놈의 봉사는 어느 나라 정치인이건 다 한다고 하네.
도대체 그 봉사 보고 싶네. 진짜 봉사인지.
그래, 뭐 할 수 있지 봉사.
내가 할 봉사도 아닌데.
“자, 그럼 내가 제안을 하죠.”
“네.”
“선거, 하도록 해 드리죠.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선거 감시도 우리가 깔끔하게 도와주겠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래요. 부정 선거 개입을 원천 차단해 드릴 수 있어요. 그래야 우리도 편하니까.”
“감사합니다.”
“대신에 이기든 지든 아이티 운영은 투마로우가 합니다.”
“네?”
뭘 놀라고 그래?
네가 조건을 말하지 않으니까 내가 하는 거잖아.
“당신들은 정치 놀이를 하란 말이에요. 둘이 그렇게 치고받고 싸우세요. 어쩌면 그게 국민을 위한 일 같은데. 경제를 모르면서 이것저것 건드리니까 나라가 이 꼴이 된 거 아닙니까? 미국이 아이티를 이렇게 만들었다? 저라면 전쟁을 선포했을 겁니다. 어딜 감히 내 나라에 와서 지랄이냐고.”
“그건……. 미국 내 아이티 국민도 상당수 있습니다. 그들이 위험에 처할 겁니다.”
뭐라는 거야?
“아, 햄버거 먹는 아이티인들? 여기는 진흙 쿠키로 연명하면서 햄버거, 피자 먹는 아이티인들을 걱정하는 거예요? 정말 별 쓸데없는 걱정이 많군요.”
“사실 그들이 아이티에 보내는 돈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돈이 묶이면 더 많은 국민이 굶습니다.”
헐.
재준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이 사람아. 뭔 일을 이리 복잡하게 꼬는 거예요. 당신이 직접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잖아요. 일에 일관성이 없어요. 일관성이. 플랜테이션 농장을 빼앗는다고 했다가, 선거만 이기면 다 되는 것처럼 굴다가, 이제 미국에 있는 아이티인이 보낼 돈을 걱정해요?”
뭐야? 이 갈팡질팡한 인생은.
“죄송합니다. 사실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그러니까 투마로우에게 아이티를 맡기란 말이에요. 당신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됩니다.”
후.
알폰소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건 또 뭐야?
여기서 끝?
그러지 뭐.
“자, 그럼 이만 정리합시다. 우리도 베네수엘라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죄송합니다. 시간을 너무 빼앗았습니다.”
재준은 마시던 위스키를 알폰소에게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서 드세요. 오늘은 이거 먹고 푹 자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래도 이 술이 50년 된 글렌파클라스입니다. 만 달러짜리예요.”
“네?”
알폰소는 다시 자리에 앉아 잔에 남아있는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재준이 내민 70%가량 남은 글렌파클라스를 두 손으로 받았다.
아무리 아이티가 부정부패가 심하다고 해도 감히 만 달러짜리 위스키를 먹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
수입이나 되려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돌아서다 잠시 멈추고 재준을 봤다.
“저, 이런 말을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뭔데요?”
“대통령 암살을 지휘한 사람은 클로프입니다.”
어, 그래.
대통령 암살 언제 나오나 했다.
상대를 깎아내리려면 진실이든 거짓이든 찔러는 봐야지.
아. 놀라는 척은 해야지.
“그래요?”
“네, 한번 알아보십시오.”
“알겠어요. 내가 꼭 조사하겠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재준은 마지막으로 악수를 하고 알폰소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걸 배웅했다.
멀어져가는 알폰소를 보며 페렐라가 다가왔다.
“보스, 이쪽도 너무 쉬운데요.”
“그렇지? 이놈들이 사람을 아주 쉽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워서스틴이 피식 웃었다.
“이 작은 섬에서 뭘 해왔겠어요. 한국이라면 모를까.”
“거기 한국이 왜 나와?”
“칭찬한 건데요?”
“그게 무슨 칭찬이야.”
“모름지기 정치는 머리싸움인데 한국은 국민 모두가 정치인이잖아요. 보통 머리로는 한국에서 정치 못 해요.”
어? 칭찬 같긴 하네.
“근데 마지막에 좀 유치하던데. ‘대통령 암살을 지휘한 사람은 클로프입니다’라니.”
재준이 알폰소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하자 워서스틴과 페렐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진짜 초짜예요.”
“그러게.”
그래, 알아는 봐야겠지.
재준은 핸드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힘들어 보이십니다.】
“뭐야? 블랙, 인사가 왜 그래?”
【지금 상황에서 가장 어울리는 인사입니다.】
“안 힘든 사람한테 힘들다고 하면 욕하는 거야.”
【그럼, 안 힘들어 보이십니다.】
“아유, 엎드려 절 받기지.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냐?”
【바라는 게 없는 겁니까?】
“아니야, 있어. 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클로프와 알폰소에 대해 싹 다 조사해 줘. 그리고 지금부터 감시하고.”
【통신망이 빈약합니다. 정보의 양이 적어도 양해 바랍니다.】
양해를 바라?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알았어. 끊어.”
툭.
재준은 블랙과 통화를 하면서 의구심이 들었다.
이거 진이랑 놀더니 점점 사람처럼 말하려고 하네.
의지가 없다니까. 상관은 없겠지만.
진이 가르쳤나?
“워서스틴, 베네수엘라 석유 준비되었어?”
“네. 우리가 출발할 때 이미 세팅 다 돼 있었어요.”
“카킬에서 오는 밀과 옥수숫가루는?”
“그것도 이미 베네수엘라 항에 정박해 있습니다.”
“그럼 준비는 다 되었네. 컨테이너만 오면 시작해 볼까.”
“네. 보스.”
***
알폰소는 보잉 747-8 VIP에서 멀어지면서 손에 든 글렌파클라스를 쳐다봤다.
옆에 같이 걷던 보좌관이 힐끔거렸다.
“봤어? 이게 글렌파클라스 50년이래. 한 병에 만 달러짜리 술이야.”
“저, 아까 한 병 꺼낼 때 보였는데 수십 병이 있던 거 같던데요. 역시 세계 최고의 부자는 다르네요.”
“그러게, 그래도 이 정도 부자는 돼야 아이티가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거야. 우리한테 남는 것도 좀 있고.”
“근데 임재준이 우리 뜻대로 움직여 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