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화 자, 돈들 쓰세요. 돈(15)
유엔 사무국 회의장.
오늘은 유엔 총회가 있는 날이다.
유엔 총회는 매년 9월 셋째 주 개회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회의다.
이번 총회의 결의안 중 하나로 단연 아프리카에서의 투마로우 벨트를 인정할 것이냐가 상정되어 있었다.
“이야, 유엔 본사를 다 와 보네요.”
엘리자베스는 들뜬 목소리로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만 좀 두리번거려라. 창피하다.”
재준이 엘리자베스 옷자락을 슬며시 당겼다.
“하도 오지만 다녀서 그래요.”
“유럽도 많이 갔잖아. 최고급 호텔에, 최고급 요리에, 뭐가 오지라는 거야?”
“겨우 몇 번?”
“돈 벌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피.
엘리자베스는 입을 삐죽였다.
“근데 투마로우 벨트를 인정해 줄 것 같아요?”
“당연히 인정하겠지.”
“어떻게 그렇게 자신해요?”
“22% 분담금 내면 돼.”
유엔 분담금은 총분담금의 22%를 넘지 못한다.
나름 한쪽으로 의결권이 기울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한다고 하는데 사실 22%를 분담하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2위는 일본으로 19.6%. 나름 좀 낸다.
3위는 독일인데 9.8%로 훅 떨어진다.
“그게 얼만데요?”
“6억 7천만 달러 정도?”
“별로 안 내는 구나.”
“그렇지. 아마 네가 카킬에서 받는 배당금보다 적을걸.”
“근데 아프리카를 통째로 삼켰는데 분담금만 내면 인정을 해요?”
“22%면 아프리카 전체가 내는 분담금보다 배는 많아.”
“헐. 돈만 내면 다 되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억압받는 사람들 평화롭게 살게 해줬는데.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솔직히 자원 팔아서 돈 벌잖아요.”
“어허, 그거야 당연한 거지. 누군 뭐 땅 파서 장사하나? 다 남는 게 있어야지.”
“남는 게 과하게 많은 거 같은데.”
“지금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 빌딩도 좀 올리고 공장도 짓고 주택도 건설하려면 돈이 모자란다고.”
“그거 다 돈 받고 팔 거잖아요.”
흠, 흠.
“어, 요즘 목이 너무 아픈 거 같아. 어디 음료수 자판기라도 없나?”
“유엔 본사에 와서 자판기를 왜 찾아요?”
“여긴 뭐 사람 사는 곳 아닌가? 유엔 사람들은 아침이슬만 먹고 살어?”
“흥, 할 말 없으니까.”
유엔 총회가 시작되고 일주일 후, 일반 토의인 각 나라의 대표가 연설을 시작했다.
말이 토의지 그냥 한 명씩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와, 와, 와. 시작하나 봐요.”
첫 연설자로 연단에 오른 이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이었다.
일반 토의의 첫 연설은 브라질 몫이다.
“어, 근데 왜 브라질이 먼저 연설을 시작해요? 주최국인 미국이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유엔 창립 초기 모두가 첫 발언을 꺼리는 상황에서 브라질이 거듭 먼저 발언하기를 자청한 것이 관례로 굳어졌기 때문이야. 그다음이 주최국. 그다음이 유엔 총장 국가가 하는 거지.”
“아하. 그렇구나.”
브라질 다음 주최국 미국, 그다음 의장국인 몰디브로 연설이 이어졌다.
그리고 네 번째 발언자부터는 대표의 ‘급’에 따른 선착순으로 이어졌다.
열 번째 국가 원수가 연설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아품.
“아저씨, 아저씨 연설은 언제 하는 거예요?”
“13일 후에.”
“네? 이걸 13일이나 봐야 한다고요?”
“그럼 어떡해. 연설을 하지 않으면 어디 놀러라도 갈 텐데. 체면이 있지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지 않겠어? 가뜩이나 다른 나라 대표들이 수군거리며 보고 있는데.”
“이런…….”
올해는 193개 회원국 가운데 106개국 정상이 대면 참석을 신청했다.
엘리자베스와 재준은 꼬박 13일 동안 무슨 말인지 모르는 각국 대표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아프리카의 상황을 좋게 말하든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도대체 하나도 관심이 없으면서 희망을 전달한다고 하고 우려를 표방하기도 했다.
드디어 마지막 날.
재준의 특별 연설의 시간이 다가왔다.
유엔 연설이라고 하면 특별할 거 같지만 그닥 특별할 건 없다.
워낙 각국 정상들이 모인 자리라 특별한 예절도 없었다.
어느 나라 문화를 강요할 순 없으니까.
“투마로우 임재준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아프리카에 투마로우 벨트라는 부족 사회가 생겼습니다. 국경이 허물어지고 농경 사회를 기본으로 자급자족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아프리카에 보내는 곡물은 안 보내셔도 됩니다. 최소한 국가 원수님 주름살 하나 정도는 펼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하하.
웃긴 이야기도 아닌데 참 열심히들 웃는다.
“투마로우 벨트는 자율주행 도로를 따라 양옆으로 곡물을 재배하는 곡창지대가 있으며 10km마다 팜봇이 자리를 지키는 약국이 있고요. 인구 30만 명이 모이는 곳에는 병원이 있습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부족마다 학교가 있고 이 학교에서는 ‘티처’가 아이들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투마로우 벨트에서 TOEFL과 IELTS, TOEIC 점수는 세계 최고입니다.”
짝짝짝짝짝짝짝.
굉장히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이 사람들이 왜 이러지 부담스럽게.
“관개 시설이 새로 진행 중이고 태양열 패널이 설치되어 있어 이제 곧 물 부족 국가란 오명은 벗을 것이며 전기는 풍족하지 않아도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전기가 부족하지 않은 건 모두 아프리카에는 아직 에어컨 보급률이 세계 최악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거 참, 사람들.
“아프리카 자원 개발은 원활하게 진행 중이며 수익의 대부분은 부족 사회를 운영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엘론과 손을 잡고 스마트폰과 인공위성을 직접 연결하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이 완성되면 투마로우 벨트에서는 기지국 없이 스마트폰을 맘껏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기지국이 없으니 당연히 인터넷은 공짜입니다.”
하하하하하하하.
“항간에는 아프리카의 석유와 석탄, 철강, 우라늄들 좋은 자원을 탈취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있는 것도 압니다. 그럼 당장 계산기를 꺼내서 한번 두들겨 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손해를 보고 있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물론 계속 손해를 볼 생각은 없습니다. 투마로우는 유니세프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당분간은 투자를 이어 나갈 예정입니다.”
짝짝짝짝짝짝.
아프리카 독재자들한테 얼마나 뜯어냈는지 한 10년은 더 돈을 쏟아부어도 끄떡없지.
“킬러 로봇을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우리 로봇들은 방어용이지 절대 공격용이 아닙니다. 어이! 거기 해적이나 산적 아저씨들 이쪽은 아니야. 오면 로봇 옆에서 손 들고 벌 받을지도 몰라.”
하하하하하하하하.
“네, 맞습니다. 킬러 로봇은 이름이 그래서 그렇지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투마로우 벨트에 있는 부족민들은 절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들려면 돈이 듭니다. 명심하세요. 돈은 꼭 필요합니다.”
까악, 까악, 까악, 까악, 까악.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자, 돈을 쓰세요. 돈을. 그러면 평화로운 국가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투마로우. 이상입니다.”
뒤뚱, 뒤뚱, 뒤뚱, 뒤뚱, 뒤뚱.
팽귄이 지나간다.
짝짝.
분명 끝났는데 뒤끝이 너무 안 좋았다.
이야, 저기, 저기 두 명이 박수 치네.
짝짝짝짝짝.
그래, 이제 좀 많이 치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브라보.
어디서 창피하게 국가 원수가 ‘브라보’가 뭐야? ‘브라보’가.
재준이 손을 흔들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가리며 다가왔다.
“아저씨, 잘 나가다 마지막에 그게 뭐예요.”
“뭐가 나 원래 사업가야. 사업가가 광고 좀 한 게 뭐가 문제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긴 유엔이잖아요.”
“그러니까 한 거지. 전 세계 국가 원수가 한자리에 모인 경우가 그리 흔한 줄 알아?”
“아이고 머리야.”
엘리자베스가 드디어 양손으로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
현재증권.
“저, 저, 저, 미친……. 봤나.”
임병달은 ‘미친놈’이라고 뱉을 뻔하다 겨우 참았다.
옆에서 진이 같이 TV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진아, 네 아빠는 도대체 왜 저런 거냐?”
“히히, 투마로우 광고를 하고 싶었나 봐요.”
“저게 광고가 되겠냐? 욕받이가 되겠지.”
“히히히, 그럴 것 같아요.”
진은 TV를 보면서 재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평화로운 국가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꽤 힘든 일을 하려고 하시네.
도움을 요청해도 최빈국들일 텐데.
최빈국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빚이 많다는 거다.
일단 다급한 대로 식량 원조를 받는다.
그 순간 ‘원조의 함정’에 빠진다.
원조를 받으면 당장은 기근이 종결되어 좋지만, 장기적으로는 식량 가격이 폭락하여 더욱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원래 인구 전체의 식량 20% 정도가 부족하면, 5% 정도는 굶어 죽는다.
그러나 원조물자를 받다 보니 일은 안 하고 대부분 섹스에 몰두한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다.
따라서 대부분의 빈국들은 식량 원조를 받는 순간부터 인구가 순식간에 배로 늘어난다.
이러면 유지에 드는 비용도 두 배가 늘어난다.
결국, 더 많은 원조를 받게 된다.
이게 ‘원조의 함정’이다.
재준이 주장하는 자급자족은 국가를 운영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최소한 주식은 자급자족이 가능해야 한다.
반찬이나 간식거리는 여유가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주식은 다르다.
진은 최빈국에 대해 떠오르는 정보들을 살펴봤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데.
이건 더 말이 안 되는 경우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임병달이 진을 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한국은 최빈국에서 어떻게 선진국으로 올라선 거예요?”
“우리?”
임병달도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봤다.
“아이고, 말도 마라. 소나무 껍질 벗겨 허기를 채울 때도 있었어.”
“소나무 껍질이요?”
“그만큼 먹을 게 없었다는 거야. 하지만 한국인이 누구냐. 뭐든 잡으면 반드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민족 아니냐.”
“새로운 거…….”
“그래, 모방이야 다들 하는 거지. 하지만 한국인은 그냥 모방하지를 않지. 비슷하지만 다르게 만드는 재주가 있거든. 그래서 처음에 무시하던 세계 사람들이 한국 제품을 사주기 시작한 거다. 그러다 보니 원작을 뛰어넘는 제품을 만들게 되었고. 하하하.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뛰네.”
“한국 사람은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그래서 성공한 거 아니에요?”
“성공은 부지런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부지런하면 더 성공하기 힘들다.”
“그래요?”
“그래, 사업가는 빈둥거리면서 잘 놀아야 좋은 사업을 구상할 수 있다.”
“놀아요?”
“하하하, 그렇지. 하지만 아쉽게도 혼자 놀아야 한다. 철저하게 혼자.”
“그건 노는 게 아닌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