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4화 자, 돈들 쓰세요. 돈(14)
투마로우펠그리니.
펠그리니는 최근 전문가의 기사를 보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분명 인플레이션인데 디플레이션을 거론하고 있다.
물가상승이 인플레이션이라면 디플레이션은 물가가 제자리이거나 약간의 하락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상황을 말한다.
이게 왜 심각하냐면 세계 각국은 돈을 계속 찍어낸다.
시장에 돈이 풀렸으니 물가는 당연히 올라야 정상이다.
물가가 올라야 기업의 이윤도 늘고 노동자의 임금도 오른다.
근데 돈은 계속 늘어나는데 물가가 안 오른다고?
기업은 적자고 노동자의 임금이 안 올랐는데 시장에 돈이 왕창 풀려 있다고?
투기가 일어난다.
이거 상당히 안 좋은데.
우선 일시적인 물가상승의 원인을 찾기 위해 펠그리니는 ‘블랙’을 호출했다.
“‘블랙’, 원자재 가격이 오르고 있는데 CRB지수와 근원소비자물가지수의 연관성이 얼마지?”
【0.02%입니다.】
이것밖에 안 돼?
기름, 구리, 철 등 상품 가격이 오르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란 말이네.
상품 가격은 실제 인플레이션과 상관관계가 거의 없다면…….
“그러면 왜 상품 가격이 급등한 거지?”
【생산자 20%가 파산했습니다.】
아.
정치인들이 팜봇을 인정하네, 못하네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졌고 잠깐 사이 상품, 재화, 서비스 생산자가 폭망했다.
공급에 차질이 생겼으니 물가가 오를 수밖에.
이건 자연스러운 물가상승이 아니다.
이제 백신이 나오고 치료제로 코로나바이러스가 줄어들면서 다시 수요가 늘어난다.
수요가 늘었는데 공급이 부족하면 돈이 남아돈다는 소리다.
이 남아도는 돈이 어디로 갈까? 뻔하다.
“투기자본은 어때?”
【70% 이상 늘었습니다.】
예상대로다.
코로나로 정부가 돈을 뿌렸고 공급에 문제가 생겼으니 투기적 수요가 급증했다.
투기적 수요의 주체를 찾아야 한다.
먼저 중국이 상품 가격을 견인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의 신규 수요는?”
【작년 대비 0.5% 늘었습니다.】
뭐야? 전혀 늘지 않았다.
중국이 매일 큰소리치는 거에 비해 실제 중국 시장이 크게 늘지 않았다.
“그럼 투기적 가수요는?”
【작년 대비 45% 늘었습니다.】
그렇다면 투기 자본이 가격을 올린 거다.
그럼 문젠데.
차라리 중국인이 물건을 왕창 사서 수요가 늘었으면 그나마 괜찮은데 투기적 수요라면 누군가 사재기를 했다는 말이다.
투기 자본이 물가를 올렸는데 문제는 투기 자본은 지속되기 힘들다는 것.
파산했던 기업과 파산 위기에 몰렸던 기업들이 다시 공급에 박차를 가할 것이고 물가 상승은 일시적이며 전체로 확산되지 못한다.
이거 누가 인플레이션이라고 부추기고 뒤에서 돈을 벌고 있는 거 아냐?
아, 임금 상승도 있었지.
“임금 상승이 얼마나 올랐지?”
【작년 대비 11.6% 올랐습니다.】
“원인이 뭐야?”
【구인난입니다.】
이건 뭐야?
사람을 구할 수 없어서 임금이 상승했다.
경기가 좋아져서 임금이 상승한 게 아니다.
정부가 돈을 뿌려대서 사람들이 일을 안 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주는 돈이 임금보다 후한데 누가 일하려 할까.
코로나 정부 지원이 부작용을 낳았다.
일할 사람을 구하기 어려우니 임금이 올랐다.
근데 이제 상황이 역전될 텐데.
더 이상 정부가 돈을 뿌리지 않으면 실직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노동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
노동자가 늘면 임금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임금이 오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실업 상태고.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백신 접종이 늘면 그만큼 일자리 안전성이 확보되니까.
이러면 임금 상승을 압박할 텐데.
최저임금이 올라 식당과 호텔 등 일부 업종의 임금 상승 압력이 가중된다 해도 전반적인 임금 인상으로 번지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럼 임금 상승이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아니다.
그럼 부채가 문제인가?
“글로벌 부채가 얼마야?”
【작년 대비 280% 늘었습니다.】
과다 부채다.
부채 증가가 성장률을 넘어섰다.
현재 부채는 구조적 문제이고 고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는데 기업이든 국가든 부채는 절대 갚지 않는다.
계속해서 국채 리파이낸싱으로 이자만 지불하고 원금은 쌓아 간다.
부채 거품은 인플레이션 유발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이나 디스인플레이션, 즉 약한 디플레이션으로 나타난다.
투자와 소비 자체가 위축되기 때문에 수요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정도로 늘어날 수 없다.
수요가 인플레이션을 만들지 못하면 디플레이션이 찾아온다.
일부에서는 코로나 지원 자금 증가로 인한 화폐 공급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인플레이션 유발 인자는 돈의 양이 아니다.
그러면 속도라는 소린데.
“화폐유통속도가 얼마지?”
【1.1226입니다.】
사상 최저 수준이네.
1997년 2.2였던 속도가 현재 1.1226으로 떨어졌다.
돈이 시중에 막대한 양이 풀렸는데도 돈이 돌지 않는다.
이 정도면 대공황이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보다 느리다.
문제는 화폐유통속도가 더욱 느려지는 데 있다.
과다 부채에 화폐유통속도 저하라…….
그럼, 부채를 상쇄시키는 저축은?
“순국가저축은 얼마가 늘었지?”
【2.3% 줄어들었습니다.】
빌어먹을.
저축도 늘지 않았다.
저축은 경제와 물리적 투자의 원천인데 부채는 저축을 감소시키고 수요 증가를 막았다.
저축이 줄어들면 투자가 줄고 지속적인 성장을 가로막는다.
투자와 소비가 늘 수 없으니 화폐유통속도가 빨라질 수 없다.
총체적 난국이네.
반도체 등 특정 부문의 투자 증가만으론 한계가 있다.
지금과 같은 과도한 부채 상황에서 화폐유통속도 저하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일시적 인플레이션으로 금방 끝나지 않을까?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는 기간은 매우 제한적이고 부채가 지나치게 늘수록 화폐유통속도는 떨어지고 수요는 줄어든다.
제길 디플레이션이네.
특정 부문의 일시적 인플레이션은 가능하지만, 지속적이며 광범위한 인플레이션은 불가능하다.
인플레이션에는 돈이란 연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무차별로 공급되는 돈은 분명 인플레이션의 한 요소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공급과 수요다.
공급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물가가 상당 기간 큰 폭으로 오를 수 있으니 공급의 회복은 언젠간 이루어진다.
문을 닫았던 생산자들이 공장 가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다.
반도체 등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부문에 대한 투자가 본격화하고 있다.
공급은 빠르게 회복할 것이다.
문제는 수요의 회복이다.
코로나로 억눌렸던 소비가 일시에 분출할 수 있다.
소비가 지속할지는 알 수 없지만.
길게 보면 부채를 짊어진 경제의 수요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도 수요의 감소의 원인이다.
죽음을 이런 데 이야기하냐고 이야기할지도 모르지만 솔직하게 모든 경우를 따져봐야 한다.
미국에서만 61만 명 넘게 사망했다.
세계적으로 374만 명이 죽었다.
경제 주체 중 근본은 인간이다.
인간은 중요한 생산자이자 소비자다.
그런데 이 중요한 인간이 코로나로 인해 죽었다.
수요 감소는 불을 보듯 명확해졌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압력은 분명 전 세계로 퍼져나가야 하는데, 국가별 편차가 있지만, 주요 20개국에서도 물가상승률이 2% 이하인 나라가 많다.
일본, 스위스,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의 물가상승률이 2% 이하다.
이건 디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을 세계적 현상이라고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는데, 선진국에선 백신 접종률 증가 추세가 주춤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접종을 거부하고 있고 12살 이하 어린이도 접종 사각지대에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코로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도와 브라질 등 신흥국은 여전히 코로나의 수렁 속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요 폭발로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지난 40년은 디스인플레이션 시대였다.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 압력이 더 강한 세월이었다.
코로나가 점점 사라진다면 이런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을까?
코로나로 인한 공급 혼란에서 유발된 인플레이션 기간은 생각보다 짧을 수 있다.
현재 지속되는 인플레이션 압력은 단기에 그칠 것이다.
중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약화하면서 디플레이션 압력이 강화될 것이다.
이것이 펠그리니의 판단이었다.
현재 기업들은 회복 국면의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코로나 때의 몇 배에 이르는 주문을 했다.
반도체 등 특정 부문의 투자도 봇물이 터졌다.
하지만 과잉 투자는 심각한 재고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
디플레이션 원인의 하나가 과잉 투자, 과다 재고다.
여전히 세계는 디플레이션 압력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보스에게 알려야겠는데.
펠그리니는 핸드폰을 들었다.
띠리리링.
어느 때보다 벨소리가 우울한 장송곡 같이 들렸다.
-펠그리니 무슨 일이야.
“보스, 디플레이션이 올 것 같습니다.”
-그야 뻔한 일인데 왜?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대비를 한단 말이야? 전 세계가 동시에 겪는 고통인데. 글로벌을 외칠 때부터 예상한 결과 아냐?
“그럼 앉아서 당하려고요?”
-우린 지금 시설 투자에 돈을 왕창 쏟아부었잖아. 인공지능과 로봇이라는 새로운 시장도 개척했고. 디플레이션은 우리 이야기가 아니야.
헐, 지금까지 그 미친 짓을 한 게 디플레이션을 알고 한 짓이라는 거야?
전쟁을 불사하면서?
“그럼 우린 이제 무얼 합니까?”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하면 되지. 뭐 특별한 걸 할 게 없어. 지금 우리 영역인 북한과 중국, 아프리카, 남미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면 돼.
“가시적인 성과가 뭡니까?”
-잘 먹고 잘사는 거지. 그러면 알아서 찾아올 거야.
“누가요?”
-누구긴. 자기 나라도 우리처럼 잘 먹고 잘살게 해 달라고 할 사람들이지.
“그럼 현재 진행 중인 글로벌에서 벗어나려는 겁니까?”
-그놈의 글로벌로 인해 겪은 고통을 아직도 모른단 말야. 그 사슬을 끊어야 하지 않겠어? 미국이 흔들리면 전 세계가 흔들리는 이 악순환의 고리 말이야. 뭐, 우리도 월가가 뿌리지만 월가의 약점을 너무 잘 알잖아. 자급자족이 안 되는 나라는 일단 글렀다고 봐야 해. 우선은 최소한 자기 먹을 거는 자기가 생산할 수 있어야 하잖아.
보스가 이루는 세상이 이건가?
“그럼 곡물 기업이 먼저 무너질 텐데요?”
-천만에. 유통은 곡물 기업은 새로운 유통 기업으로 거듭날 거야. 곡물보다는 다른 자원을 실어 날라야 하니까. 카킬만큼 전 세계에 창고를 많이 가진 기업은 없잖아. 생산과 유통은 엄연히 다른 분야고.
“그럼, 우린 뭐를 준비해야 합니까? 진짜 구경만 하고 있어요?”
-그렇다니까. 이제 투자은행에서 한 단계 올라서서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국가를 팔아야지.
그래, 이제 국가라는 상품을 팔 때가 되었다.
싹 뜯어고쳐 줄 테니까 다 가져와.
여기 또 딴지를 거는 놈들이 분명 있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