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9화 자, 돈들 쓰세요. 돈(9)
“팜봇 공장에서 생산하면 되잖아요.”
“그게 거기서도 생산이 되는 거야?”
“그럼요. ‘블랙’이 설비 시설 설계만 약간 추가하면 팜봇도 만들고 ‘티처’도 만들 수 있죠.”
“괜한 걱정을 했네.”
“할아버지, 걱정하셨어요?”
“당연하지. 우리 진이 만든 작품인데 안 팔리면 어쩌나 며칠 밥맛도 없었다.”
임병달은 커다란 짐 덩이를 내려놓고 시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 근데 직원들 재택근무는 잘 되고 있나요?”
“맞아, 그거 아주 물건이라고 칭찬이 대단하다. 집에서 마치 회사에서 일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 얼마나 대단한지 대화도 주고받을 수 있단다. 자기가 찾아가도 싶은 기업도 똑같이 보여주고.”
“잘됐네요. 이제 코로나 때문에 애널리스트가 리포트 못 만드는 경우는 없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나도 하루에 한 번씩 사용하는데 머리도 맑아지고 좋아.”
“하루에 한 번씩 하신다고요? 그걸로 업무를 보세요?”
흠, 흠.
“왜 나는 하면 안 되냐?”
“아뇨, 자주 하면 좋죠.”
매일 평소에 불만 있는 인물 불러내서 호통치는 맛에 하는 거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
삐.
이때, 내선이 울렸다.
“무슨 일이야?”
“청와대에서 비서실장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재준이 임병달을 쳐다봤다.
“약속이 있으셨어요?”
“아니, 요즘 내가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종종 누군가 찾아온다. 희한하게 말이야.”
“그래요? 비서실에 스파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요?”
“너라면 모를까 나 같은 뒷방 노인에게 무슨 스파이.”
좀 알아봐야겠는데.
벌컥, 문이 열리고 비서실장이 들어오며 꾸벅 90도로 인사를 했다.
“또 뵙습니다.”
비서실장이 재준을 보고 눈빛이 반짝였다.
“일단 앉으세요.”
임병달이 상석에 앉자 비서실장이 재준 맞은편에 앉았다.
재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먼저 회장님이 계신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 그거요. 요즘 저희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요즘 회장님이 출근하시고 10시에 출타하지 않으시면 하루 종일 회사에 계신다는…….”
재준이 임병달을 봤다.
하루 한 번이 하루 종일이었어요?
흠, 흠.
임병달이 헛기침을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자.
네.
재준은 다시 비서실장으로 돌아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네, 대통령님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왔습니다.”
“‘티처’가 승인이 나지 못하는군요.”
“아, 네. 알고 계셨습니까?”
“그냥 짐작했어요. 승인이 났다면 언론을 통해 발표하든가 나한테 직접 전화를 했겠죠. ‘사’자 돌림의 학부모들이 힘이 대단하긴 하나 보네요.”
“그것도 알고 계십니까?”
“그거야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닙니까? 대부분 국민도 아는 이야기를. 그래, 그 사람들의 주장이 뭡니까?”
“아이들은 너무 공부에 매달려선 안 된다고 합니다. 세상은 다양한 경험으로 인격을 높여야 한다고. ‘티처’가 중독성이 강하다고 정부에 압박을 넣었습니다.”
“네? 이야, 정말 재미있는 분들이네.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체험하고 자기 자식이 올라가게 바닥 좀 깔아 달라?”
“하하, 뭐, 그런 셈입니다.”
근데 이상하네.
왜 거절을 못 하는 거지?
주변에 얽힌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가?
“그래도 그렇지 대통령이 큰소리 한번 못 치세요?”
“그게, 대통령님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시고 주변 인맥 중 입시 준비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에구, 그럼 그렇지.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네.
“그건 그렇다 치고. 대통령님이 전달하려는 의사는 뭡니까?”
“저, 그게. 재단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재단을 통해 불우하지만, 열정이 있는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하십니다.”
“재단이요? 누가 만들었는데요?”
“그야 대통령님이죠.”
와, 이 사람 봐라.
그래도 의지는 있다. 이건가?
“그러니까, 퇴임하고 재단을 운영하면서 인재 양성을 하고 싶다. 뭐 이런 거죠?”
“아, 네. 맞습니다.”
직접 인재를 양성할 목적이야 뻔하지.
“지금 기득권들 모르게,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에 있는 아이들을 ‘티처’로 키워서 나중에 자신의 세력을 만들겠다? 맞아요?”
“네?”
“괜찮아요. 나쁜 생각은 아니네요. 그럼 돈은 누가 댑니까? 인재 한두 명 키우는 것 같지는 않고, 최소한 몇백 명은 키워야 할 텐데.”
“그건…….”
“뭐, 말 안 해도 돼요. 알아내는 건 쉬우니까. 재단 이름이 뭡니까? 그것까지 비밀로 하진 않을 거잖아요. 나를 한배에 태우려면.”
“그렇지요. 재단 이름은 사숙재단입니다.”
“사숙(私淑). 스승 없이 혼자 본받는다. 좋은 뜻이네요.”
“아, 네 감사합니다.”
“뭐, 감사까지야.”
재준은 핸드폰을 꺼내 블랙을 호출했다.
“블랙, 사숙재단에 가장 많은 돈을 댄 기업이 어디야?”
【SS전자입니다.】
툭.
비서실장은 입을 턱 벌리고 다물질 못했다.
이 사람 침 떨어지겠네.
“내가 사는 세계가 당신들하고 많이 달라요.”
“아, 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렇죠? 남의 계좌를 맘대로 들여다보는 거, 이건 엄연히 불법인데.”
“아, 아닙니다. 아니…….”
“불법 맞아요. 그래서 보여준 거예요. 난 이런 사람이다. 까불지 마라, 뭐 이런 거. 어쨌든 ‘티처’를 재단에 공급해 줄게요. 그렇다고 다른 곳보다 싸게 줄 수는 없어요. 공급 가격은 정해져 있으니까.”
“당연하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재준이 비서실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제 한국은 ‘티처’를 공급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어요.”
끙.
비서실장의 신음이 들렸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은 듯.
“근데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아는 한 선진국은 이런 진통을 다 겪을 테니까.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닐 거예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럼 다 된 겁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비서실장은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쩝.
임병달은 끝내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역시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는구나.”
“쉽지는 않겠죠. 저도 못 하는데요.”
“원, 녀석하고는.”
임병달은 재준을 보고 실없이 웃었다.
“하지만 기득권이 없는 곳이 있으니 다행이죠.”
“그런 곳이 어딨어?”
“돈이 없는 곳에는 기득권도 없습니다.”
“돈이 없는 곳? 혹시 투마로우 벨트를 말하는 거냐?”
“네.”
“정말이냐? 거기다 ‘티처’를 뿌릴 거야?”
“‘티처’로 만들어진 세상이 어떤지 보여 줄 거예요. 오래 걸리지도 않아요. 1년이면 후회할 겁니다.”
***
[한국 정부가 ‘티처’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단, 교사 없는 학교나 교수 없는 대학은 자율에 맡기고 정식 인가는 승인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에 다수의 대안 학교에서 개별로 재진버츄얼에 ‘티처’ 공급을 요구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정부의 결정에 티사모는 반대 시위에 돌입했습니다. 한동안 광화문 광장을 점거하고 시위를 풀지 않을 전망입니다.]
***
진코퍼레이션.
“진.”
재준은 들어서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빠 오셨어요?”
진은 ‘티처’를 벗으며 헬멧을 흔들었다.
“소식은 들었지?”
“네, 한바탕 시끄럽게 만들었으니 주문이 쏟아지겠네요.”
“넌 어디가 제일 맘에 드니.”
“그야 아프리카죠.”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
“선물이요?”
“사람인데, 5분 뒤에 올라오라고 했어.”
“엘론 버스크군요.”
헉. 귀신같은 녀석.
“어떻게 알았니?”
“아프리카에 ‘티처’를 공급하면 교육을 받던 20대 초반의 사람들이 1년 안에 쓸 만한 인재가 되겠죠. 그럼 이들에게 배운 걸 써먹을 기회를 줘야 하잖아요? 댐이나 도로 같은 단순한 노동 집약적 공사로는 이들의 지적 허기를 채우지 못할 거고, 그럼 최첨단 시설을 지어야 할 텐데. 대규모 최첨단 시설이면 자율주행 도시가 딱 맞죠.”
이놈이, 난 일주일이나 고생고생해서 생각해 낸 걸.
1분도 안 돼서.
띠링.
재준이 자신에게 실망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벨이 울렸다.
문이 열리고 훤칠한 키에 얼굴에 자신감이 덕지덕지 붙은 인물이 등장했다.
“임재준, 진. 오랜만입니다.”
“어서 오세요, 엘론 아저씨.”
엘론이 재준보다는 진에게 먼저 다가가 안아 주었다.
어째 둘이 친한 사이 같지.
어색함이 전혀 없네.
“서로 아는 사이야?”
재준의 말에 엘론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요.”
“어떻게?”
“진코퍼레이션이 전고체 배터리의 중요한 특허 몇 개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자주 와서 자문을 구했죠.”
“진에게?”
“그리고 콰미, 콰미는 어딨어?”
“이제 곧 올 거예요.”
띵.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론.”
“콰미.”
콰미라는 흑인 아이가 엘론을 향해 달려갔다.
엘론이 콰미를 번쩍 들어 볼을 비볐다.
재준은 여전히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리둥절한 재준을 보고 진이 큭큭거리고 웃었다.
“콰미는 코트디부아르의 부호의 아들이에요. 유전자 수선으로 태어난 아이고요. 신소재 공학을 좋아해요. 전고체 배터리 특허를 가지고 있어서 엘론이랑 아주 친해요.”
재준은 콰미를 가만히 살폈다.
아프리카 아이?
“진, 근데 이 아이가 왜 여기에 있니?”
“유전자 수선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전부 투마로우 시티에 있어요.”
“뭐?”
“이 빌딩 전체가 우리들의 연구실이에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네.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아니, 부모들이 전부 허락을 한 거야?”
“히히, 기욤 아저씨가 부모들에게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 항체가 생성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빨리 투마로우 시티로 보내라고 경고했어요. 그래서 다 모였죠.”
“여기서 뭐 해?”
“연구도 하고 놀기도 해요. 아, 이번에 ‘티처’에 관한 영상 U튜브에 올렸는데 재밌었어요.”
긁적긁적.
재준의 손이 저절로 자신의 머리를 긁었다.
“엘론, 당신도 알고 있었어요?”
“네, 저야 이곳에 자주 오니까요. 레이하고 맥주도 곧잘 마셔요. 임재준 당신만 너무 바쁜 거죠. 우린 서로 자주 어울려요.”
아니, 나보다 더 바쁜 게 엘론 아닌가?
전기차 만들랴, 로켓 쏘아 올리랴, 남의 일에 간섭질 하랴.
“엘론, 안 바빠요?”
“이제 하나도 안 바쁜데요. 전기차도 잘 나오겠다. 로켓도 잘 쏘아 올리겠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이제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중입니다.”
“그래요?”
난 왜 안 바쁜 사람만 보면 속이 뒤틀리지?
“그럼 나하고 일 하나 합시다.”
“무슨 일이요?”
“아프리카에 자율주행 도시를 만듭시다.”
“괜찮네요. 이제 시스템이 정착되어서 직원만 좀 더 뽑으면 가능합니다. 아, 진에게 들었는데. 아프리카에 ‘티처’를 공급한다면서요? 그러면 그 지역에서 인재를 뽑으면 되겠네요. 그 지역도 잘 알겠고, 일도 잘할 거고.”
“그럼 엘론은요?”
“저야 감독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아프리카에 골프장이 그렇게 좋다던데.”
흠.
이 정도로도 안 된다 이거지.
더욱 빡센 거로.
“하하하, 그렇군요. 근데 골프 칠 시간에 병원을 세우는 건 어떨까요?”
“병원이요?”
“아프리카에 자율주행 도시를 지으면서 새로운 개념의 병원을 지읍시다.”
“새로운 개념의 병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