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1화 내 패는 내가 만드는 거야(8)
임병달과 재준은 진의 손바닥만 쳐다볼 뿐 더는 부연 설명을 하지 못했다.
해봤자 맥락 없는 설명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임병달이 재준을 보고 말했다.
“이걸 대통령이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못 하죠. 할 수 있었으면 벌써 중립을 지키겠다고 큰소리쳤을 겁니다.”
과거 사드 배치 때 중국의 제재에 ‘침묵은 나의 힘’으로 일관하던 한국인데.
“그럼 네가 나설 거냐?”
“글쎄요. 나서긴 할 건데, 그 전에 자신의 처지를 알게 해 줘야죠.”
“너 또 사람 신경 긁어 놓으려고 그러지.”
“아뇨. 절대 아닙니다.”
거짓말하고 있네.
재준의 말에 좀 떨어져서 두 눈을 감고 생각 중이던 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재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쟤는 공포영화에 나오면 딱일 것 같아.
이때.
삐.
드디어 왔다.
-대통령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모시세요.”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리고 한국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비서실장과 함께 들어섰다.
무척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먼저 재준을 무시하고 임병달에게 다가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임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대통령님.”
대통령은 임병달과 악수한 다음 재준을 봤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대통령인 거 알아요. 뭐 저도 아실 거고 서로 통성명은 안 해도 될 거 같네요.”
대뜸 치고 들어오는 재준의 말에 대통령보다 옆에 있는 비서실장이 움찔거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재준이 비서실장을 봤다.
“왜요? 뭐 할 말 있어요?”
끙.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눈치를 흘깃 보고 정중하게 말했다.
“예를 지키시지요.”
“예의요?”
“네, 대통령님입니다.”
“그런데요? 나랑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예의를 논하게.”
“대한민국 국민이면.”
“뭐요. 대한민국 국민이면 당하고 살아야 한다 그 말입니까?”
자, 자.
임병달이 나서서 재준을 말렸다.
“대통령님 앉으시죠. 재준아, 너도 앉아라.”
“네. 회장님.”
대통령은 임병달한테는 깍듯이 대하는 재준을 봤다.
할아버지라고 하더니, 천하의 임재준도 임병달한테는 꼼짝을 못 하네.
분위기를 다스릴 겸 임병달이 대통령에게 물었다.
“어쩐 일로 저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흠, 흠.
임병달의 말에 대통령이 헛기침으로 응수했다.
알면서 왜 묻냐는 듯.
자신의 입으로 부탁을 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듯.
네가 먼저 말하면 좋겠다는 듯.
풋.
재준이 경멸과 조소를 담아 피식거렸다.
다시 비서실장의 눈빛이 재준을 쏘아보았다.
재준은 잠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할 말 없으시면 가시죠. 피차 바쁜 사람들인데.”
흠, 흠.
결국, 대통령이 재준에게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투마로우는 매사에 일을 바쁘게 처리하나 봅니다.”
“그런 편입니다. 하도 간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우리 초면인데 서로 알아갈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초면이요? 아닌 것 같은데요.”
재준의 말에 대통령이 의아한 듯 쳐다봤다.
본적이 있던가?
“아, 초면이라면 초면이네요. 현재증권에 정치권이 하도 찝쩍거려서 난 뭐 정치인은 다 같은 족속으로 보거든요.”
임재준 씨.
비서실장이 으르렁거렸다.
그에 재준이 비서실장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넌, 그 입을 닫아.”
“뭐요?”
“네가 책임질 거 아니면 나불거리지 말라고. 네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을 책임질 수 있어?”
“…….”
“넌 할 수 없잖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 거야.”
으.
비서실장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재무부나 금감원에 하도 어이없는 인간들이 많아서 잘 아는데. 책임 못 질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게 좋아. 비서실장 좋아하네. 해 봐야 4년도 책임지지 못하는 자리에 앉은 주제에. 그래도 좋다고 4년 끝나면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평생 연금 받으며 살잖아. 그 정도로만 살아. 함부로 나대지 말고.”
재준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보다 배는 심하게 휘둘렀다.
이건 문제 해결 후에 닥칠 후폭풍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토사구팽을 즐기는 인간들이 바로 정치인들 아닌가.
비서실장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한심한 놈.
역시 책임지기는 싫겠지.
재준은 대통령을 보며 빙글 웃었다.
“자, 이제 말씀해 보세요. 정치라는 허울은 벗어 던져야 합니다. 괜히 어설프게 말씀하시면 전 아무것도 안 할 거니까요. 아니, 오히려 미국과 중국이 한국을 어떻게 찢어발기면 좋을지 조언도 서슴지 않을 거예요.”
“너무 폭력적이군요.”
“대통령님. 제가 그래도 지구라는 땅덩어리의 절반 가까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고 오셨어야지요. 언론에서 지껄이는 말 몇 마디로 저를 안다고 보셨다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 점은 저희가 실수했습니다.”
“저희가 아니라 대통령님입니다. 뭉뚱그리지 마세요. 책임은 오로지 혼자 지는 거예요.”
후.
대통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임재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희망으로 도움을 청하러 왔는데.
대통령이란 직위가 이 사람 앞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제 실수입니다.”
“됐네요. 이제 아셨으니. 말씀하세요.”
후.
“미국과 중국 무역 분쟁 중입니다. 한국도 경제제재를 당할 수 있습니다. 중립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중립이요?”
재준의 표정에 ‘내가 대통령을 왜 만났을까’라는 후회가 드러났다.
“그러니까 박쥐처럼 이리 붙었다가 저리 붙었다 하시려고요?”
“박쥐라니요?”
“대통령님, 중립이 뭔지 아시고 말씀하신 거예요? 중립이란 건 힘이 있을 때 하는 거예요. 양쪽에서 어찌하지 못하는 힘이요. 그렇지 않으면 조금 불리하다 싶은 순간 전부 중립을 선언했겠지요. 근데 그게 됐냐고요. 지금 대통령님이 말씀하신 건 중립이 아니라 박쥐예요. 박쥐.”
으.
대통령은 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니,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왜 대통령이 그런 걸 걱정하시는 거죠?”
“그런 거라뇨?”
“경제제재 말이에요. 그걸 왜 본인이 걱정하냐고요.”
“전 이 나라 대통령이니까 당연히 대처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해가 안 되네. 대통령님이 경제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1차, 2차, 3차, 4차, 5차 중 어느 분야에 자신 있으십니까? 농사는 지을 줄 아세요? 아니면 자동차 정비 자격증이라도 있나요? 기업 분석은 해보셨고요? 컴퓨터 조립은 할 줄 아세요? 반도체 공정은 아세요? 5나노 반도체가 어디에 쓰이는 줄 아세요? 5G 사물인터넷이 어떻게 하면 실현되는지 이해하세요?”
“알아야 하는 겁니까?”
“아니, 알 필요 없지요.”
“그런데 왜…….”
“알지 못하니까 아는 사람한테 맡기고 뒤로 물러나세요. 왜 모르면서 나서려고 할까. 아니, 중국이 한한령 내렸을 때 정부는 나 몰라라 하지 않았어요? 그거 다 기획사가 전 세계 돌면서 한류 만든 거잖아요. 음악이든 드라마든. 그리고 SS전자가 반도체 투자할 때 정부가 보태준 거 있나요? 없잖아요. 그럼, 반도체 관련 대학이라도 세워서 정부 차원에서 도와주든가. 지금 한국에 반도체 관련 학문을 배울 수 있는 대학이 몇 개인 줄 아세요? 아니, 대학교수가 몇 명인 줄은 아세요? 조선, 철강, 심지어 서비스까지 다 기업인들이 한 거 아닌가요?”
“신자유주의를 말하는 겁니까?”
“신자유주의요?”
여기 물.
진이 무덤덤하게 재준에게 물을 건넸다.
벌컥벌컥.
“경제제재를 기업인들한테 맡기라는데 신자유주의가 왜 나오는데요? 그냥 모른 척하세요. 이번에 도날드와 시앙핑이 오면 만나서 허허허 웃어 주기만 하면 될 거 같은데. 약속 같은 거 하지 마시고. 그런 거 정치인들이 잘하잖아요. 두리뭉실 깔고 뭉개는 거. 그런 거 국내 기업에만 하지 마시고, 미국이나 중국한테도 하세요.”
으.
대통령은 현기증을 느끼고 시야가 뿌옇게 변하는 것 같았다.
재준은 피식 웃었다.
“미국이건 중국이건 이거 다 쇼예요. 아, 물론 경제제재를 가하면 한동안 힘들어지는 기업은 있겠죠. 어쩌면 파산하는 곳도 있을 거고요. 그런 곳 좀 도와주시면 되겠네. 그리고 글로벌이라면서요. 한 곳이 무너지면 다른 곳도 무너진단 말이죠. 전 세계는 그걸 원하지 않아요. 서서히 알게 모르게 도와줄 거예요.”
“정말입니까?”
“정말 모르는 겁니까?”
도대체 그 자리에 왜 앉아 있는 건데?
“전 세계에 투자되어있는 국채가 얼만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겠어요? 투마로우만해도 한국 예산의 백 배는 될 겁니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망할 나라는 없어요.”
“그럼 우린, 아니 저는 그저 도날드와 시앙핑을 만나기만 하란 말입니까? 확답도 주지 않고.”
“대통령님, 그들도 확답을 원하지 않아요. 그냥 허세를 부리는 거예요. 거기에 살짝 응해주기만 하면 되죠. 아시겠어요?”
진짜일까?
대통령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일어서려고 했다.
더 들을 말은 없었다.
아마 지금까지 한 말은 투마로우가 나서니, 괜히 방해나 하지 말라는 경고일 것이다.
“비서실장, 갑시…….”
아니, 이 사람 완전히 맛이 같네.
지금까지 옆에서 재준의 말을 듣고 있던 비서실장의 눈에 그새 재준을 향한 초롱초롱한 신뢰가 생겼다.
“비서실장, 갑시다.”
아, 예.
대통령의 호통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그리고 대통령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며 자꾸 뒤를 돌아 재준을 바라보았다.
저 인간, 장난 아니구나.
와, 하마터면 울 뻔했네.
***
인천국제공항.
두 대의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했다.
한 대는 미국 대통령의 전용기 에어포스 원.
한 대는 중국 주석의 전세기 에어 차이나.
여담으로 대통령 전용기를 운영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40개국밖에 없다.
중국도 주석 전용기가 없고 전세기를 운영한다.
그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인민을 위한다고 한다.
문제는 도착한 비행기가 아니다.
국빈을 맞이하는 한국 대통령이 문제지.
한국 대통령은 두 대의 비행기 모두에 붉은 카펫을 깔고 중앙에 서서 도날드와 시앙핑을 맞이했다.
도날드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더니 손을 흔들고 내려왔다.
곧이어 시앙핑도 모습을 드러내고 주변을 한 번 슥 보고는 내려왔다.
“어서 오시죠.”
대통령의 인사에 도날드가 다가오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주 애매하게.
원래는 악수를 해야 하는데 누굴 먼저 악수할 수가 없으니 도날드와 시앙핑 중간에 대충 인사를 했다.
서양과 동양을 동시에 접대해야 하니 한국 전통을 따른다는 핑계는 벌써 언론에 흘렸다.
“반갑습니다.”
도날드가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이건 누가 걸음이 빨랐느냐의 문제니 대통령도 악수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이어 시앙핑도 악수를 했다.
미국에 이은 악수는 자신의 느려터진 육체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누구와 먼저 대화를 할까는 걱정하지 않았다.
바로.
“임재준이 기다립니다. 모두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같이 가시죠.”
임재준 핑계를 댔다.
“아, 임재준, 거, 사람 그러지 말라니까. 그러네.”
도날드가 임재준과의 친분을 드러내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우린 이미 선약이 되어 있었는데. 저쪽은 불청객이 되겠군요.”
시앙핑이 하지도 않는 약속을 들먹이며 신경전을 벌였다.
흥.
흥.
서로 콧바람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각각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올라타고 재준이 있는 한정식집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