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0화 내 패는 내가 만드는 거야(7)
전 세계가 난리가 났다.
재준의 예측이 맞았다.
중국의 위안화 절하의 파장이 급격하게 퍼져 나갔다.
여기에 미국이 무역 분쟁으로 맞불을 놓았으니 가속도까지 붙었다.
1980년대 후반 블랙 먼데이,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외환위기, 2000년대 후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2010년대 후반에는 신흥국 금융 상품 시장이 몰락할 징조를 보였다.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에 이어 이란, 터키 등 중동 국가가 잇달아 외국자본 이탈에 시달리면서 금융위기 조짐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금리 차와 환차익을 겨냥해 이동되는 캐리 자금도 네거티브 트레이드 여건이 형성돼 달러계 자금을 중심으로 외국자본 이탈이 가시화되었다.
신흥국의 미숙한 정책 대응도 문제였다.
외국자본 이탈을 수반한 달러 부채 상환에 가장 적절한 대응책은 외환 보유 확충과 외국자본 조달 능력을 키우는 일이었는데, 금융위기 조짐에 시달리는 대부분의 신흥국은 금리 인상으로 대처했다.
역시 신호탄은 가장 많은 금융위기 경험국 아르헨티나.
자그마치 기준금리를 60%까지 올렸다.
미친 거지.
근본적인 해결책을 외면한 금리 인상은 실물 경기 침체와 추가 외국자본 이탈이란 ‘악순환 고리’를 형성시켰다.
신흥국은 매년 4,000억 달러 이상 달러 부채 만기가 돌아올 것으로 추정되었다.
올해 세 차례 금리를 올린 연준이 올해 마지막 회의에서 금리를 올린 후 내년에도 세 차례 정도 금리를 더 인상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신흥국은 외화 사정이 더 악화되어 비명을 질러댔다.
아르헨티나, 터키, 파키스탄, 이란,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인도네시아, 멕시코, 필리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 재준이 예측한 나라들이 전부 금융위기에 처했다.
여기서 약간의 변수가 등장했다.
중남미 국가는 외환위기로 학습 효과가 있고 미국과의 관계도 괜찮아서 IMF의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는 이란이나,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에 과도하게 참여하는 파키스탄 같은 국가는 IMF에 구제금융을 받을 수 없었다.
세계가 은근히 미국과 중국으로 갈라섰다.
그리고 그 격전지로 한국이 선택되었다.
큭큭큭.
왜 자꾸 웃음이 나오지.
***
청와대.
“아니, 왜 굳이 온다는 겁니까?”
대통령은 비서실장의 말에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팠다.
시앙핑이 도날드가 오는 날짜에 맞춰서 한국에 입국하겠다고 통보했다.
“안 된다고.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도. 자기 발로 관광하러 가겠다는데 무슨 문제 있냐고 막무가내입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우리가 딱 그 꼴이네요. 도날드 대통령에게 양해를 구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미 시도했습니다. 절대 자신들도 양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국빈 방문이고 중국은 관광인데 어떻게 자신들이 양보할 수 있냐고.”
“그렇겠네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양보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중국이 물러날 생각이었으면 한국으로 올 생각도 안 했겠지.
후.
대통령의 근심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내부를 적셨다.
가뜩이나 한국은 금융위기라서 양국의 눈치를 보는 입장인데 이제 남의 집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서 싸우겠다는 심보는 뭐란 말인가.
“저, 대통령님.”
“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대통령이 고개를 들었다.
“임재준이 지금 한국에 있는데 한번 부탁을 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임재준이 한국에 있습니까?”
“네, 도날드 대통령이 현재증권을 방문한다고 해서 오늘쯤 도착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래요? 임재준은 도날드와 시앙핑 둘 다 친하죠?”
“친한 정도가 아니죠. 둘 다 임재준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임재준이라면 사고 없이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언제쯤 만날 수 있는지 확인 좀 해보세요.”
“알겠습니다.”
대통령은 일말의 희망에 모든 스케줄을 취소했다.
***
현재증권.
“할아버지.”
재준은 오랜만에 할아버지 이름을 불러봤는데…….
와, 이거, 어떻게, 나도 모르게 이럴 수가 있지?
“재준이 왔느냐?”
임병달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밝았다.
마치 재준이 빙의하고 처음 대면하던 그때 느꼈던 개선장군의 모습이었다.
젊어졌다.
할아버지가 젊어졌다.
저 피부 탱글탱글한 거 봐.
이렇게 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할아버지, 북한에 갔다 왔어요?”
흠, 흠.
임병달은 헛기침을 하며 재준 옆에 있는 7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아이를 봤다.
“이 아이는 누구냐?”
“할아버지, 북한에 갔다 왔냐고요?”
“거 참 똑똑하게 생겼네. 네 이름이 뭐냐?”
“할아버지, 임모탈에 갔었냐고요?”
“나이는 몇이니?”
“할아버지, 수술받았어요?”
이놈이 시끄럽게 자꾸.
임병달이 고개를 휙 돌려 재준을 노려봤다.
“갔다 왔다 왜?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야. 연락이 왔다. 연락이.”
“와, 남들은 돈을 싸 짊어지고 가도 번호표 받고 기다리는데. 할아버지는 그냥 프리패스로 새치기를.”
“새치기 아니다. 난 분명 거절했다.”
“정말 거절했다고요?”
“그, 그, 그래. 확실히 거절했다.”
재준이 핸드폰을 들면서 눈매를 가늘게 만들었다.
“확인해 봅니다.”
“맘, 맘대로 해 봐. 난 분명히 거절했어.”
“몇 번이요.”
“아니 그 몇 번인 게 뭐가 중요해. 거절한 게 중요한 거지.”
“그래요?”
재준은 영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어째 자신의 기회를 누군가 강탈해간 느낌이었다.
이런 건 내가 직접 해야 할아버지한테 인정을 받는 건데.
“그나저나 이 아이는 누구냐?”
임병달이 한쪽 눈을 치켜뜨며 재준을 바라보았다.
역시 재준은 임병달의 의심을 여지없이 만족시켰다.
“제 아들이요.”
“뭐? 네 아들? 결혼도 안 한 네가 아들을?”
쩝.
재준이 쓰게 웃었다.
“할아버지는 신문도 안 보세요?”
“봤는데.”
“신문에 실린 제 기사를 보신 거 맞아요?”
“네 기사야 빠짐없이 스크랩까지…….”
말을 하다말고 다시 아이를 쳐다보던 임병달이 재준을 보았다.
“그 아이냐?”
임병달이 재준에게 질문하고 시선은 진을 향했다.
“네, 제가 아빠의 유전자 수선으로 만들어진 수정란에서 태어난 아이예요.”
무덤덤한 말투였다.
놀란 건 임병달뿐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3년인가 4년 전 일이다만. 얘는 7살? 8살은 돼 보이는 것 같은데?”
이번엔 재준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방금 말했잖아요. 유전자 수선이라고. 남들과 많이 달라요. 아니 전혀 달라요. 비슷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 공부는 잘하니?”
임병달은 진을 보고 지갑에서 오만 원을 꺼내 주었다.
진은 덥석 받았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까지 했다.
“그래, 맛있는 거 사 먹어라.”
“네.”
진은 임병달을 향해 싱글 웃고는 재준을 봤다.
“이제 99조 4,999억 9천 9백 9십 5만 원만 남았어요.”
“뭐가?”
“모아야 할 돈이요.”
“너 1,000억 달러 필요하다며. 벌써 5,000억 원을 번 거야?”
“돈은 버는 게 아니라 모으는 거예요. 아빠도 그렇잖아요. 언제 돈 번 적이나 있으세요?”
“그렇지. 돈을 버는 게 아니지. 모아야지.”
빼앗는 걸 모은다는 표현으로 중화시켰다.
가만, 가만.
임병달이 중간에 손을 들었다.
“내가 5만 원을 준 게 잘못된 행동이었냐?”
“아닙니다. 할아버지. 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헤헤.”
이놈아, 영혼을 담아서 웃어.
여기서 지갑을 다시 열 수도 없고 참 내.
뭐라도 사줄까?
“밥은 먹었냐?”
“아뇨, 한국 음식은 먹은 적이 없어요. 12첩 반상 차림을 제대로 구현한 집이 아직 남아 있을까요?”
“12첩 반상?”
“네. 수라, 죽, 응이, 면, 만두류와 탕, 조치, 찜, 선, 전골, 볶음, 구이, 적, 전유화, 편육, 숙채, 생채류, 그리고 겨자채, 구절판, 전복초, 홍합초, 장라조리개, 육포, 족편, 육회, 어회, 숙회, 쌈, 어채, 김치류와 장류. 각색편, 각색단자, 두텁떡, 화전, 인절미, 약식, 주악, 각색정과, 다식, 과편, 약과, 강정, 숙인, 밤, 대추, 율란, 조란, 강란인 병과류. 청면, 화면, 오미자화채, 식혜, 수정과, 배숙, 수단의 화채류를 제대로 먹고 싶거든요.”
“12첩이라며.”
재준이 하도 기가 막혀 진에게 투덜거렸다.
“제가 말한 것 중에 12가지를 구현하면 12첩 반상이잖아요. 수라상을 원하는 건 아니에요.”
“아니, 근데 이런 건 도대체 뭘 보고 외운 거야?”
“동영상이요.”
“책은 안 읽고?”
“책은 너무 느려요. 동영상이 빨라요. 외우기도 쉽고.”
“그래. 너 똑똑하다.”
“똑똑하다의 기준은 창의성과 관련이 있는 건데. 암기는 뇌의 뉴런 개수와 관련이 있는 거예요.”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그만 좀 구분해.”
재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 이놈이 아들한테 소리를 질러.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냐?”
아, 혼미하다. 혼미해.
신이시여. 제가 뭘 그렇게 잘못을 했습니까.
이때.
삐.
내선이 울렸다.
재준이 받았다.
“네.”
-저, 회장님이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할아버지.”
임병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저, 대통령님이 오늘 방문해도 되겠냐고 합니다.
“뭐? 대통령님이 왜?”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임병달은 ‘네가 불렀냐?’라는 표정을 재준을 돌아봤다.
아닌데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고 하세요.
임병달은 ‘네가 다 책임져라’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가능하다고 전해요.”
-네.
임병달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후루룩 차를 마시고 있는 재준을 노려봤다.
“너한테 볼일이 있는 거겠지?”
“그럴 겁니다. 도날드와 시앙핑이 동시에 방문한다니 도움이 필요하겠죠. 미국, 중국, 어느 나라에도 똑 부러지게 말을 할 처지는 아니니까요.”
“대통령이 직접 부탁하러 오는 건데 도와줄 거지?”
“할아버지, 근데 제가 나선다고 도움이 될까요?”
그런가?
임병달도 긍정의 결말이 안 보이긴 했다.
자그마치 세계 경제를 양분하고 있는 강대국 둘이 치고받고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서로 이해라고 화해하시죠’라고 하면 말을 들을까?
“그럼 저 둘이 싸우는 걸 지켜만 볼 거야?”
“그래야죠. 제가 굳이 나서서 싸움을 말릴 이유가 없잖아요.”
말리긴 왜 말려요.
오히려 더 싸우라고 부추겨야지.
일부러 붙인 싸움인데.
재준은 남몰래 이를 악무는 임병달을 보았다.
“혹시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있지.”
“뭔데요?”
“싸움의 무대가 한국이잖아.”
“설마 미국과 중국이 한국을 가운데 두고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라’ 뭐, 이럴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상대를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방법이니까.”
선택을 하라고?
이때, 진이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꼭 그럴 필요 있나요?”
임병달은 진을 보고 ‘요 조그만 놈이 뭘 안다고?’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니 궁금도 했다.
“너한테 좋은 방법이 있니?”
진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여줬다.
“먼저 여기에 뭘 줄지 올려놓으라고 하세요.”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