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7화 내 패는 내가 만드는 거야(4)
루바스가 부연 설명을 하며 마가리따의 손을 꼭 쥐었다.
“에테오피아를 거치는 육상 이동은 비용 때문에 선택하지 않은 겁니까?”
재준의 의문에 마가리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 윌켄이 케냐와 조건을 마무리하면 안전하게 유럽으로 실어 나를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게 얼마나 걸릴까? 시간이 많이 없는데.”
“한 달이면 해결되지 않을까요? 원래는 투마로우 시티에서 배로 가져와야 할 물건이 있는데 좀 비싸더라도 항공으로 실어오라고 하면 돼요.”
“항공 비용은 제가 대겠습니다.”
이번에도 루바스가 나섰다.
“좋은 아저씨네요.”
엘리자베스가 마가리따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마가리따가 진짜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그게 뭐죠?”
“북한 위로 자율주행 도시가 시작될 거예요.”
“네? 자율주행 도시라면…….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루바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살며시 물러났다.
예의 없는 자신을 나무라면서.
“하하, 우리 쪽에 관심이 아주 많으시군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희도 인간인데…….”
민망해하는 루바스.
마가리따가 얼른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제가 할 일이 뭔데요?”
“도시를 건설한다고 했잖아요. 도시는 거주민이 필요하고.”
“사람이요?”
“네.”
“조건이 뭐죠?”
“북한을 봐서 알겠지만, 돈이 아주 많이 들어가는 도시예요. 그래서 투자를 하고 들어올 사람을 알아봐 주세요.”
“거기 뭐가 있는데요?”
“뭐가 있긴, 새로운 삶이 있죠.”
“새로운 삶?”
“저희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루바스가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또 끼어들었다.
마기리따의 손을 꼭 쥐고서.
“그럼요. 가능하죠.”
“돈 많은 부자라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인맥이 좋으신가 보네요.”
“인맥보다는 제가 UVS를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 UVS.”
그렇지. 한때 스위스 은행들은 부자들의 금고를 자처했던 적이 있었지.
지금은 금융실명제로 변했지만.
설마 아직도 스위스 비밀 계좌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잊어버려야 한다.
스위스 정부는 OECD 회원국과 중국 등 총 47개국과 '다자간 금융정보교환협정(CRS)'를 체결해 2017년 공식 발효시켰다.
스위스 비밀 계좌도 이제 지나간 전설이 되었다.
그래도 그때 고객 리스트는 아직 남아 있는지 루바스가 재준에게 제안을 했다.
“이민자의 조건을 제시해 주십시오.”
“조건은 없습니다. 과거 악명을 떨쳤어도 자율주행 도시에 들어오면 순한 양처럼 살아야 하니까요.”
돈이 많은데 정직하게 번 사람이 어딨어?
로또를 맞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마가리따가 사고를 쳤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행운의 주인공을 데리고 있을 줄이야.
의외로 술술 일이 풀리는 것이 수상하다.
***
베네수엘라.
대통령 마두로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팜봇이 생산될 공장 건축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달 전 투마로우에서 워서스틴과 페렐라가 왔다.
그리고 대뜸.
“국채 만기가 다가오는데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라고 빚 독촉을 했다.
“아니요. 아직 커피 농장에서 수확하려면 3년은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 1년이 지났을 뿐인데. 만기라니요.”
“어, 이러면 곤란한데요. 갱단도 처리해줬는데. 첫 거래부터 삐걱대는 건 보스가 싫어할 겁니다.”
“아니, 분명히 임재준이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저희는 사람 좋은 보스가 아닙니다.”
일단 보스는 좋은 사람으로 남겨두고.
원래 이런 일에는 악역을 자처해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
무조건 좋은 게 좋은 건 나쁜 버릇이 들게 만든다.
조금 편하게 대해 주면 이걸 권리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특히 베네수엘라 같은 나락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더하지.
“이러면 안 되는데. 아직 석유도 채굴이 원활하지 않고 농장도 활성화되려면 멀었는데.”
쩝.
“어쩔 수 없군요. 땅이라도 압류해야지.”
“땅이요?”
“네, 해안가에 괜찮은 땅이 꽤 되던데. 그러지 말고 국채 갚는 대신 투마로우에 파시죠?”
“땅을 팔아도 되나요?”
“원래 안 되는데 저희도 돌아가서 보스에게 뭔가 핑곗거리는 있어야 하니까요. 마침 팜봇을 추가로 생산할 부지를 찾고 있는데 잘됐네요. 베네수엘라 국민들 취직도 시킬 겸 공장 몇 개 세우죠, 뭐.”
“정말입니까?”
“잘하면 예전의 베네수엘라 명성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보셨죠. 저희 팜봇이 진료하고 약을 조제하는 거.”
“봤지요. 아주 훌륭하던데. 오진도 없고.”
워서스틴이 마두로 대통령에게 다가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르헨티나 때부터 정치인 다루는 데는 도가 텄다.
“생각해 보세요. 전 세계 약국을 대처할 로봇이 몇 개가 필요하겠습니까?”
“전 세계…….”
“끔찍하죠. 도대체 공장이 몇 개가 필요한지. 아마 카르카스 전체에 첨단 과학 공단을 세워도 모자랄 겁니다. 이곳에 세계의 자본이 몰려서 미국 서부의 실리콘 밸리를 능가할지 몰라요.”
“그렇게까지.”
마두로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팜봇의 가치를 생각하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페렐라가 말을 이었다.
“당분간 팜봇을 대체할 그 어떤 로봇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로봇만 생산하는 게 아닙니다. 팜봇 업데이트를 위해 인공지능 센터도 들어서야 하고, 제네릭 제약 회사도 꽤 많이 들어서야 합니다. 상상이 가세요, 그 규모가?”
“그렇군요.”
“이게 다 베네수엘라 GDP를 끌어 올릴 거고, 국민도 먹고살게 되고, 석유 개발 기업에 추가 투자해서 유가 오를 때만 석유를 수출하면 10년 안에 부국이 되겠네요.”
“아, 진짜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이 체통이 너무 없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지금 그런 걸 차릴 상황이 아니다.
아무것도 못 하고 미국에게 쌍욕만 날리던 그가, 베네수엘라를 통째로 변화시키고 자신은 꿈에도 모르던 과이도의 음모를 박살내 버린 인간들에게 ‘그래도 이 나라의 대통령은 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페렐라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도드라졌다.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하겠지.
그리고 이제 전 세계가 버린 베네수엘라를 로봇 생산국으로 만들어 준다는데, 대통령 자리를 보존해서 찬란한 영광을 누리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그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마두로와 워서스틴, 페렐라는 첫 번째 공장이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떠십니까? 감회가 새롭지 않습니까?”
“그럼요. 빨리 공장이 가동되는 걸 보고 싶습니다.”
“뼈대만 올리면 바로 투마로우 시티에서 생산 설비가 도착할 겁니다.”
“오, 기대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두 번째, 세 번째, 수십 개의 공장이 차례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 건설 현장에 동원된 인력만 수만 명은 되어 보였다.
이제 이 지역은 24시간 CCTV가 인공지능과 연계되면서 수상한 자들을 추려내고 드론이 추적에 사용될 것이다.
물론 외곽에는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트럭이 허락되지 않은 이들의 방문을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고.
***
하루도 빠짐없이 언론에 등장하는 기사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비판 일색인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
잘했다 잘못했다를 떠나서 두 나라의 자존심으로 인해 주변이 금융위기를 맞았다는 사실이었다.
또 하나의 뉴스는 투마로우의 기행들.
블룸버그는 투마로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게재하고 카터리포트는 역시 기사 없이 사진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뉴스가 흘러나왔다.
케냐와 소말리아 국경 지대에 위치한 난민 지역의 땅을 사들이고 있다는 뉴스였다.
모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군가 투마로우 주가를 떨어뜨리기 위해 퍼트린 찌라시이거나 거짓 기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사진은 난민 지역에 등장한 팜봇 컨테이너와 줄지어 치료를 받는 난민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이에 국경없는의사회는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위해 난민 지역에서 합류했다.
이어 유엔 평화군이 지역 방어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소말리아 무장세력이 쳐들어올 것이고 이를 막을 군대가 없을 텐데 유엔 평화군의 도움을 거절하다니.
몇몇 기자들은 국경없는의사회 의사와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그들도 국경지대에서 무장 충돌이 벌어졌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의외의 기사가 소말리아 신문에 떴다.
충격적인 사진이 실렸다.
케냐의 난민촌은 총 세 군데로, 난민촌으로 들어가는 도로 또한 세 군데인데, 그 접경지대에 엄청나게 많은 무장 세력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사진이었다.
족히 수천 명은 넘어 보였다.
그리고 도로 주변으로 진을 치고 있는 수십 대의 컨테이너.
기사는 그 컨테이너가 수상하다고 마무리를 지었지만, 그 후 후속 기사는 실리지 않았다.
블룸버그는 이 기사를 아예 취급하지도 않았다.
***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의 연변 지역은 남미의 갱단과 아프리카의 무장 세력과 비교해도 거칠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 주민들은 국경 너머로 보이는 북한의 변화에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모든 게 통제되어 있지만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북한으로 넘어오려고 했지만, 북한의 모든 군대가 국경에 집중되어 있어서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북한은 더는 한국과 대치 국면을 만들지 않아도 되니 최소한의 인력 빼고 모두 북쪽을 경계했다.
그런데 요즘 아주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투마로우가 두 나라 정부의 허락하에 자율주행 도시를 늘리겠다는 것.
삶에 찌든 사람들은 환영하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이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어둠의 자식들은 절대 지역을 내놓지 않겠다는 듯 무장을 늘렸다.
그런데 어느 날, 북한군이 후방으로 밀려나더니 전방에 웬 컨테이너가 배치되었다.
재준은 멀리서 컨테이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컨테이너 한 대가 방어할 수 있는 거리는 대략 사방 1km입니다.”
투마로우 시티의 방산업체 애니소톤의 CEO 테오 루카스가 재준에게 말했다.
“한 대에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나 합니까?”
재준이 묻자 루카스는 야릇하게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폈다.
“원자재로 따지면 10만 불도 안 들어갑니다.”
“그럼 100만 불에 팔면 되겠네요.”
“저희도 100만 불로 책정했습니다.”
“진코퍼레이션 특허는 얼마나 들어갔습니까?”
진코퍼레이션은 재준이 진에게 만들어 준 회사.
회사 이름으로 특허를 관리해서 누가 특허권자인지 모르게 하고 회사 이름으로 여러 고가의 장비를 부담 없이 살 수도 있었다.
“총 400가지 특허 중에 12가지 들어갔습니다.”
“그럼 저번에 베네수엘라에 사용된 것보다는 성능이 어느 정도 나아졌겠네요.”
“아유 그때는 급하게 만드느라, 그냥 정면에 있는 적을 인지하는 장난감에나 쓰이는 센서를 사용한 겁니다. 지금 것과 비교하면 안 됩니다.”
“그럼, 이 장비 루카스가 직접 공개하세요.”
“정말이요? 이걸 공개하겠단 말입니까?”
“그럼요. 그래야 돈을 벌 거 아닙니까? 우리가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우리의 원칙을 잊으면 안 됩니다.”
“민간인 방어 이외에는 팔지 않으며, 언제든 이쪽에서 작동을 멈출 수 있다. 이 원칙 말씀이시지요?”
“언제든 이쪽에서 작동을 멈출 수 있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재준이 망원경을 들어 재차 컨테이너를 확인했다.
저게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다시 한번 뒤집힐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