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이 석유로 국 끓여 먹을 거야?(18)
“기계라니, 인공지능이라니까. 그리고 인공지능은 그러라고 만든 거 아냐? 보다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최선의 방법을 찾으라고 만들었잖아. 누가? 우리가. 인공지능이 주가나 선물에서만 최선의 방법을 찾는 건 아니지. 현실문제도 똑같아.”
“맞는 말입니다.”
펠그리니가 인공지능을 위해 퀴니코에 맞섰다.
“퀴니코, 인공지능을 기계라고 보면 안 돼. 조력자라고. 조력자.”
“펠그리니, 그러나 인공지능이 잘못된 선택이라도 해서 지구가 멸망하면 어쩌려고?”
“뭐?”
너 영화 너무 많이 봤구나.
“하하, 퀴니코, 인간의 두뇌는 기억과 의지로 나누어져 있어. 이 둘이 동시에 작용해야 우린 인간이라 부르는 거야.”
“그건 알지.”
“우리가 만든 인공지능은 기억만을 무한히 확장하고 의지를 아예 주지 않는 거라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 주지만 최선의 방법을 행할 순 없어.”
“그래도 언젠가는 의지가 생기지 않을까?”
“어떻게? 최첨단 축구공을 만들면 축구공이 축구를 하고 싶어 하나?”
“음, 이해가 되는군.”
자, 자.
재준이 나섰다.
“투자은행은 인공지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기업이 되었어. 특히 우리 투마로우는 정도가 심하지. 지금도 인공지능이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고 앞으로 많은 일들을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야 할 거야. 하지만 책임은 우리가 져야지. 투마로우 시티, 베네수엘라, 더 나아가서 세계는 우리만 바라보고 있어. 이게 무슨 말인 줄 알지?”
흠.
윌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끌고 나가야 하는군요.”
“그렇지.”
“그래서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그럼 해야겠군요.”
“역시 윌켄은 아네. 왕의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라 상상이 될 거야.”
“언제나 긴장과 여유의 싸움이었습니다. 수면 위로는 고고하게 헤엄을 치지만 수면 아래에선 쉴 새 없이 발을 움직이는 백조였죠. 하하.”
윌켄의 말에 모두 공감했다.
이 중에 천재라는 소리를 듣지 않은 시절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재준이 이들을 끌어모으기 전에는 나름 정상에 서 본 사람들이다.
그것도 전 세계의 천재들이 모인다는 월가에서.
겉으로 보기엔 성공 가도를 달리는 군왕처럼 보였겠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밤잠을 설치고 끼니를 거르면서 발버둥 쳤던 이들이다.
윌켄은 정크 본드의 왕이었고,
워서스틴의 인수의 제왕이었다.
페렐라는 인수 산정의 천재였고,
퀴니코는 공매도의 신이었다.
블록은 변호사 출신 중국 전문가였고,
펠그리니는 수학의 천재였다.
박혁은 세기의 해커였고, 박민수와 강호석은 이미 인수 전문가 중에 저세상 경지에 도달했다.
지금 엘리자베스와 마가리따는 없으니 제외.
그중에 재준은 뭘까?
뭐긴 뭐야. 미래를 알고 있으니 사기캐지.
거기다 느낌상 두 명의 인간이 혼재되어 있으니 유령이다.
인간이 어떻게 유령을 이기겠는가.
“그럼,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다음 할 일은 뭘까?”
“지배자면 독재자. 군대를 만드는 겁니다.”
워서스틴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재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워서스틴을 바라봤다.
넌 지금이 21세기인 건 아는 거지?
“아니, 현대 말고 중세나 고대로 하자. 군대가 웬 말이야.”
“고대면 부족장?”
페렐라가 두 손을 머리 위로 해서 뿔을 만들었다.
아, 얘도 친구 따라온 거 맞구나.
어쩜 이렇게 찰떡궁합이냐.
부족장이 뭐냐 부족장이.
“중세. 중세로 해.”
“그럼 종교 지도자? 교황?”
“좀 높게 잡지?”
“그럼 신이요? 지저스나 모하메드 같은?”
“그렇지. 그쪽 이미지가 낫겠네. 그렇다고 우리한테 기도를 하거나 절을 하진 않을 거 아냐. 시대가 시대인데.”
“뭐랄까 꼭 사이비 종교 같아요.”
“사이비?”
아이고 머리야.
이렇게 상상력이 부족해서야.
아니지, 난 진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해하는 거겠지.
그렇다고 진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자, 잘 들어. 우린 지금부터 종교를 만드는 거야. 그렇다고 사이비 종교를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라오게 만드는 거야. 알겠지.”
멍.
그 표정들은 뭐야?
맹목적이란 단어 선택이 좀 그런가?
“자, 다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는 건 어때.”
“아 성경이나 코란 같은.”
페렐라의 지적에 재준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지. 성경을 왜 아직도 사람들이 따르는 줄 알아?”
“홀라당 속아 넘어가서?”
으이그.
워서스틴 진짜 너.
“과학적 사실 때문이야.”
“네?”
워서스틴이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예요?
“과학과 종교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워요.”
재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 아니야. 내가 증명해 줄게.”
모두 귀를 쫑긋 세우며 재준을 바라봤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너희들은 나의 명을 따르라, 그러면 번성하리라’.”
“아, 창세기네요.”
“다음 2017년 현재 미국 내에 교회는 9천 개, 목사는 총 2만 4천 명, 성도는 130만 명, 이들의 평균 수명은 80.5세, 수입은 연봉 6.2만 불.”
“이건 그냥 리서치한 거잖아요.”
“그렇지. 이 둘을 합쳐봅시다. 하나님의 명을 따르는 미국 내 9천 개 교회의 130만 명은 번성하고 있다. 맞지?”
헐.
퀴니코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종교 윤리와 과학적 사실을 합쳐서 행동 지침을 내린 거네요. 번성하려면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라?”
“그렇지, 잘 이해했네.”
“종교가 성공하려면 과학적 사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거군요?”
“그렇지. 좀 더 복잡한 수식과 거창한 과학적 결과가 나열되면 믿음은 더 강해지지.”
이거 사이비 같은데.
퀴니코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재준이 손짓으로 ‘그건 아니야’라고 말했다.
“난 베네수엘라 이야기를 만들까 해.”
“어떻게요? 우리도 성경을 인용하는 겁니까?”
“아니, 그건 너무 고리타분하고. 먼저 종교 윤리 자리에 유엔 헌장을 넣을 거야. 하나, 평화의 파괴를 진압하기 위한 유효한 집단적 조치를 원칙에 따라 실현한다.”
엥?
펠그리니가 재준의 말에 한쪽 입술을 올렸다.
“보스, 그거 유엔 헌장 앞뒤 중간까지 다 자르고 필요한 말만 나열한 거잖아요. 원래는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이를 위하여 평화에 대한 위협의 방지·제거 그리고 침략행위 또는 기타 평화의 파괴를 진압하기 위한 유효한 집단적 조치를 취하고 평화의 파괴로 이를 우려가 있는 국제적 분쟁이나 사태의 조정·해결을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또한 정의와 국제법의 원칙에 따라 실현한다’잖아요.”
와, 별걸 다 외우고 있네.
“아니 뭐, 성경은 안 그런가? 성경 구절 인용이 다 앞뒤 맥락 잘라 먹은 다음 필요한 것만 쏙 빼서 쓰잖아. 불교는? 이슬람은? 도교, 유교 다 똑같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됐고,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다음으로 유엔의 과학적 사실을 적시해야겠지.”
“그거야 뭐,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기구가 설립되었어요. 그게 국제연맹이죠. 그러나 국제연맹은 주요 강대국들의 참여가 부족하였고, 실질적으로 분쟁을 조절할 만한 힘이 없었어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죠. 그래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의 유럽 침략 등 수많은 전쟁범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어요. 국제연맹은 이러한 침략 행위를 사전에 막지 못하여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인 제2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키는 원인을 제공했고요. 이에 주요 승전국들은 실질적으로 국제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고, 분쟁과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강력한 국제기구가 창설됐어요. 이게 유엔이에요.”
펠그리니가 마치 어제 일처럼 줄줄이 읊었다.
아. 여기 인공지능이 또 있네.
재준을 비롯한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다물질 못했다.
넌 왜 그런 걸 정리하고 다니는 거니?
모두의 반응에 펠그리니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죽음으로 유엔에 대해 정리하는 습관이 있어서.”
아, 아버지. 그렇구나.
펠그리니의 말에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지금 유엔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죠. 그나마 유엔 평화군이 세계 각지에서 티를 내는 상태고요.”
딱.
재준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야. 우리가 이번 베네수엘라의 평화군이지.”
그런가?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네.
“자, 그럼, 우리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언론사가 필요하겠지.”
“우리도 언론사가 있잖아요. 카터리포트.”
“카터리포트 하나론 부족해. 한쪽은 종교, 한쪽은 과학 기사를 쏟아낼 언론사가 필요하니까. 카터는 과학 쪽을 맡는다면 종교 쪽을 맡아줄 언론사가 필요하겠지? 역사와 전통, 그리고 영향력이 막대한.”
설마. 아니겠지.
보스 거긴 우리랑 적이에요.
“당장, 블룸버그를 만나야겠어.”
“하하하, 알겠습니다. 제가 미팅을 잡죠.”
윌켄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더 들어 봐야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실행에 옮겨서 가능한지 아닌지를 보고 판단하는 게 빠르니까.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듣기를 좋아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이야기다.
더 놀라운 능력은 인간은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힘이 되고 종교가 되었다.
이제 세상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퍼질 것이다.
투마로우가 유엔이 하지 못한 일을 한다.
***
블룸버그 본사.
재준이 로비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재준이니까.
블룸버그에게 빅엿을 먹였는데도 다들 존경의 눈빛이 역력했다.
아마 베네수엘라의 사건이 이들 가슴에 작은 불을 지폈나 보다.
힘없는 약자를 위해 비난도 감내하겠다는 인간. 임재준.
“어서 오세요.”
블룸버그가 직접 로비까지 내려왔다.
지난 과거 일은 과거 일이고 지금은 가장 핫한 뉴스의 주인공이 자신의 본사를 방문한다는데 버선발, 아니 양말 채로 뛰어나와야 했다.
재준이 블룸버그를 보자 먼저 악수를 청했다.
“얼굴이 아주 건강해 보이네요.”
하하.
“다, 임재준 덕분 아닙니까?”
블룸버그는 장난삼아 이를 꽉 물고 말했다.
“그럼, 앞으로도 종종 사건을?”
“사양하겠습니다. 하하하.”
둘은 걸어서 CEO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진짜 어쩐 일로 블룸버그를 다 찾아온 겁니까?”
“부탁 하나 드리러 왔습니다.”
“부탁이요?”
블룸버그가 재준의 말을 듣고 뒤를 살짝 돌아봤다.
혹시라도 누가 들었을까 걱정하면서.
투자은행 오너가 언론사에 와서 부탁이란 단어를 쓰는 게 그리 좋은 단어는 아니니까.
“타시죠.”
“네.”
둘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블룸버그가 다른 이들에게 손바닥을 들어 정지시켰다.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
둘만의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
띵.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블룸버그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떤 부탁입니까?”
재준이 빙글 웃었다.
“투마로우가 베네수엘라에서 하는 일에 서사를 좀 붙여 주었으면 합니다.”
“서사라면 당위성을 부여해 달라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좀 과장되게요.”
“잘못하면 우스꽝스럽게 될지도 모릅니다. 기업에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 이유가 사람들이 비웃기 딱 좋거든요.”
“그거. 그걸 원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