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7화 이 석유로 국 끓여 먹을 거야?(14)
AAG 빌딩 66층.
“베네수엘라 갱단은 어때?”
재준의 말에 윌켄은 아주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석유를 열심히 팔아먹고 있어요. 베네수엘라 주민들이 점점 카라카스 쪽으로 몰려드는 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도 않고. 오히려 잘됐다 싶은 건지. 카라카스 주변에서 갱단과 정부군의 충돌도 많이 줄었어요. 좀 이해가 안 갑니다.”
“곡물 배급은 잘 되고 있나요?”
“그럴 리가요. 카라카스를 중심으로 배급이 이루어진다고는 하나, 뒤로 빼돌려지는 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 통제할 수 있는 양이 아닌데요.”
“그럼 다음 단계를 진행합시다.”
“다음 단계요? 뒤로 빼돌려진 곡물을 통제할 겁니까?”
“아니요. 알아서 전국으로 잘 뿌려지고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둬야죠. 그보다 베네수엘라에 가장 시급한 게 몇 가지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보충할 방안을 마련하려고요.”
윌켄은 재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시급한 일? 보충할 방안?
베네수엘라에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 걸까?
“펠그리니와 박혁, 너희에게 소개할 사람이 있어.”
“누구요?”
“어디 보자. 올 때가 됐는데.”
재준은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바로 1층 로비에서 손님이 왔다는 연락이 왔다.
잠시 후.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앉으시죠.”
재준은 두 사람을 보자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펠그리니와 박혁에게 한 사람을 먼저 소개했다.
“먼저 여기는, 투마로우 시티에서 약사를 대신할 로봇을 연구하는 ‘팜페어’사의 가스통 가펑클이야.”
펠그리니는 귀에 익은 회사 이름에 손이 먼저 나갔다.
“팜페어요? 정말 반갑습니다. 얘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아, 네. 하하, 저를 반갑게 맞아주는 분이 있네요.”
“왜요?”
“미국에선 약사, 의사협회에서 대놓고 내쫓기는 분위기였거든요. 그래서 투마로우 시티로 회사를 옮긴 거고요.”
“아, 그렇죠. 하긴 자기 일자리 없어지는 게 환영할 일은 아니죠.”
“맞습니다.”
“투마로우 시티에 로봇을 연구하는 분들 꽤 많죠?”
“많지는 않지만 다양하게 있습니다. 모두 기득권에 밀려온 분들이죠.”
자, 자.
재준이 수다쟁이 펠그리니를 제지하며 본론을 이끌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이미 다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맥박이나 혈압, 혈액 검사 등 생체 반응은 디지털화가 다 되었고 이를 기존 의료 데이터에서 찾아 정확한 약을 조제해 주면 됩니다. 다만. 인공지능은 저희 분야가 아니라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펠그리니, 그럼 우리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도울 수 있겠지?”
“월가의 퀀트를 더 영입하면 러닝머신으로 결과를 도출할 알고리즘을 만들 수 있습니다. 환자를 보고 여러 가지 증세를 확인한 다음 가장 최적의 효과를 내는 약을 제시할 겁니다. 그렇게 어려운 부분은 아니라고 봅니다.”
재준이 베네수엘라에 하려는 일은 인공지능을 가진 단순한 작업을 하는 로봇을 실전에 투입하는 것이다.
맨 처음으로 간단한 진료 후 약을 조제해 주는 로봇을 현장에 투입하려고 한다.
의사의 진료와 약사의 조제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로봇.
전쟁과 유사한 상황의 베네수엘라 주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의료시스템이다.
단순한 발열이나 오한에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못해 쉽게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이었으니까.
워서스틴과 페렐라가 남미의 상황을 알렸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로봇의 오진으로 인간이 잘못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천만에, 인간이 저지른 실수를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인간의 감각으로 측정하는 맥박이나 혈압보다는 훨씬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예로 단순히 열이 있다고 해열제를 주는 게 아니라 외형에서 보여지는 특이 사항과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러닝머신이 수집한 데이터와 비교하여보다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현재 베네수엘라에서는 로봇의 진단이 훨씬 효율적이다.
로봇은 절대 지치지 않으면서 24시간 진료를 할 수 있고 전 세계 의료 기록을 계속 업데이트하다 보면 실수할 확률이 지속적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임금을 안 줘도 된다.
하지만 아직은 로봇이 인간이 행하는 수술까지는 어려웠다.
그럴 필요도 없고 단지 로봇의 등장만 보여주면 된다.
재준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또 한 사람을 향했다.
“그리고 여긴 인공지능 판사를 연구하는 ‘트루로’사의 존 고든.”
“네? 인공지능 판사요?”
“네. 그런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존 고든은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은 듯 말했다.
재준이 고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쩌면 의사나 약사보다 더 위험한 적을 상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위험한 정도가 아니네요. 미국에서 실현 가능성 제로에 가까운 일이잖아요. 감히 사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건데.”
하하.
고든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 저희도 여기 가펑클처럼 판례를 인공지능에 입력하여 최선의 판결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지만 아직 재판 과정을 다루기에는 갈 길이 멉니다.”
“그래도 재판 자료를 뒤지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은 절약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래서 이번에 인공지능을 본격적으로 이용할 생각입니다.”
“괜찮네요.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펠그리니는 인공지능을 활용할 또 다른 분야가 등장하자 새삼 즐거웠다.
재준은 일어서서 창가로 가서 안개가 뿌옇게 드리운 뉴욕항을 바라봤다.
월가로 인공지능에 필요한 인재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게 해야 한다.
지금도 수많은 퀀트가 월가에 있고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밤낮으로 알고리즘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공지능 분야는 월가가 그 어디보다 월등하게 앞섰다.
이세돌을 이긴 딥마인드나 이미지를 인식하는 Dall. E2가 있지 않으냐 하겠지만 이는 실전용이 아니라 순수 연구용이다.
딥마인드처럼 바둑 한 수를 두기 위해 돈을 쏟아부어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투자은행은 한 군데도 없다.
월가의 인공지능은 이익을 못 내면 바로 폐기되는 신세.
오직 실제 결과물인 돈을 벌어들이는 인공지능만 있다.
그리고 바둑보다 증권은 훨씬 더 복잡한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그 안에서 최적의 보상의 수를 찾는 것은 너무 복잡해서 말로 다 하기 어렵다.
근데 왜 우리는 월가의 인공지능을 모르는 걸까?
당연하다. 이건 투자은행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알고리즘이 알려지는 순간 다른 은행의 공격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전부 수면 아래에 잠겨서 은밀하게 진행할 뿐.
요즘 펀드 매니저란 직업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언론에서 거의 들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애널리스트는 들어 봤어도 펀드 매니저는 거론하는 횟수가 적다.
현재 펀드 매니저가 고객의 요구를 일일이 응대하여 투자를 하는 투자은행은 없다.
인원도 80% 감축되었고 투자는 알고리즘, 즉 인공지능이 거의 도맡아서 하고 있다.
이게 투자은행의 현주소다.
월가의 퀀트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줄 테니 잘 보라고.
엘리자베스가 재준 옆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항우울제와 인공지능 로봇까지 베네수엘라에 들어가면 국제 사회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
큭.
재준이 웃으려다 미소로 끝냈다.
“감히? 우리한테 메가폰을 들이미는 나라는 그날로 투마로우 제재 대상이 될 거야.”
“우리가 제재를 가한다고요?”
“그럼.”
“어떻게요?”
“가장 쉬운 건 국채 만기 연장을 안 해주는 거지. 추가 국채 발행은 물론 안 되지. 그리고 해당 국가 기업의 회사채에 대한 마진콜을 진행할 수도 있고. 그럼, 당장에 돈이 묶여버려. 투마로우 시티는 덤이고.”
“그러다 전쟁이라도 나면?”
“어디랑? 투마로우 본사가 있는 미국이랑? 아니면 투마로우 시티가 있는 북한이랑? 현재증권이 있는 한국이랑? 어디랑 전쟁을 해?”
“어? 그러고 보니까…….”
“그렇지? 국가가 우리의 보호막이라니까. 누구도 투자은행을 제재할 능력을 가지긴 힘들어. 제조업이라면 상품에 관세를 붙이든 불매를 하든 할 테지만 돈에다가 뭘 할 수가 없잖아. 우리를 통제할 수 있는 곳은 신용등급기관인데, 이유 없이 등급에 손을 댔다가는 역풍을 제대로 맞을 수 있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못 해.”
“WTO가 있잖아요.”
“거긴 진정한 허당이지. 약소국이야 강대국 도움으로 어찌어찌 제재를 가한다고 쳐도. 강대국이 싫다고 하면 어쩔 건데. 약소국들이 힘을 모아 제재할 거야? 그러다 카킬이 곡물이라도 안 주면 다 굶어 죽지 않겠어?”
“힘들구나.”
“그리고 지켜봐. 만약 인공지능 로봇의 성능이 효과가 있다고 인정되면 의사가 부족한 나라에서부터 로봇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할걸.”
“수출도 하려고요?”
“그럼, 우린 투마로우 시티에 들어 온 기업들에게 시장을 만들어 줘야지. 그래야 진정한 과학 도시가 되지 않겠어?”
“베네수엘라 주민이 실험 대상이네요.”
“그렇지.”
“그러다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네 마네 하면 어쩌려고요.”
“큭큭. 가식적인 인간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성공하기를 기대하고 있을걸.”
“하긴.”
“엘리자베스, 네가 할 일이 있어. 카킬 이름으로 인도에서 실력은 좋은데 파산 직전인 제약 회사 몇 개만 인수해. 그쪽에 우리가 필요한 물량을 왕창 배정해서 덩치를 키우고 다른 제약 회사를 합병하는 식으로 인도를 장악해 봐.”
“흠, 나쁘진 않네요.”
“할 수 있겠지?”
“네.”
그래, 이제 진짜 전쟁을 할지도 몰라.
***
베네수엘라.
과이도 국회의장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네. 투마로우가 의료 로봇을 투입한다고 합니다.”
-의료 로봇이요?
“병원이 아닌 약국 개념으로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을 다룰 예정입니다.”
-임재준, 재미있는 일을 하는군요. 이제 로봇이라…….
“그래서 법 개정을 추진 중입니다. 거부하기는 힘듭니다. 명분이 없습니다. 윤리를 따지기에는 베네수엘라 상황이 너무 힘듭니다.”
-조금만 버텨 보세요. 여기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툭.
전화를 끊은 과이도 국회의장은 핸드폰을 보고 피식 웃었다.
준비하기는 하는 건가?
차라리 병력을 지원해 주면 금방 끝날 일을.
다 망가진 국가를 넘겨받아 봐야 나한테 뭐가 남겠어.
다시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통화를 시도했다.
-네. 의장님.
“3개월, 3개월 후에 카라카스로 돌진합시다.”
-결정하신 겁니까?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상하다뇨?
“우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단 말입니다.”
-아,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병력을 끌어모으겠습니다.
툭.
과이도는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이상해.
나부터도 이상해. 기분이 왔다 갔다 한단 말이지.
주민들 불만도 눈에 띄게 줄었고.
커피 농장 일도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고.
언제부터 베네수엘라 국민이 이렇게 열심히 일했다고.
배급양을 늘려서 그런가?
이게 말이 돼?
인간인데, 그동안 지옥 같은 경험을 단지 배불리 먹여준다고 다 잊어버린다?
거기다.
의료용 로봇이 들어오면 더 좋아질 텐데.
이러다 마두로가 다시 당선되는 거 아냐?
당선이 문제가 아니지.
이번 기회가 지나가면 마두로가 챠베스 이상으로 국민들의 신임을 얻는 건 당연하잖아.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절대 안 돼.
마두로를 죽이는 한이 있어도, 안 돼.